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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전쟁

<순천왜성(전남 순천시)>   
문화재청

“어제 상륙한 왜군이 부산진성을 포위했습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웁시다.”

1592년(선조 25) 부산진성을 지키던 정발 장군과 군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끝까지 싸웠어요. 하지만 부산진성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지요. 이후 조선은 일본군과 7년간 전쟁을 치렀어요. 이 전쟁은 무엇일까요? 또 전쟁 과정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일본군, 조선을 침략하다

부산진성 전투 이후 조선이 일본군과 7년간 싸운 전쟁이 임진왜란이에요.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을 치러 갈 것이니 길을 내달라’라는 이유로 조선을 침략해 시작된 전쟁이에요.

일본은 왜 이런 이유를 내세웠을까요? 15세기 중반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고 여러 세력이 나누어 싸우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었어요. 전국시대의 혼란은 100년 정도 이어졌는데, 16세기 후반에 일본을 통일한 사람이 등장해요.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예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의 관심을 국외로 돌리기 위해 명을 치자고 했던 것이죠. 그러면서 명으로 가는 길을 내달라며 조선을 침략한 거예요.

1592년 4월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성 전투와 동래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거침없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왔어요. 조선 조정은 신립 장군을 보내 이들을 막아보고자 했지만, 당시 최정예부대를 이끌던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하고 말았어요.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20여 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한양)까지 함락시켰어요.

한성에 있던 임금 선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길에 떠났어요. 선조는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갔어요. 그리고는 명에 사신을 보내 도와줄 군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어요.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큰 위기를 맞았어요. 그런데 조선은 전쟁에서 왜 이렇게 밀리기만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조선은 1392년 건국 이후 별다른 전쟁 없이 평화로웠어요. 가끔 국경에서 여진족과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어도 크게 충돌하지는 않았어요. 조선 시대에는 고려 말기처럼 왜구 침략이 빈번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부산 등지에서는 일본과 무역하는 왜관이라는 공간이 있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일본과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이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해서 침략한 거예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총은 정말 무시무시한 무기였죠. 조선도 화약 무기가 있었지만, 전쟁 초기 군사력이 잘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어요. 특히 전쟁이 발생한 1592년에는 속수무책으로 패배를 거듭했어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이동 경로와 격전지>   

수군과 의병이 활약하다

한성까지 진격한 일본군은 곧바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이 무렵 일본군의 공격은 약간 주춤했지요. 바로 이순신 장군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의 활약 때문이에요. 원래 일본의 수군은 북진하는 육군에게 보급할 식량과 무기를 바닷길로 공급할 계획이었죠. 그러나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 밀려서 바닷길로 진격하지 못했던 거지요.

이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에 대해 알아볼까요.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생 1년 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어요. 그는 전쟁을 대비하여 꾸준히 군사 훈련을 진행했다고 해요. 왜란이 일어난 후 이순신의 수군은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어요.

그 후 사천, 당포, 한산도 등지에서도 계속 일본군을 무찔렀어요. 특히 한산도에서의 승리는 학이 날개를 펴듯이 배를 배치하는 학익진 전술을 이용해 이긴 것으로 유명해요.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격전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먼저 판옥선으로 불리는 조선 배의 장점을 들 수 있어요.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해서 일본 배처럼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얕은 바다에서 유리했어요. 무엇보다 배의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어서 학익진 같은 전술을 펴기가 쉬웠지요. 게다가 무거운 화포를 싣고 다니며 전투를 해도 안정감이 있었어요.

천자총통처럼 우수한 화약 무기도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어요. 천자총통은 사정거리가 길었어요. 조선 수군은 비교적 먼 거리에 떨어져서도 화포를 쏘아 전투할 수 있었어요. 물론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 지휘 능력도 중요했지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활약 덕분에 조선은 곡창지대인 전라도 일대를 지킬 수 있었어요. 반면 일본은 바닷길을 통해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려던 계획을 이룰 수 없었어요.

  

한편 수군 못지않게 의병의 역할도 중요했어요. 의병은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마련해 싸움에 나선 사람들이에요. 전국 각지의 유생, 전직 관리, 승려 등이 백성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어요.

정말 많은 의병이 있었는데, 특히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곽재우가 유명해요. 의병은 좋은 무기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자기 고장의 지형을 잘 이용하여 전술을 짰어요. 그래서 적은 수의 의병으로도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지요.

조선 관군, 되살아나다

명의 지원군이 조선에 도착하면서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싸움을 넘어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어요. 조선의 관군과 명군은 힘을 합쳐 평양성을 되찾았어요. 또 김시민이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어요.

<행주대첩>   

평양성을 빼앗긴 일본군은 한성으로 후퇴했어요. 명의 군대는 한성에 있는 일본군을 다시 치려고 했으나, 길목에 숨어있던 일본군에게 크게 패했어요. 이후 명나라의 군대는 전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요. 한편, 한성에 모인 일본군도 많은 군대를 잃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명과 일본군은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두 나라의 협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일본이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조선 8도 중 4개 도를 내놓으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에요.

협상이 실패로 끝난 후 일본은 1597년(선조 30) 조선을 다시 침략했어요. 이 사건을 정유재란이라고 불러요. 정유재란 때 일본은 임진왜란 때처럼 북쪽으로 진격하지는 못했어요. 조선이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대비했기 때문이지요. 일본군은 충청도에서 조선 관군과 전투를 벌인 후 남쪽 해안가로 물러났어요. 그리고 그곳에 왜성을 쌓고 전쟁을 이어나갔어요.

그 무렵에는 더 많은 명 군사들이 곧바로 조선에 들어왔어요. 조선 관군은 명 군대와 함께 일본군을 남해안 지역까지 서서히 밀어붙였고 울산 왜성을 비롯한 곳곳에서 공격을 이어나갔어요. 하지만 일본군은 끝까지 버텼어요.

그런데 1598년(선조 31)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어요.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거였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남은 부하들은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어 군대 철수를 명했어요. 철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하나둘씩 자기 나라로 돌아갔어요. 조선 수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에 끝까지 맞서 싸웠어요. 바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었지요.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했어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 일본에 나타난 변화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먼저 전쟁터였던 조선은 가장 큰 피해를 보았어요. 많은 사람이 죽고,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전쟁 과정에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토지가 황폐해지고, 농민들은 먹고 살 식량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었어요. 농민에게서 세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나라 살림도 매우 어려웠지요.

경복궁, 불국사,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등이 불타고, 도자기와 그림 등 많은 문화재를 일본에 빼앗겼어요. 또 노비 문서가 불타 없어지고, 공을 세운 노비나 일반 백성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신분 제도가 흔들리게 되었어요.

명의 상황도 좋지 못했어요. 조선에 군대를 보내느라 재정이 어려워졌어요. 무엇보다 명 조정의 관심이 조선에 쏠린 틈을 틈타 한반도 북쪽 만주 지역에서 여진족(만주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족은 명을 격파하고 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명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4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어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고 에도 막부를 열었어요. 일본은 임진왜란 중에 조선 사람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고 갔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어요.

특히 포로 중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많았어요. 일본의 지배층은 조선 도자기를 매우 좋아했고, 그 도자기 제작 기술을 수입하려고 했지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도공은 이후 일본의 도자기 제작 기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어요. 그들 덕분에 일본에서 화려한 도자기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지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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