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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조선을 뒤흔들다

<연산군 묘(서울 도봉구)>   
문화재청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내 앞으로 가져오라.”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보지 않습니다. 임금께서 마음대로 보신다면 어느 사관이 소신껏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사초란 실록 편찬을 위해 사관이 그때그때의 일을 기록해 둔 원고를 말해요. 사실 그대로를 적고, 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사관의 이름이나 관직조차 기재하지 않지요. 그런 사초를 연산군은 왜 가져오라고 했을까요? 이후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무오사화가 일어나다

1498년, 연산군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어요.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이 만들어졌지요. 실록청 책임자는 이극돈이란 사람이었지요. 어느 날 이극돈은 사초를 살펴보다 흠칫 놀랐어요. 혹시나 했는데,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의 비리를 상세히 쓴 것이었어요. 큰일 났다 싶었어요. 이대로라면 자신은 물론 가문까지 망신당할 게 뻔했어요. 고심 끝에 이극돈은 김일손을 은밀히 찾아갔어요.

“이보게. 한 번의 실수를 사초에 기록해놓으면 내 꼴이 어떻게 되겠나? 나의 일을 실록에서 빼주면 자네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네.”

그러나 김일손은 강경하게 거절하였어요. 이극돈은 입이 바짝 탔어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지요. 그는 김일손의 사초를 꼼꼼히 살폈어요. 혹시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낼 생각이었지요. 그러다 매우 범상치 않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것은 바로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어요.
* 조의제문 : 의제를 애도하는 글

“정축년 10월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에 초나라 왕 의제가 나타나 ‘나는 초나라 회왕인데, 항우에게 살해당해 물에 잠겼다.’라고 하였다. 이는 죽은 의제가 억울함을 알리려고 나의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나는 의제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글을 지어 위로하노라.”

이극돈은 골똘히 생각했어요.

‘정축년이라면 바로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1457년이 아닌가? 김종직은 초의 회왕을 단종에, 항우를 세조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인물이 세조임을 알리고 있구나. 김종직이 누군가? 성종이 훈구파(세조가 왕이 될 때 공을 세워 관직에 오른 사람들)를 견제하기 위해 기용한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이 기회에 잘만하면 김일손 무리를 혼내줄 수 있겠어!’

이극돈은 기뻐하여 이 사실을 유자광과 의논했어요. 유자광은 김종직에 감정이 좋지 않던 사람이었지요. 그는 ‘조의제문’을 읽고는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불렀어요. 이어 훈구파를 모은 뒤 연산군에게 김종직과 김일손이 연산군의 할아버지인 세조 임금을 모욕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고했어요.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빙자해 세조 임금을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것은 대역죄입니다. 이것을 사초에 실은 김일손도 처벌해야 합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연산군은 김일손을 잡아들여 고문했어요. 훈구파는 이참에 김종직의 제자들인 사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고자 사건을 더욱 키웠어요.

이 사건으로 김일손은 대역죄를 물어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사형이 내려졌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부관참시라는 벌이 내려졌지요. 부관참시는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다시 죽이는 무서운 벌이예요. 그리고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던 정여창, 김굉필 등도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했으며, 『성종실록』편찬에 관여했던 김종직의 제자와 친구들도 죄를 받았지요.

이 사건은 무오년(1498년)에 선비가 화를 당했다 하여 ‘무오사화’라고 해요. 무오년의 사화는 사초 때문에 일어났다 하여 선비 사(士) 대신 역사 사(史)를 써서 ‘사화(史禍)’라고도 합니다.

<지계서원(경북 청도군)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을 기리며 제사 지내는 서원이에요.>   
문화재청

갑자사화가 일어나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 세력은 뚜렷이 약해졌어요. 그러자 국왕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던 사림들의 힘이 약해지자, 연산군은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나라 재정이 고갈되자 훈구대신들의 재산을 빼앗아 매꾸려 했답니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자 훈구파 대신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임사홍이란 인물이 연산군에게 은밀히 고하였어요.

“전하의 친어머니께서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신 것은 엄 귀인과 정 귀인, 두 후궁이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윤씨가 왕비에서 쫓겨난 일을 백년 동안 의논하지 말라는 유언을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연산군이 알게 될까 봐 쉬쉬하고 있었지요. 그런 비밀을 임사홍이 폭로한 것이었어요.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의 친어머니 윤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연산군은 성종의 새 왕비인 정현 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거든요. 연산군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와 슬픔에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분노하는 연산군>   

연산군은 그길로 선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엄씨와 정씨가 살고 있는 궁으로 갔어요. 그리고 연산군은 다짜고짜 그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렀어요. 결국 두 여인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고 말았지요. 연산군의 살기 어린 분노는 멈추지 않았어요. 그는 곧장 할머니 인수대비가 있는 대왕대비전으로 향했어요. 연산군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원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어요.

“대비마마,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결국 올 것은 오고야 만다고 하지 않던가! 복수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었어요. 이로부터 6년 뒤인 1504년 3월에는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건에 얽힌 인물들을 모두 잡아들이라 명했어요. 그리고 거침없이 형벌을 내렸어요.

이세좌라는 인물의 경우에는 폐비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먼저 사형을 받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등도 폐비의 일에 찬성했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의 중벌을 받았어요. 또 윤씨의 폐비 문제를 성종과 논의했던 윤필상, 김굉필 등도 죽임을 당했어요.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일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은 훈구파든 사림파든 가리지 않고 죽였어요. 이 사건은 갑자년(1504년)에 일어난 사화라 하여 ‘갑자사화’라고 해요.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수와 규모, 그리고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보다 훨씬 심했어요.

