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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정신이 깃든 의병 운동 유적

<제천 자양영당(충북 제천시)>   
문화재청

“한 나라의 왕비를 시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풍속마저 없애려 하다니, 나쁜 무리들 같으니. 이제 못참겠어. 뭐래도 해야겠네.”

“동감일세. 그렇지 않아도 지금 유인석이 의병을 모으고 있다는데. 그럼 자네 나와 함께 제천으로 가지 않겠나?”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유인석은 제천의 장담에서 의병을 일으킬 뜻을 알렸어요. 이에 의병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지요. 과연 제천에서 어떤 의병 활동이 펼쳐졌을까요?

을미년에 의병이 일어나다

1895년 조선의 국모인 명성 황후가 일본인들 칼에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해요. 조선 사람들은 크게 분노하였어요. 일본의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 제거되자, 일본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골라 내각을 꾸렸어요. 그리고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지요.

그 중에는 상투를 잘라 서양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라는 단발령이 있었어요.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신체·머리털·살갗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단발령을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진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여 크게 반발하였지요.

“왕비 마마를 죽인 놈들이 이제는 임금님의 상투까지 잘랐다고 하네 그려!”

전국 각지가 들썩거리며 일본을 몰아내자는 목소리를 높였어요. 나아가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병사를 일으켜 일본과의 싸움에 나섰어요. 이런 사람들을 의병이라고 불러요.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 만에 다시 의병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들을 을미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을미의병’이라고 해요.

그러나 을미의병은 고종이 “이만하면 우리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으니 그만 해산하라.”는 권고에 점차 누그러들고 말았어요. 1895년에 일어난 의병 운동은 유학자들이 주도하였어요. 춘천의 이소응, 제천의 유인석이 대표적인 의병장이었지요.

  

제천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1889년 유중교라는 한 유학자가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장담 마을로 이사를 했어요. 그러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이 마을로 거처를 옮겼어요. 유중교는 화서 이항로의 학문을 따르는 대표적 유학자였지요. 이들을 화서학파 유학자라 하지요.

유중교는 자신의 집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집을 ‘장담서사’(장담 마을에서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라 불렀지요. 장담서사에서 수업이 열릴 때면 제천을 비롯한 단양‧충주 일대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어요.

유중교가 죽자 의암 유인석이 이곳으로 와 장담서사를 이끌었어요. 유인석은 유중교가 죽은 이후 화서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가 되었지요.

<자양영당(충청북도 기념물 제37호)
1889년 자양서사로 시작하였으며, 1907년 이항로, 유중교 등의 영정을 모시며 자양영당이 되었다. 유인석 등의 영정이 추가로 배향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문화재청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유인석은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장담서사로 수백 명의 선비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리고 모인 선비들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어요. 이 때문에 제천의 장담서사는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어요.

“일어서라 조선의 백성들이여! 국모를 시해하고, 조선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저 사악한 무리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

1896년 유인석은 자신이 거느리던 모든 의병들에게 영월에 모이도록 지시하였어요. 의병이 원주, 단양 등에서 활약하고 있었지만, 체계성이 없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거든요.

“우리는 그동안 각자의 지역에서 왜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각자의 힘으로 싸우니 힘이 흩어져 그 결과 또한 미약했다. 이제 대장군 밑에 힘을 모아 다시금 일어서자!”

여러 지역의 의병 부대가 하나둘 영월로 모여들고 있었어요. 이들은 영월 관아에 진을 치고 부대를 정비하였지요. 그리고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어요.

1896년 2월 유인석의 의병 부대는 충주성을 공격하였어요. 충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새일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게도 중요한 거점이었어요. 이곳을 차지하면 호서(충청도) 일대를 장악해 서울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당시 충주성은 1,000여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공격하기 어려웠어요.

이에 유인석은 주력 부대와 별동대로 병사들을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어요. 그리고 미리 충주성의 내부 사정을 살펴 성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문을 여는 데 성공하였지요.

