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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이 담긴 관혼상제

<종묘 정전(서울 종로구)>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망자께서 편안히 저 세상으로 가시길 바랄 뿐입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셨나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살다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그렇다고 슬프고 괴롭다고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 예를 갖춰서 명복을 빌어 주었지요.

조선 시대에는 일생의 중요한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의례를 치렀어요. 어떤 의례들이 있었을까요?

관혼상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일생 의례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중요한 시기를 소중히 여기고 기념하고자 하였어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행사를 치르며 의미를 새겼지요. 이것을 의례라고 해요.

출생 후 성장하여 혼례를 치르고 일정 기간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산 사람들이 상례를 치러요. 상례가 끝나면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며 제사를 지내지요. 이러한 혼례와 상례, 제례는 모두 한 사람의 일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례라 할 수 있어요.

조선 시대에는 사람들은 일생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의례를 치르며 의미를 되새겼어요. 그들은 이러한 의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요. 예를 들면 백일, 돌, 성년식(관례), 혼인 예식(혼례), 장례(상례), 제사(제례) 등이 있었어요. 이 가운데 대표적으로 관례, 혼례, 상례, 제례를 ‘관혼상제’라고 따로 일컬었어요.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지요.

조선 시대 관혼상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 구체적인 모습을 함께 살펴볼까요?

  

관례, 어른이 되다

오늘날에는 만 열아홉 살에야 비로소 성인이 되지요.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이 성년의 날인데, 요즘은 성년의 날을 되새기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옛날에는 어른이 되는 의식이 매우 중요한 행사였어요. 성인식을 치렀느냐 치르지 못했느냐에 따라 어른과 아이로 나누었지요. 남자의 성인식은 ‘관례’, 여자의 성인식은 ‘계례’라고 불렀어요. 관례와 계례는 보통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1월에 치렀어요.

관례를 치르는 소년은 먼저 어른이 평상시에 입는 옷으로 갈아입어요.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이 남자아이의 댕기머리를 풀어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워 주며, 축하의 말을 하지요. 이것이 끝나면 어른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갓을 머리에 쓰는 예식을 해요.

이때에도 좋은 말을 해줘요. 이어 예복을 입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 쓰던 관인 복두를 머리에 써요. 이처럼 옷을 세 번 갈아입고 나면 술 마시는 예절을 배워요. 그리고 나면 동네 어른이 자를 지어 주었어요. ‘자’는 어른이 되어 사용하는 이름을 말해요.

“자네의 자는 ‘해천’이라 지었네. 너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보며 슬기롭게 살라는 뜻이니, 이름에 걸맞은 어른이 되게.”

“네, 그 말씀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옛날에는 같은 어른끼리도 상대방의 정식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큰 실례로 여겼어요. 그래서 좋은 뜻을 담은 또 다른 이름을 지었지요. 웃어른이라도 관례를 치른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지 않았어요. 반드시 존댓말을 쓰거나 ‘~하시게’ 등의 말투로 존중해 주었지요. 관례를 모두 마치면, 집안 어른들이 사당에 아뢨고요. 그리고 마을 어른들을 모셔다 잔치도 벌였어요.

여자의 계례는 소녀의 길게 땋은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 주었어요. 그런 다음에 족두리나 화관을 쓰고 어른의 옷으로 갈아입었지요. 그 밖의 다른 절차는 관례와 비슷하게 진행되었어요.

남자의 경우 보통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성인식을 치렀어요. 계례는 보통 15살 무렵, 혼례와 연결해 치렀지요. 그 덕분에 관례를 치르고 장가를 든 열 살 먹은 꼬마가 스무 살 넘은 댕기머리 총각을 어린애 취급하는 일도 있었다고 해요.

여러분이 앞으로 커서 성년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깨닫고 사회인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혼례, 신랑 신부의 혼인 의례

혼례는 신랑과 신부의 혼인 의례를 말해요. 예로부터 혼인은 사람이 일생에서 겪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뜻에서 ‘인륜지대사’라고 했어요. 처녀와 총각이 새 가정을 이루는 일이니 중요하지요.

조선 시대에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 몇 가지 혼례 절차를 밟아야 했어요. 혼인은 두 집안의 큰 행사이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잔치인 만큼 신중하게 치르기 위해서였어요.