중종반정이 일어나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은 점점 더 폭군이 되어 갔어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어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그날로 목이 달아났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왕의 잘못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경연제도와 사간원, 홍문관 등의 기관을 없앴고, 인재를 양성하던 성균관을 오락 장소로 만들었어요.

연산군은 나랏일을 돌보는 대신 매일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어요. 심지어는 도성과 가까운 곳에 백성들의 집을 허물고 자신의 놀이터와 사냥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입구마다 금표를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했지요.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어요.

<연산군 금표비
비신 앞면 중앙에는 “금표 안쪽으로 침범해 들어온 자는 왕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라고 새겨져 있어요.>   
문화재청

훈구파도 연산군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어요. 연산군이 왕이 된 지 12년째 되던 1506년 9월, 결국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어요. 그리고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랐어요.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고 해요. 반정(反正)은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뜻이에요. 잘못된 정치를 하는 왕을 물러나게 하고 새 국왕을 세움으로써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랍니다.

<『연산군일기』
조선의 다른 왕들처럼 실록 체제로 편찬되었지만,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쫓겨나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해 ‘일기’라고 표기했어요.>   
문화재청

중종은 연산군 때의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중단된 경연을 다시 시행하고 홍문관, 사간원을 복구시켰어요. 수없이 설치된 금표도 철거했죠. 물론 중종은 훈구 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간섭을 피하기는 힘들었어요. 훈구 대신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지요.

그렇게 8년이 지난 무렵, 정치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중종은 향촌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사림들을 등용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조광조를 등용해서 개혁 정치를 펴나갔어요.

조광조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추천받아 시험을 치른 뒤 관리로 뽑는 ‘현량과’를 실시했어요. 현량과로 선발된 관리는 대부분 사림 출신으로 조광조의 개혁 정치에 큰 힘이 되었지요.

조광조는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교의 신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하였어요. 조광조가 보기에 유교 국가에서 도교신에 대한 제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죠. 또한 지방 곳곳에 성리학의 기본 윤리가 담긴 『소학』과 지방 자치적 규약으로서의 ‘향악’을 보급하였어요.

이 밖에도 농민을 가장 괴롭히던 공물(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지방에 부과하던 것)의 폐단을 고쳐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어요. 이러한 그의 개혁 정책은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조광조의 강도 높은 개혁 정책에 훈구파는 거세게 반대했어요. 조광조의 뜻대로 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 왔던 많은 특혜를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훈구파 중에는 부정부패나 잘못된 행실로 조광조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조광조는 중종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많았음을 지적하고 이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공신 책봉에 거짓됨이 많으니 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조광조는 공신 중에는 실제로 공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가짜로 등록된 사람들이 많음을 지적하고, 그들을 공신 목록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했어요.

실제로 일부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대신에게 뇌물을 바치고 공신이 되기도 했죠. 반정 공신이 자기 자식이나 친척을 공신 명단에 올린 경우도 아주 많았어요. 결국 76명의 공신 자격이 취소되고, 관직과 재산도 거둬졌어요. 이것을 ‘위훈 삭제’라고 해요.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반정 공신들과 훈구파는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그들은 공신 삭제가 반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는 곧 임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불만을 토로했어요. 이윽고 그들은 조광조를 몰아내자고 모의했지요. 그리고 훈구파 신료의 딸이었던 희빈 홍씨의 거처를 찾아가 이렇게 부탁했어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벌레가 갉아 먹게 두십시오.”

그로부터 얼마 뒤 ‘주초위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이 대궐 안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어요. 대궐에는 곧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임금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지요. 중종도 곧 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돼요. 조는 곧 조광조를 가리키지요. ‘주초위왕’이란 ‘조씨 성을 가진 자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아무리 조광조를 아끼는 중종일지라도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어요.

<주초위왕(走肖爲王)>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개혁 정치를 펼쳤어요. 조광조의 개혁이 다소 과격한 면이 있으나, 중종은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광조가 부담스러워졌어요. 조광조가 유교적인 정치를 주장하며 왕권을 강도 높게 견제했기 때문이에요. 이때 마침 나뭇잎 사건이 발생한 거예요. 중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어요. 그리고 은밀히 왕명을 내렸어요.

“조광조를 죽이고, 그의 무리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라.”

성균관 유생들의 거센 반발에 중종은 다시 명을 내려 조광조를 전라도 능주로 귀양보냈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지만 굵은 삶을 마쳤어요. 더불어 조광조를 지지했던 사림파의 수많은 선비도들 화를 당했어요. 1519년(중종 14) 기묘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해요.

조광조의 죽음으로 그의 개혁 정치는 모두 중단되었어요. 하지만 불과 4년의 짧은 기간에 그가 한 일들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요. 그의 학문과 사상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 이이 등에게 영향을 주었죠. 또한 수많은 선비가 그를 기리며 본받고자 하였어요.

여러분은 조선 시대 사화를 공부하며 무엇을 알게 되었나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화는 지배층의 정치적 입장 차이에 따른 세력 다툼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연이은 사화를 통해 조선 초기 정치적 변화를 잘 알 수 있었지요. 이후 조선 시대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어 갔을까요? 여러분이 만약 조선 시대의 관리였다면 올바른 정치를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심곡서원과 조광조 초상화
조광조를 기리며 제사 지내는 서원이에요. 인근에 ‘조광조 묘 및 신도비’가 있어요.>   
문화재청, 개인소장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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