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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에 새로움을 전한 서양 문물

<곤여전도(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오! 이것이 망원경입니까? 직접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해 속에 세 개의 검은 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보이지 않나요?”

“해는 둥근 공 모양인데 이쪽 면에 검은 점이 없으면 반대쪽 면에 있을 것입니다.”

청의 수도 베이징에는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천주당(성당)이 여럿 있었어요. 천주당을 방문한 실학자 홍대용은 서양의 낯선 과학 기구를 보며 크게 흥분했어요. 홍대용이 흥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서양의 여러 문물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베이징 조양문을 지나는 조선 사신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조선, 서양을 만나다

조선은 지금의 중국 땅에 있던 명이나 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어요. 청의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보낸 사신단을 연행사라 불렀어요. 연행사에는 관리들만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통역관이나 의원(의사), 화가, 군인들도 있었고, 말이나 수레를 담당한 마부나 식사를 담당한 하인들도 있었어요. 또한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상인이나, 중국의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들도 있었지요.

당시 조선은 중국, 일본 외에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행은 세계 여러 곳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통로였어요. 특히 연행에 참여한 학자들이 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물, 그리고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지요.

  

중국에 간 사신과 선교사들이 만나기 시작할 무렵 조선에도 서양인이 나타났어요. 17세기는 주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먼 항해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 무역을 하였어요. 이들은 주로 은, 도자기, 비단 등을 얻고자 했어요. 일본을 오가던 배 중 일부가 풍랑을 만나 조선 땅으로 표류해 오는 경우가 생겼어요. 벨테브레와 하멜이 대표적인 경우였어요.

지금의 경주 부근에 표류해 온 벨테브레는 이름도 ‘박연’으로 바꾸고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조선에 정착을 했어요. 반대로 조선 조정도 벨테브레에게서 서양식 화포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지요.

한편,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 표류해 왔어요. 제주 목사(지금의 군수)는 이들을 처음 본 그 때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눈이 파랗고, 코가 높고, 머리가 노랗고, 수염이 짧습니다. … 알록달록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것이 우리와는 풍습이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하멜은 조선에 붙잡혀 있다 13년 만에 일본으로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하멜표류기』를 써서 조선의 모습을 서양에 알렸지요.

<화포와 조총을 개량하는 벨데브레>   

<17세기 네덜란드 항해로>   

연행을 통해 조용하게 전래된 서양 문물은 조선의 여러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특히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서양 학문인 서학을 연구하고 조선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생겨났어요.

학자들의 관심을 가장 먼저 끈 것은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학이었어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회전하고 있다는 지동설도 이때 전해졌어요. 그리고 조선의 학자들은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1년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서양식 방법을 이용해 조선의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어요.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라는 세계지도와 지도 제작법이 전래되면서 조선인들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던 생각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사람의 힘을 적게 쓰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과학 기구에 대한 관심도 많았어요. 과학 원리를 이용해 돌과 같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사용하는 거중기를 만들었어요. 수원 화성도 거중기를 이용하여 더 빠르게 완성할 수 있었지요.

실학자들은 농업, 상업, 공업 등 조선의 여러 산업들을 서양 문물을 이용해 더욱 발전시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풍족해지고, 나라는 더욱 부강해지길 꿈꿨어요.

하지만 연행을 통해 시작된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은, 조선이 18세기 후반 백성들이 천주교 믿는 것을 금지하면서 점차 줄어들었어요. 처음에 하나의 새로운 학문으로 연구되던 서양 문물이 천주교란 종교의 모습으로 백성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문제가 생겨났기 때문이에요.

유교를 근본으로 나라를 세운 조선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 중 일부는 조상을 모신 사당을 없애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어요. 또한 실학자 중 일부가 천주교를 믿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선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서양 문물 도입을 금기시 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서양 문물을 연구하여 조선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도 점차 줄어들었어요.

<거중기>   
수원화성박물관

  
실학박물관,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성당

서양 문물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 : 안경과 망원경

‘눈 거울’이란 뜻의 안경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요?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안경은 중국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성일(1538~1593)이 가져온 안경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때의 안경은 거북의 등껍질로 테를 만들고, 실고리를 달아 귀에 걸어 썼어요.

<김성일의 대모안경, 정약용과 안경>   
실학박물관, 강진군청·한국기록유산

안경은 책을 많이 읽던 양반가 선비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와 정조도 안경을 썼죠. 17세기 무렵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쓰던 안경은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백성들 사이에 빠르게 보급되었어요.

이렇게 인기가 많아 조선 스스로 제작까지 했던 안경과 달리, 천문학이나 군사적 목적으로 유용했던 천리경에 대한 대접은 달랐어요.

규일영(망원경)이란 것이 비록 일식을 살펴보는 데는 효과가 있으나 곧바로 해를 바라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 이름 붙이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것과 같으니 이미 명령을 내려 깨버렸다.

