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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교육을 실시한 학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 중구)>   
문화재청

“전하!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여학생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고 합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오. 그 학교에 ‘배재학당’처럼 이름을 지어서 내려야겠소.

‘배재학당’에 이어 이름을 지어 보낸 여학교는 ‘이화학당’이에요. 두 학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대 학교에요. 근대 학교는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두 학교처럼 근대 교육을 실시한 학교는 어디일까요?

개항 이후 근대 학교가 세워지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개항을 했어요. 개항은 우리나라 항구에 외국 배가 드나들며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과 원산, 인천 등의 항구를 열게 되었지요.

1882년 조선 정부는 청의 권유로 서양의 나라 중 미국과 처음으로 근대적 조약을 맺었어요. 조선 정부는 청의 권유를 받아 미국과 조약을 맺게 되었어요. 청은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의 조약을 제안한 것이에요. 그 뒤로 프랑스, 영국, 독일과 차례로 조약을 맺어요.

강화도 조약으로 항구를 열고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은 후 인천, 부산, 원산 등의 항구를 통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하나둘씩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중에는 헨리 아펜젤러, 메리 스크랜턴 같이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선교사들이 있었어요.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펼쳤어요. 그 중 하나가 서양식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어요. 대표적인 학교가 바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지요.

두 학교의 이름은 모두 고종이 손수 지어서 내려준 것이에요. ‘배재학당’ 중 ‘배재(培材)’는 ‘배양영재(培養英材)’에서 두 글자를 따온 것이에요. ‘배양영재’는 영재를 키워낸다는 뜻이고 ‘배재학당’은 이를 위한 학교란 뜻이겠죠.

배재학당 현판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지요. 글자가 아주 반듯하게 잘 쓰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현판의 글자는 그 당시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난 정학필이란 사람이 썼어요. 그만큼 고종이 이 학교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편, 이화학당의 이름 역시 고종이 정해서 내려준 것이에요. 학당이 위치한 정동 지역에 배꽃이 많이 피었다고 해요. ‘이화(梨花)’라는 한자어가 배꽃이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근대 학교는 선교사가 세운 학교만 있었을까요? 아니에요. 배재학당이 세워지기 전에 ‘원산학사’와 ‘육영공원’이라는 학교가 이미 있었어요.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근대 학교에 대해 살펴볼까요?

  

우리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가 세운 학교, 배재학당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세운 학교에요. 아펜젤러는 1885년 부인과 함께 제물포(인천)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어요. 그는 제물포에서 한 달 이상 머물다 서울에 들어 올 수 있었어요.

서울에 온 아펜젤러는 선교 활동을 바로 할 수 없었어요. 당시 많은 조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고, 또 외국인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고종도 외국인들에게 의료와 교육사업만 허락했어요. 그래서 아펜젤러는 1885년 조선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어요.

이 학교는 처음에 2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어요. 그들은 원래 서양 의학을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서양 의학을 배우려면 영어를 꼭 알아야 하기에 먼저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던 거예요.

그 후 영어를 배워 관직에 나가려는 조선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에 오기 시작했어요. 1886년 10월에는 18명의 학생이 학교에 다닐 정도였어요.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를 ‘배재학당’이라 부르고 학교 이름을 새긴 현판을 내리도록 하시오.”

1887년 2월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내려주었어요. 아펜젤러는 자신이 세운 학교를 조선 정부가 인정한 것이라 여겨 매우 기뻐했어요.

<배재학당을 짓고 있는 모습>   

학교의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 벽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어요. 건물 지하실에 인쇄소도 만들어요. 가난한 학생들은 그곳에서 일을 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요.

그런데 배재학당 학생들은 영어만 배웠을까요? 아니에요. 조선의 지배층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한문을 기본으로 배웠어요. 그 외에 언문으로 불리었던 한글을 비롯하여 서양의 역사, 지리, 과학, 미술, 노래 부르기, 체조 등도 배웠어요. 한문만을 배우던 서원과 향교 등 조선의 전통적인 교육시설과 달리 다양한 과목을 배웠던 것이에요.

배재학당은 학생들이 지켜야 하는 여러 가지 교칙도 있었어요.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아요.

학교에 나올 때나 수업을 할 때나 쉴 때는 반드시 종을 울린다.
수업시간이 아니면 학교에 들어오지 말고 학교에서 싸우지 못한다.

교칙을 잘 읽어보니 오늘날 우리가 다니는 학교와 비슷한 점이 보이네요. 특히 수업 시작할 때와 쉬는 시간에 종을 울리는 것은 요즘 여러분이 다는 학교에서 똑같이 하는 것이죠.

