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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의학서적의 최고로 평가받는 동의보감

<허준박물관(서울 강서구)>   

선조 : “왕자의 병이 깊은데, 선뜻 나서는 의원이 없으니 이를 어이한단 말인가?”

허준 : “전하! 제가 온 힘을 다해 치료해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선조 임금 때 왕자가 천연두에 걸려서 생사를 넘나들었어요. 당시 허준이라는 의원이 용감하게 나서서 치료를 하였고, 결국 왕자의 목숨을 구하였지요. 그 덕분에 허준은 선조 임금으로부터 높은 벼슬까지 받게 되었어요.

이처럼 허준은 뛰어난 의술로 유명했지만, 다른 업적으로 더욱 유명했어요. 그 업적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지금부터 허준의 일생을 살펴볼까요?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하다

1539년(중종 34)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지금의 서울시 강서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평안도 용천 군수를 지낸 허론으로, 허준은 그의 서자였어요. 서자는 정식 부인이 아닌 첩에게서 낳은 아들을 말해요. 그런데 당시 서자는 신분 차별이 심해 관직에 나가기가 어려웠지요.

어려서부터 의술을 익힌 허준은 학자 유희춘의 추천으로 궁궐의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에 들어갔어요. 조선 시대에는 내의원에서 의술에 종사하던 벼슬아치들을 내의라고 하는데, 이들은 기술관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인 잡과를 통과해야만 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때로는 의술이 뛰어난 의원을 시험 없이 특별히 선발하기도 했는데, 허준이 바로 그런 사례였어요.

내의원에서 일하게 된 허준은 궁궐에서 왕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하던 어의를 도와 선조를 진료하면서 신임을 얻었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의술도 공부했지요. 그러던 중 왕자가 두창(천연두)에 걸려 궁궐이 발칵 뒤집혔지요.

두창은 당시 귀신도 치료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무서운 병이었거든요. ‘마마’라고도 불린 천연두는 한 번 걸리면 살아남기 힘든 전염병이었어요. 만약 살아난다고 해도 얼굴에 흉한 자국이 남았어요.

<천연두로 병상에 누워 있는 왕자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왕과 신하들>   

선조는 두창이 옮을까 말리는 신하들 때문에 멀리서 왕자가 있는 곳만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어요. 선조는 어의들을 꾸짖기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왕자를 치료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의원은 없었어요. 두창에 걸린 왕자는 후에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 제15대 왕이 되는 광해군이었어요. 왕자는 치료해 주는 어의 하나 없이 홀로 병을 앓았어요.

이때 왕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의원이 있었는데, 바로 허준이었어요. 허준은 정성을 다해 왕자를 치료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왕자가 일어났어요. 허준의 치료로 두창이 말끔히 나았던 거지요. 선조는 목숨을 걸고 왕자를 낫게 한 허준에게 정3품의 높은 벼슬을 내리며 허준의 공을 높이 칭찬했어요.

1592년(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일어났어요. 당시 허준은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따라가며 극진히 건강을 살폈어요. 허준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선조를 모셨지요. 그런데 선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허준에게 그 책임을 물었어요. 광해군은 신하들의 강력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허준을 귀양 보냈어요.

하지만 허준은 귀양지에서도 의학책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이후 귀양지에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에게 『동의보감』을 바쳤어요. 광해군은 많은 백성이 이러저러한 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어요. 게다가 임진왜란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거든요. 그래서 백성들이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동의보감』을 세상에 펴냈어요.

허준은 1615년(광해군 7)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 광해군은 그에게 정1품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려 업적을 기렸어요.

  

임진왜란 중에 집필이 시작된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원래 임진왜란(1592∼1598) 중인 1596년에 선조의 명으로 집필이 시작되었어요. 내의원에 편찬국을 두고 허준을 비롯해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양반 의원이었던 정작 등이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했어요. 당시 이들은 세 가지 편찬 원칙을 만들었어요.

