• 재미있는 초등역사
  • 조선
  • 조선의 화약 무기
  • 임진왜란의 승리를 이끈 조선의 화약 무기

임진왜란의 승리를 이끈 조선의 화약 무기

<신기전기와 총통기(행주산성 대첩기념관)>   

“장군! 10배가 넘는 왜적이 산성 아래를 포위하였습니다.”

“우리 군의 수가 적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에겐 화차가 있다.”

“활을 쏘아라! 화차로 적을 막아라!”

화차란 화살이나 탄환을 화약의 힘으로 쏘는 무기를 말해요. 조총이란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맞서 조선군은 화차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어요.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화약 무기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어떤 활약을 했을까요?

화약 무기, 조선으로 이어지다

우리 민족의 화약 무기는 고려 말 최무선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화포를 만들어서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무찔렀지요. 조선 건국 이후 최해산은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 화약 전문가가 되었어요. 그는 태종과 세종을 모시며 조선의 화약 무기들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어요.

최해산은 주로 화살을 쏘던 화약 무기들을 돌이나 쇠로 만든 탄환을 쏠 수 있도록 바꾸었어요. 그리고 한 번에 수십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화차도 개발하였어요.

세종 때에는 가장 많은 화약 무기가 개발되었어요. 당시 만들어진 화약 무기들은 1592년(선조 25)에 발생한 임진왜란 때에도 큰 활약을 했어요.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쓰셨죠. 만약 판옥선에 화포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이 이끌었던 수군의 승리도 불가능했을 거예요.

<조선 수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   

일본군에 맞서 성을 방어할 때 화약 무기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어요. 진주성이나 행주산성에서도 일본군은 많은 수의 병력으로 순식간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하지만 조선군을 얕잡아 본 일본군 앞에 수백 발의 신기전과 탄환이 날아왔어요. 당황하는 일본군 사이로 비격진천뢰도 날아와 터졌어요. 포탄 하나에 수십 명의 일본군이 한꺼번에 쓰러졌지요. 화약 무기에 큰 피해를 당한 일본군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조선군의 수는 일본군에 비해 적었지만, 화약 무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중요한 전투마다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화약 무기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 총통

총통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해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로, 화포의 한 종류예요. 구리와 주석, 납을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들었지요. 총통은 크기, 화약의 중량, 탄환의 수, 사정거리에 따라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으로 나뉘었어요.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이름 지은 거예요.

가장 큰 총통은 천자총통이에요. 천자총통은 쇠로 만든 탄환이나 화살 모양의 대장군전을 멀리 쏘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천자총통은 몸체가 크기 때문에 한 번에 사용하는 화약의 양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은 화약을 적게 쓰면서 효율이 좋은 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을 더 많이 사용했답니다.

<총통과 내부모습(행주산성 대첩기념관)>   

조선 수군은 멀리 있는 적선을 향해 큰 쇠 탄환이나 장군전을 날렸어요. 멀리서 날아온 탄환과 장군전에 맞은 일본군의 배는 옆에 구멍이나 물속으로 가라앉았어요. 적선이 장군전을 피해 조선의 판옥선에 가까이 오면 조란환을 준비했어요. 새알 크기만 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조란환은 작은 크기의 쇠구슬이나 둥근 돌을 말해요.

<장군전(전쟁기념관)과 철환(강화전쟁박물관)>   

지자총통에는 200여 발, 현자총통에는 100여 발의 조란환을 넣어 한꺼번에 발사했어요. 배를 가까이 대고 건너와 싸우려던 일본군에게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을 거예요. 조선 수군의 총통은 일본군의 조총보다 더 멀리 쏠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은 탄환을 쏠 수 있었어요. 성능이 매우 우수했던 것이지요. 총통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한 번도 패하지 않았어요.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친 화차

화차는 수레처럼 바퀴를 달아 좁고 험한 도로에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화약 무기였어요. 병사가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조준해 쏠 수도 있었어요. 주로 화약통을 단 화살이나 쇠 탄환을 쏘기 위해 만들었어요.

화약통을 단 화살을 최무선은 ‘달리는 불’이란 뜻의 ‘주화’라고 했어요. 최무선의 ‘주화’를 세종 때 개량하여 ‘신기전’을 만들었지요. 신기전은 화살 앞부분에 있는 화약통의 점화선에 불을 붙이면, 화약이 타면서 연소 가스를 분출해 날아가는 로켓 무기였어요. 신기전은 크기에 따라 대, 중, 소신기전으로 나눴어요.

<신기전의 종류와 내부 모습>   

대신기전과 중신기전은 화약의 힘으로 날아가다 발화통의 점화선에 불이 붙으면서 시간차를 두고 폭발하게 만들었어요. 발화통 속에는 화약과 함께 철가루를 넣어 위력을 더욱 크게 만들었죠. 대신기전은 압록강변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로 북쪽 국경선을 침범한 여진족을 몰아내기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주로 소신기전을 사용했어요. 조선군은 신기전기에 신기전을 끼워 넣어 미리 준비해 두었어요. 그리고 일본군이 산을 올라 몰려오면 신기전기를 화차 위에 올려 신기전을 발사했어요. 화약이 터지는 큰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수백 발의 화살이 적진을 향해 날아갔어요.