혼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 남자 쪽에서 여자 쪽으로 사주를 보냈어요. ‘사주’란 사람이 태어난 해, 월, 일, 시간을 말해요. 사주를 비교해서 두 사람이 서로 어울린다는 점괘가 나오면 신부집에서는 혼인 날짜를 정해 신랑집에 알렸어요. 이것을 ‘택일’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혼인 날짜가 정해지면 신랑 집에서는 신부집으로 함을 보내요.

혼례 날 신랑은 사모관대 차림으로 말을 타고 신부집으로 가요. 본래 ‘사모관대’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궁궐에 들어갈 때 쓰던 모자와 관복이에요. 하지만 혼인의 예를 갖추기 위해 신랑이 입기도 했지요.

<김홍도의 신행도
언뜻 보면 과거에 급제한 젊은이가 고향에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신랑이 신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   
문화재청

기럭아비는 기러기 한 쌍을 들고 신랑이 탄 말보다 앞서 갔어요. 이 기러기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부에게 줄 선물이에요. 기러기는 한번 짝을 지으면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는 금슬 좋은 새이지요. 그래서 신랑은 기러기 한 쌍을 주며 사이좋은 부부로 한평생 살아가자는 마음을 신부에게 전했던 거예요.

<신랑신부의 모습>   

신랑은 신부집에 들어가 가져온 기러기 한 쌍을 내려놓고 신부의 아버지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어요. 그리고 신랑 신부는 넓은 마당에 초례상(혼례를 치를 때 차려 놓는 상)을 두고 서로 마주 서서 예식을 치러요.

“신랑 납시오!” 라고 초례(혼례 의식)를 진행하는 사람이 우렁차게 외치면, 신랑이 성큼성큼 초례상 앞으로 나왔어요. 또 “신부 납시오!”라고 외치면, 신부가 바닥에 깔린 흰 베를 사뿐사뿐 밟으며 방에서 걸어 나왔어요. 이때 신부는 연지와 곤지를 찍은 얼굴에 족두리 쓰고 원삼 저고리를 입었지요.

마주 보고 선 신랑과 신부는 초례 절차에 따라 서로 큰절을 올려요. 그리고 조롱박으로 만든 잔에 술을 부어서 함께 나누어 마시죠. 해가 지면 신랑 신부는 신방에서 첫날 밤을 맞이하지요.

어때요? 오늘날 결혼식 모습과 많이 다르지요.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점은 변함없어요.

상례, 돌아가신 분을 떠나 보내는 이야기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명복을 빌며 떠나보내는 의례를 ‘상례’라고 해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상례를 매우 중요한 의례로 여겼어요. 죽음은 본래 왔던 곳으로 영혼이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죽은 것을 일러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지요.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머리를 푼 채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애달프게 곡을 했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옷을 흔들며 외쳤지요.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초상집을 알리는 등을 대문에 달고, 죽은 사람을 편안히 모셔가 달라는 뜻에서 정성껏 상을 차려 대문 밖에 내놓았어요.

다음 날 아침에는 집안 어른들이 모여서 돌아가신 분을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갈아입혀 드렸어요.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을 ‘수의’라고 해요. 초상집에는 돌아가신 분의 소식을 들은 손님들이 찾아오지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시끌벅적하답니다.

초상집이 쓸쓸하지 않도록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밤샘을 하며 함께 지키는 것이지요. 이것은 슬픔에 잠긴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어려움을 이겨 나가도록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한 일이었어요.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이면 장례를 치러요. 이를 ‘3일장’이라고 해요. ‘장례’는 시체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는 예식을 말해요.

<상여>   
문화재청

사람들은 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해요. ‘상여’는 관을 실어 나르는 가마를 말하고, ‘장지’는 관이 묻힐 곳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장례 절차에 따라 관을 묻고 무덤을 만들었어요.

한편 옛날 왕족이나 양반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개월 또는 5개월 뒤 장례를 치렀어요. 그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맏아들은 묘지 옆에 움집을 짓고 3년을 살았어요. 벼슬까지 내놓고 상투를 푼 채, 부인과 자식들,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멀리 하면서 말이에요. 그렇게 하고 3년이 지나서야 상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상례는 자식 된 자로서 가장 정성을 다할 일이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는 다시 모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을 당했을 때나 제사 때에는 그 예를 다해야 한다.

