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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의 의거지

<김상옥 동상(서울 종로구)>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서 우리 계획을 깨뜨렸기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

1920년 9월 14일 부산 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져 일본인 경찰서장이 죽고 2명의 경찰관이 상처를 입었어요.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건을 일으킨 까닭은 무엇일까요?

3·1 운동 후 결성된 의열단

부산 경찰서에서 폭탄을 터트린 사람은 박재혁 의사예요. 박재혁은 의열단원이었고, 부산 경찰서 의거는 의열단의 첫 번째 활동이었어요.

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에요. 김원봉은 독립군을 키워내는 신흥 무관 학교에서 폭탄 제조 기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12명의 동지를 모아 의열단을 만들었어요. 단원 중 절반은 김원봉과 같은 고향인 밀양 출신이었지요.

<의열단을 창단하는 김원봉>   

의열단은 단원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약 10조를 정했어요. 그중 첫 번째는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였어요. 또 일본 고위 관리, 친일파 등 처단할 대상과 조선 총독부와 매일신보사 등 5개 파괴 대상을 정했어요. 의열단의 활동 목표는 1923년 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 선언〉에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요.

의열단은 1920년 3월 일본인 고위 관리를 암살하고 조선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중국에서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몰래 들여오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 일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많은 의열단원이 체포되었어요.

의열단은 이에 대한 복수로 부산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했어요. 이 일을 한 사람이 바로 부산 출신의 박재혁 의사예요. 1920년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던 박재혁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에 갔어요.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동지들의 복수를 하시오.”

김원봉은 박재혁에게 폭탄과 군자금을 주었어요. 박재혁은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어요. 부산 경찰서장이 평소 고서적(옛날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다음날 고서적상으로 변장하고 부산 경찰서로 갔어요. 일본인 경찰서장이 그가 가져온 책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의열단원의 복수를 하러 왔다며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이 터진 후 2명의 경찰관이 그 자리에서 죽고 경찰서장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어요. 박재혁도 폭탄 파편 때문에 오른쪽 무릎을 다치면서 체포되었지요.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있으면서 일제의 법에 따르지 않겠다며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결국 9일 뒤에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박재혁 의사 동상(부산 진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 경찰서 폭파 사건은 의열단의 첫 쾌거였어요. 의열단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총 11개의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했어요. 이중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박재혁 의사의 의거처럼 성공한 것도 있고 밀양 폭탄 반입 사건처럼 실패한 것도 있었어요. 지금부터 의열단이 펼친 의거 활동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국내에서 펼친 의거 활동

박재혁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3개월쯤 지난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서 또다시 폭파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 사건은 최수봉 의사가 일으킨 거예요. 최수봉은 의거 하루 전날 폭탄 2개를 전해 받은 후, 다음날 밀양경찰서장이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훈시할 때 폭탄 2개를 모두 던졌어요.

그런데 폭탄의 위력이 약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사건 직후 최수봉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돌아가셨어요.

1921년 9월 21일에는 김익상 의사가 조선 총독부 건물 안에 폭탄을 던졌어요. 김익상은 전기공 차림으로 변장하고 조선 총독부 건물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어요. 그는 2층에 있는 사무실 두 곳에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이 터지고 총독부 직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김익상은 총독부 직원인 전기수리공인 것처럼 위장해서 “위험하다.”라고 소리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의열단 본부가 있는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였지요.

이후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을 처단하려다 실패하여 체포되면서 조선 총독부 폭탄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란 것이 밝혀졌지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터졌어요. 이 사건으로 경찰서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 일부가 부서졌고, 그 앞을 지나던 사람 7명이 다쳤어요. 일제는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누가 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며칠을 조사한 후 일제는 이 일을 한 사람이 김상옥 의사라 생각했어요. 김상옥은 일본에서 열리는 제국 의회에 참석하려 경성을 떠나는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려고 숨어 있다가 1월 17일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어요. 그는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남산을 거쳐 금호동의 한 절에 숨었어요.

절에서 승려로 변장하고 무내미(현재 서울 수유리)의 친척 집에 가서 하룻밤을 보냈어요. 그리고 19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효제동으로 몸을 숨겼어요. 1월 22일까지 잘 피신해 있던 김상옥은 효제동 일대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어요. 그는 3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총탄이 떨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지요.