화차에 신기전만 사용한 것이 아니에요. 사전총통 50개를 하나로 묶은 총통기도 사용했어요. 한 개의 사전총통 구멍 안에는 4~6개의 작은 화살들을 넣을 수 있었어요.

하나의 총통기를 발사하면 한번에 200~300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어요. 행주산성에서는 승자총통을 이용하여 화살 대신에 여러 개의 작은 쇠 탄환을 넣어 쏠 수 있는 화차가 사용되었어요.

<승자총통 여러 개를 쌓아 만든 총통기(전쟁기념관)>   

행주산성에서 조선군은 한꺼번에 많은 화살과 탄환을 쏠 수 있는 화차를 이용해서 일본군에 맞섰어요. 하늘을 까맣게 덮은 듯 마구 쏟아지는 화살과 탄환에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요. 조선군이 수적으로 10배가 넘는 일본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화차였어요.

조선의 비밀 병기, 비격진천뢰

일본이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조선의 화포장이었던 이장손은 비밀리에 포탄 하나를 개발하고 있었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비격진천뢰’를 완성했지요.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 하여 비격진천뢰란 이름이 붙었어요.

이전에 사용하던 포탄은 날아가 적선이나 성벽을 깨부수는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달랐지요. 포탄 내부에 설치한 대나무 통 안에는 점화선이 감겨 있었어요.

그래서 탄환이 날아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터지도록 만들었어요. 일종의 시한폭탄이었죠. 포탄을 빨리 폭발시키려면 점화선을 10번을 감고, 늦게 폭발시키려면 15번을 감았어요. 포탄 속에는 날카로운 쇳조각들도 들어있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 나갔어요.

<비격진천뢰와 내부 모습>   
백제군사박물관

비격진천뢰는 점화선에 불을 붙여 손으로 던지기도 했지만, 주로 완구라는 총통을 사용했어요. 대완구를 사용하여 발사하면 포탄이 500~600보 정도 날아갔어요. 그리고 적진 한가운데를 굴러가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터졌지요. 진주성 전투에서 비격진천뢰를 목격한 김성일은 이런 기록을 남겼어요.

진주성의 승리를 임금께 알린 김성일은 비격진천뢰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어요.

김시민은 적이 몰려오자 비격진천뢰와 질려포(나무통 속에 화약과 쇳조각을 넣어 만든 폭탄)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 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맞아 넘어져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무기가 바로 비격진천뢰에요. 비격진천뢰를 처음 본 일본군들은 포탄 주변에 모여 구경하다 폭발과 함께 죽기도 했어요. 그들은 대열의 한가운데를 굴러가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터지는 폭탄의 위력에 크게 겁을 먹었어요. 겁을 먹은 일본군은 비격진천뢰를 ‘귀신 폭탄’이라 부르기도 했어요.

당시 진주대첩뿐만 아니라 행주대첩, 한산도대첩 등의 여러 전투에서 비격진천뢰가 사용되었어요. 비격진천뢰가 임진왜란을 끝내는 데 큰 기여를 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변이중의 화차

선조 때의 문신 관료 변이중은 여러 자료를 정리하며 무기 개발에 몰두했어요. 그는 부국강병을 강조했던 율곡 이이의 제자였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군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계속 패하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고자 했어요.

변이중은 문종 때 개발된 화차에 관심을 가졌어요. 한 번에 많은 양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화차를 좀 더 개선하고 싶었지요. 그의 눈에 띈 것은 승자총통이었어요. 승자총통은 임진왜란 직전에 개발된 조선의 개인용 무기였어요. 승자총통에는 화살뿐만 아니라 쇠 탄환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조총에 비해 정확도가 떨어졌어요.

변이중은 총통 여러 개를 동시에 발사하는 방법으로 단점을 보완했어요. 그리고 기존의 화차가 병사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해 화차 주변에 나무판을 붙여 보호벽을 만들었어요. 변이중은 지금의 장갑차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화차를 고안했던 것이에요.

<복원한 변이중의 화차와 내부 모습>   

화차에는 모두 40개의 승자총통이 장착되었어요. 각각의 승자총통에는 15개의 쇠 탄환을 장전할 수 있어 화차 한 대로 한꺼번에 600발의 탄환을 쏠 수 있었어요.

“한양을 되찾으려면 행주산성을 먼저 차지해야 하는데, 군사 수가 적어 큰 걱정이오.”

“장군, 제가 이번에 만든 화차를 한번 사용해 보시지요.”

“화차라고 하셨소?”

변이중은 300대의 화차를 만들었고, 그중 40대를 권율 장군에게 주었어요. 권율 장군은 변이중이 만들어 준 화차를 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대승리를 거두었지요.

평화 시에 위급할 때를 잊지 않아야 한다. 나라를 위해 꼭 갖춰야 할 것은 병력과 병장기이며, 이것이 약하면 강적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변이중은 자신의 문집에서도 강한 군대와 무기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어요. 여러분은 외적에 맞서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외적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조상들의 모습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아요.

[집필자] 신범식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