첫째, 병은 잘못된 생활 습관 때문에 생긴다. 그 습관을 먼저 고친 뒤에 약물치료를 한다.
둘째, 처방이 많고 어려우니, 요점을 잘 간추린다.
셋째,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는 한글로 적어 백성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편찬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편찬 사업은 중단되었어요. 이에 선조는 허준에게 시급한 다른 의학책부터 편찬할 것을 명했어요.

선조의 명령을 받은 허준은 의학책 3권을 지어서 바쳤어요. 한편 허준은 바쁜 업무로 인해 1608년(선조 41)이 되도록 『동의보감』을 절반도 저술하지 못했어요.

같은 해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고 하여 허준은 의주로 유배되었어요. 유배 당시 의학책 저술에 힘을 쏟은 허준은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써냈지요.

1609년(광해군 2) 말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허준은 이듬해인 1610년(광해군 3) 8월 완성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어요. 광해군은 허준이 아버지 선조의 명령을 잘 받들었다고 칭찬하며 그에게 좋은 말 1필을 상으로 내렸어요. 그러나 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정이 좋지 않아 동의보감은 3년 뒤에야 간행될 수 있었어요.

동의보감의 내용

허준이 14년 동안 노력하여 완성한 『동의보감』은 어떤 책일까요? ‘동의(東醫)’란 중국의 동쪽에 있는 조선의 의학을 뜻해요. 이전에는 조선에서도 중국 의학의 전통을 많이 따랐는데, 『동의보감』이 완성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의학 체계를 마련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보감(寶鑑)’이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귀감(龜鑑)과 같은 뜻이에요. 조선 의학의 표준을 세웠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지요.

『동의보감』은 세종 때의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선조 때의 『의림촬요』 등 83종의 우리나라 의학책과 70여 종의 중국 의학책을 인용해 질병에 대한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어요.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이루어진 『동의보감』은 다섯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것은 내과의 질병을 다룬 「내경편」 6권, 외과의 질병을 다룬 「외형편」 4권, 내·외과 혼합 질병 및 부인병과 소아병이 첨부되어 있는 「잡병편」 11권, 약물에 관한 지식을 다룬 「탕액편」 3권, 침으로 병을 고치는 방법을 설명한「침구편」 1권 등이에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의보감

17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한 의학책이 되었어요. 중국과 일본까지 전해져 동아시아 의학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지요. 또한 『동의보감』은 백성의 건강을 위해 편찬한 의학 서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아왔어요.

그리하여 2009년에 개최된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는 『동의보감』이 담은 시대정신과 독창성, 세계사적 중요성 등을 인정해 1613년(광해군 5) 허준이 직접 간행에 참여한 초판 완질 2본(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어요.

2005년 3월에는 그가 태어나고 『동의보감』을 저술한 곳인 서울 강서구에 공립 허준박물관이 문을 열었어요. 허준박물관은 서울 강서구 허준로에 있는데, 허준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어요. 그리고 강서구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양·한방 체험행사를 결합한 건강문화 축제인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답니다.

<허준박물관 어린이 체험실>   
허준박물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조선 시대에는 전염병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조선 건국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염병과 관련한 기록이 무려 1천 건이 넘어요. 이에 따르면 조선 건국 초인 1396년(태조 5) 3월에 처음으로 전염병이 발생하였는데, 한양도성을 쌓기 위해 소집한 인부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였다고 해요.

이후 1432년(세종 14)에도 대규모의 전염병이 유행하였어요. 당시 세종은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오늘날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최고의 예방법인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미 500년 전에 실천했다고 할 수 있지요.

조선 시대에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위생 상태나 영양 상태가 몹시 나쁘고 대부분 대가족이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한 번 전염병이 돌면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1750년(영조 26)에는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의 수가 20만 명이 훨씬 넘었다고 하니, 그 당시 인구를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죠.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지은 『목민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서술되어 있어요.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 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 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와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방법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지요? 200여 년 전 일인데 정약용이 전염병의 특징과 예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에요.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처럼 과학이 뛰어나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에 대처할 수 있는 현명한 지혜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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