여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학교, 이화학당

이화학당은 1886년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세운 학교에요. 스크랜턴 부인은 1885년 선교사이자 의사인 아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박사와 함께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어요.

서울에 들어온 스크랜턴 부인은 미국 공사관이 있었던 정동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정동의 한 초가집에서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이화학당의 시작이에요.

스크랜턴 부인이 처음으로 가르친 여학생은 학교에 올 당시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어요. 그녀는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사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이 여학생은 학교를 나오기 시작한 후 약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다행히 다른 여학생들이 입학하면서 학교는 유지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당시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여학생을 모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어느 날 한 학생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데려가겠다며 스크랜턴 부인을 찾아왔어요. 그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 서양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에요.

즉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과 옷을 주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데려간다는 이야기였어요. 스크랜턴 부인은 학생의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스크랜턴 부인은 학생의 어머니와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어요.

… 딸을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지만, 부모의 허락 없이는 미국은 물론 조선 안에서 10리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로 서약합니다.

스크랜턴 부인이 여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1887년에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어요. 이때부터 여학생 모집이 이전보다 쉬워졌어요. 이화학당은 학교 이름을 받기 1년 전인 1886년 학교 건물을 한옥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어요. 학교 앞마당을 잔디와 꽃나무로 꾸몄다고 해요. 그러자 부녀자들이 명절 때가 되면 이화학당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해요. 많을 때는 천 명이 넘기도 했다고 해요.

“학교에는 처음부터 통역도 하지 않고 영어로 가르쳐주었어요.”

당시 이화학당에 다니던 한 학생이 학교생활을 이야기하며 한 말이에요. 이화학당은 배재학당처럼 영어로 수업을 했던 것이죠. 덕분에 이화학당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로 여의사가 된 김점동(박에스더)이에요.

이화학당 학생들도 영어만 배운 것은 아니에요. 배재학당처럼 한문을 비롯한 지리, 체조, 재봉 등 여러 과목을 배웠어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어요. 학생들이 체조를 배운다는 소문이 돌자 자기의 딸들을 학교에서 데려가는 학부모들이 생겨났어요.

당시 사람들은 여자가 다리를 들어 올리며 체조를 하는 것을 양반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는 양반 출신 가문들은 이화학당에 다닌 여자는 며느리로 맞이하지 않는 일까지 생겼다고 해요.

<이화학당의 체육시간(191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체조 수업으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학교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어요. 학생들은 점점 늘어나서 1890년대에는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박영효의 딸까지 이화학당에 와서 공부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화학당은 세워지고 나서 한동안 교육과정이 완전히 갖추어지진 않은 상태로 운영되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두 번째로 입학한 학생은 약 10년 동안 학교에 머물렀다고 하니 말이에요.

이화학당이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마련한 것은 1904년이에요. 당시 이화학당의 학당장이었던 페인이 정부 인가를 얻어 4년제 중학교를 만들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근대 학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까지 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근대 학교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근대 학교도 많이 있어요. 그 중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라고 알려져 있는 학교가 있어요, 바로 원산학사이지요.

원산학사는 배재학당이 세워지기 2년 전인 1883년에 세워 졌어요. 원산은 강화도 조약 당시 개항한 항구 중 하나였는데, 이 원산에 살고 있던 마을 유지와 관리가 힘을 합쳐 학교를 세운 거예요. 학생은 문예반 약 50명, 무예반 200명을 모집하였어요. 무예반을 더 많이 뽑은 것은 개항 이후 일본이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원산학사가 민간이 설립한 근대적 학교라면 정부가 세운 근대 학교도 있어요. 바로 육영공원이에요. 육영공원은 1886년에 미국인 교사 3명을 초빙하여 세워진 학교에요. 이곳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양반의 자제나 젊은 관리들이 모여 공부했는데 배재학당처럼 주로 영어를 배웠어요. 그 외에도 지리, 과학, 수학 등도 배웠지요.

학비는 나라에서 주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뜻만 있으면 무료로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육영공원은 재정 문제 등 운영상 어려움으로 1895년에 학생들이 새로 생긴 관립영어학교로 옮겨가며 문을 닫았어요.

우리나라에 세워진 근대 학교를 살펴보니 대부분 영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마도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오는 서양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살펴본 배재학당, 이화학당, 원산학사, 육영공원 이외에 어떤 근대 학교가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해요. 이런 궁금증을 가진 학생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좀 더 공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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