상례는 효를 바탕으로 삼고 있어요. 돌아가신 후에도 부모님과 조상님들에게 변함없이 효를 행하기 위한 것이지요. 조상들은 죽음을 슬픈 것으로만 여기지 않았어요.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자 숭고한 것으로 보았지요. 그래서 슬프지만, 한편으로 명복을 비는 것이 죽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산 사람의 예의였어요.

제례, 조상님을 잘 모셔야 효자

옛사람들은 조상을 잘 모셔야 그 집안이 잘된다고 여겼어요. 조상의 혼령이 자손들을 지켜 준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부모 모시듯 해야 한다고 자손들에게 늘 말했지요.

이처럼 돌아가신 분을 위해 제사를 지내며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제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사는 옛날부터 집안의 중요한 일로 자리 잡았어요. 만약 제례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기 일쑤였지요.

“자신의 근본도 모르는 불효막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특히 조선 시대 양반들은 집에 조상들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어요. 사당은 돌아가신 분들을 상징하는 신주를 모시는 건물이지요. 사당에 가서 조상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며 마치 살아 계시는 웃어른을 모시는 듯하였지요.

“건넛마을 이 진사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별 탈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외출할 때나 집에 돌아왔을 때도 먼저 사당으로 가서 소식을 알렸어요. 또한 자식이 과거에 급제했거나, 관례와 혼례를 치르는 등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도 사당제를 치렀어요.

제례에는 기제와 차례, 시제 등이 있어요. ‘기제’는 해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맞아 치르는 제사예요.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까지 4대 조상에게만 지냈어요. 이것만 해도 일 년에 여덟 번의 기제를 지내 보통 가정으로서는 부담이 매우 컸어요. 그래서 오늘날에는 1∼2대 조상까지만 기제를 올린답니다.

‘차례’는 명절날 4대 조상들에게 한꺼번에 올리는 제사예요. 본래 차례는 조상에게 차를 올리는 예를 뜻하였어요. 그러다 점차 차 대신 술을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예전에는 모든 명절 때마다 차례를 지냈지만, 지금은 설과 추석에만 지내요. 제사상은 명절의 대표적인 음식과 술로 간단히 차리지요.

‘시제’는 5대 이상의 조상을 해마다 음력 3월이나 10월 중에 날을 택하여 지내는 제사예요. 제사는 지금의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준 조상들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지내는 거예요. 앞으로 여러분이 제사를 지내게 된다면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함 사세요~ 함 사세요~

옛날에는 혼례에 앞서 신랑 집에서 신부집으로 함을 보냈어요. 함 속에는 신부에게 줄 푸른색과 붉은색의 치맛감을 청실과 홍실로 예쁘게 묶어서 넣었어요. 청색의 청실은 신랑을, 홍색의 홍실은 신부를 가리켰어요. 청실과 홍실처럼 신랑 신부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뜻으로 넣었지요.

함을 짊어지고 신부집으로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라 했어요. 요즘 함진아비는 오징어 가면을 쓰지만, 예전의 함진아비는 숯으로 얼굴을 검게 칠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꾸몄어요. 함진아비가 신부집 앞에 도착해서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해요.

“함 사려! 함 사려!”

그러면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신부집에서는 푸짐한 술상을 차려 내놓아요.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자, 함이 무거울 테니 어서 내려 놓아요.”

“먼 길 오느라 함 내려놓을 힘도 없소.”

“노잣돈이 떨어져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오!”

함진아비와 그 일행들은 엄살을 떨며 함을 진 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요. 그러면 신부집과 함진아비 사이에 재미있는 승강이가 벌어져요. 이런 모습은 동네 사람들에게 신나는 구경거리지요.

동네 사람까지 끼어들어 함을 내려놔라 마라 하면서 흥미진진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요. 이때쯤 함진아비가 못이기는 척하며 함을 내려놓지요. 함진아비는 일부러 늑장을 부려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든 다음에야 신부 집에 들어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함보내기 풍습이에요.

혼인하는 날은 사람의 일생 가운데 가장 크고 즐거운 잔칫날이에요. 기쁨이 클수록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더 즐겁지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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