규일영은 태양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렌즈에 검은 색을 칠해 만든 망원경이에요. 영조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임금의 뜻을 엿보는 것과 같다며 망원경을 부수어 버린 일을 신하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당시 임금과 양반가들은 천리경이 멀리 떨어진 별이나 땅, 국경을 침범한 외적을 살펴 정보를 미리 얻을 수 있다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임금을 엿본다는, 즉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이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둔 것이지요. 이처럼 도덕적이지 못한 물건으로 여겨지면서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어요.

세상의 중심은 다양하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 소장, 모사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예요. 지도의 가운데는 중국이 위치하고, 동쪽으로 조선, 남쪽 바다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어요. 서쪽에는 조그맣게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유럽이 그려져 있어요.

이 지도를 통해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데요. 당시 조선인들은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그 다음은 조선이라고 생각했지요.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가 이뤄져 있다는 생각은 17세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다양한 서양식 세계지도와 지구의(지구본)로 인해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곤여전도>   
국립중앙박물관

‘곤여’는 큰 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조선에 들어온 곤여만국전도 역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세계지도를 통해 중국 이외에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서양인들도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어요.

가백니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그에 가까운 순서대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으로 놓았다.

실학자 최한기는 자신이 쓴 천문학서에서 ‘가백니’를 소개하고 있어요. 가백니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말해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던 당시 조선 사람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포함해 여러 행성이 돌고 있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세계지도와 지구의, 그리고 지동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사람들은 더 이상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세계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나아가 중심이 여럿이라면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날도 꿈꾸지 않았을까요?

세상을 그리는 새로운 방법, 원근법

“동쪽에 벽돌로 담을 정결히 쌓고 가운데 문 하나를 내었는데, 반만 열려 있어 문 밖의 집들이 은은히 비치었다. 하인을 불러 그곳을 물으니 하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짜 문이 아니라 담에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두어 걸음을 나아가보니, 과연 담에 그린 그림이고 진짜 문이 아니었다.”

중국 베이징 천주당(성당)에서 서양화를 처음 본 홍대용은 매우 놀랐어요. 홍대용은 원근법을 이용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진짜 모습으로 착각하기도 했어요.

<원근법을 이용해 그린 개성의 모습
(강세황, 『송도기행첩』중 「송도전도」)>   
국립중앙박물관

전통적인 조선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 화폭에 그리기보다는 생각하는 것을 그렸어요. 반면에 서양 그림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사물들의 위치나 모양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고, 명암과 색을 이용 사실적으로 묘사했어요.

원근법과 명암을 이용한 서양화의 특징은 조선 그림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특히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초상화, 우리나라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실경산수화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 서양의 무기와 전쟁

1592년 조총이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 왔어요. 중국의 화약 무기가 유럽으로 전해졌고, 유럽에서 다시 사람이 휴대하고 쏘기에 편하게 만든 화약 무기가 조총이었어요. 일본은 중국을 오가던 포르투갈 선원들을 통해 조총의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웠어요. 일본은 조총을 스스로 만들고 군대를 준비해 전쟁을 일으켰어요.

<강화도 건평돈대에서 발굴된 불랑기포와 복원한 불랑기포>   
인천시립박물관, 백제군사박물관, 문화재청

임진왜란 전에 조선에도 불랑기라는 서양식 무기가 명을 통해 들어왔어요. 유럽의 프랑크(Frank)족을 중국에서 ‘불랑기’라 불렀어요. 불랑기포란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 만든 포를 일컫는 말이에요.

불랑기포는 조선이 사용하던 화포와 달리 포의 뒤에 자포를 끼워 넣어 포탄을 발사했어요. 자포에는 미리 포탄과 화약을 장전해 두었죠. 여러 개의 장전된 자포를 바꿔가며 사용한 불랑기포는 기존의 화포보다 빠르게 포를 쏠 수 있었어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평양성을 일본군으로부터 되찾을 때 이 포는 큰 활약을 했어요.

불랑기포와 함께 ‘홍이포’도 명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어요. 홍이포는 ‘붉은 오랑캐의 대포’란 뜻으로 ‘홍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네덜란드 사람을 말해요. 홍이포는 기존의 화포보다 길이가 더 커서 포탄을 더 멀리 날려 보낼 수 있었어요. 조선은 홍이포를 받아들여 만들었고,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박연)가 조선에 표류해 오자 홍이포를 만드는 일에 참여시키기도 했어요.

서양에서 시작되어 명을 통해 도입된 불랑기포와 홍이포는 조선을 지키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어요. 개항기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일본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을 때도 조선군은 이 무기들을 사용해 강화도를 방어했어요. 하지만 그 사이 더욱 강력한 무기를 개발한 외국 군대는 강화도에 큰 피해를 입혔어요.

<강화도 광성보의 홍이포, 소포, 불랑기포>   
문화재청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부터 전해져온 익숙한 도구나 문화는 나름대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온 것이라 이를 바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낯설고 불편한 일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새롭고 낯선 문물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이를 잘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면 우리의 모습을 더욱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겠죠? 21세기 대한민국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물은 무엇이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아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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