<김상옥 의사 의거터 표시(서울 종로구)와 의거 현장이 실린 동아일보 기사(1923년 1월 14일자)>   
국사편찬위원회

1926년 12월 28일에는 지금의 서울에서 나석주 의사의 의거가 있었어요. 나석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중국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장교이기도 했어요.

1926년 의열단에 가입한 뒤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경성(서울)에 들어와 남대문 근처에 있던 조선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지요. 하지만 두 개의 폭탄은 모두 터지지 않았고, 이 모습을 보고 뛰쳐나온 일본 경찰 7명을 사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나석주 의사 의거터 표지와 동상(서울 중구)>   

중국과 일본에서 펼친 의거 활동

의열단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도 의거가 일어났어요. 먼저 앞에서 이야기했던 중국 상하이 황포탄 의거가 있었어요. 의열단은 1922년 3월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가 배를 타고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를 총으로 저격하기로 했어요. 이 작전에는 의열단 부단장인 이종암, 국내에서 조선 총독부 건물에 폭탄을 던지고 중국으로 탈출했던 김익상, 그리고 오성륜 3명의 의사가 참여했어요.

3월 28일 오후 3시쯤 일본 육군 대장이 탄 배가 황포탄 부두에 도착했어요. 육군 대장이 배에서 내리자 먼저 오성륜 의사가 권총 두 발을 쏘았어요. 안타깝게도 육군 대장이 아니라 그의 앞에 있던 서양인 여성이 총에 맞았어요.

총소리에 깜짝 놀란 육군 대장이 자동차로 도망치자 이번에는 김익상이 권총을 쏘았어요. 김익상이 쏜 총알은 모자에 맞았어요.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은 자동차 바퀴 밑으로 굴러갔지만 터지지 않았어요. 이를 지켜보던 영국 군인이 폭탄을 물속으로 차버려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어요.

황포탄 의거 후 김익상과 오성륜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어요. 두 사람은 일본 총영사관 구치소에 갇혀 온갖 고문을 받았어요. 그러던 중 오성륜은 탈출에 성공했고, 김익상 혼자만 일본으로 보내져 재판을 받았어요.

“마지막으로 피고에게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질문을 하자 김익상이 대답한 것이라고 해요. 김익상은 1943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21년 만에 석방되었어요. 그런데 감옥에서 풀려난 후 조선 총독부 형사에게 끌려갔는데 그 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요.

<김익상 의사>   
독립기념관

일본에서도 의열단의 활동이 있었어요. 그 주인공은 김지섭 의사에요. 김지섭은 권총 1개와 폭탄 3개를 가지고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왔어요. 원래 계획은 1924년 1월에 열리는 일본의 제국 의회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의회 개최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꿔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기로 했어요.

1924년 1월 5일 김지섭 의사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왕궁 앞 다리에 접근하여 3개의 폭탄을 연이어 던졌어요. 그런데 3개의 폭탄은 모두 터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배를 타고 오는 동안 폭탄에 습기가 스며들어 녹슬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김지섭의 의거는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그것도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졌기 때문이지요. 김지섭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어요. 그러던 중 1928년 일본 지바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김지섭 의거지(일본 도쿄)>   
독립기념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의열단, 활동 방향을 바꾸다

나석주 의사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 폭파 사건 이후 의열단 의거 활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 무렵 의열단이 활동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에요.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계속되는 의거 활동으로 단원들이 체포되자 개인의 의거 활동보다는 조직적인 무장 투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원들을 이끌고 중국국민당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1932년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와 함께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키우는데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어요.

의열단은 1935년 공식 해체되었고, 단원들은 여러 세력과 힘을 합쳐 조선민족혁명당을 만들었어요. 1938년 조선민족혁명당은 항일투쟁을 위한 군사 조직으로서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어요. 조선 의용대는 중국인과 힘을 합쳐 일본에 맞서 싸웠어요.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하거나 일본인 주요 인물이나 친일파를 암살하는 의거 활동을 펼쳤어요. 이러한 활동은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지요. 의열단원들은 어떤 마음으로 의거에 임했을까요? 의열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조선 의용대>   
독립기념관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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