유인석의 의병 부대는 충주성을 완전히 점령하였어요. 그리고 안동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연합하여 중부 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지요.

<자규루
영월 관아의 문루인 자규루는 의병 본부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문화재청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참 기지에서 부대를 증원받은 일본군과 관군은 충주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시작하였어요. 성을 포위한 100여 명의 일본군은 사격을 가하는 한편 성 밖의 민가를 불태웠어요. 의병과 일본군 간에 충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어요. 이틀간의 전투로 충주성은 모든 건물이 불타고 마을은 폐허로 변했지요.

결국 제천 의병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무력과 화력에 앞선 일본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마침내 유인석은 퇴각을 결정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였어요.

유인석의 의병 부대는 총력을 기울여 제천 방어에 나섰어요. 하지만 1896년 5월 끝내 관군에 패하고, 의병 부대 최후 거점인 제천성마저 빼앗기고 말았지요.

제천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아쉽게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어요. 그러나 이후에도 제천의 의병 운동은 계속되었고, 훗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어요.

<의병을 지휘하는 유인석>   

홍성, 순창 등에서도 의병이 일어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은 다시 분노로 들끓었어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분위기였지요.

“을사늑약을 취소하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전국에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외치는 소리가 거세게 일어났어요. 또다시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이 방방곡곡 들불처럼 일어났어요. 이때의 의병을 을사늑약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여 ‘을사의병’이라고 불러요.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이 있지요.

민종식은 충청남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어요. 홍주 의병은 대포로 무장하고 홍주성을 점령했어요. 그곳에서 그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가운데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인 의병 부대였어요.

한편 당시 조선의 전통적인 사상을 지키고 서양 사상을 물리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최익현이었지요. 그는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라북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어요.

평민 신돌석이 의병을 이끌다

1906년 스물아홉 살이 된 신돌석에게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신돌석은 그해 자기 고향인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에서 10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어요. 그는 ‘영릉 의병’이라 의병의 이름을 짓고 의병장이 되었지요.

<신돌석 생가(복원, 경북 영덕군)>   
문화재청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뒤 가장 필요했던 것은 근대 무기인 총이었어요. 일부 사냥꾼들에게 총은 있었지만, 최신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요. 우선 신돌석은 신무기 확보를 위해 1906년 4월 영양읍 관아를 기습했어요.

“수백 명이 각각 총포를 들고 들이닥쳐 사방으로 발포하고 순교청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무기 창고에서 총, 탄환, 화승총, 화약 등을 갖고 영해로 향했다.”

관아에서 빼앗은 무기로 무장한 신돌석은 영덕·울진·경주 등의 경상도 일대와 삼척·강릉·양양 등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었어요. 의병과 일본군의 총의 사정거리는 무려 100미터나 차이가 났어요.

무기 성능에서부터 이렇게 차이가 커서 평지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면 의병들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신돌석은 산악 지형을 이용해 재빠르게 움직이며 기습 공격을 펼쳤지요.

<의병 무기(위)와 일본군 무기(아래), 신돌석 유적지 기념관>   

신돌석은 일본군을 꾸준히 괴롭혔고, 그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어요. 일본군은 신돌석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어요. 일본군은 그를 신출귀몰한 인물로 여겼어요.

심지어 ‘신돌석 의병 부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해요. 신돌석의 활약으로 의병은 3,000여 명까지 늘어났어요. 어느덧 신돌석은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지요.

평민 의병장으로서 신돌석의 신출귀몰한 활약은 일반 백성들에게 항일 의식을 한층 더 높여주었어요. 군대 해산 이후 군인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운동은 이제 유림 중심을 넘어서 전 민족의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13도 창의군과 신돌석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내쫓았어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흥분한 백성들은 친일 단체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친일파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어요.

“남의 나라 황제를 제멋대로 쫓아내다니, 천하의 날강도 같으니.”

그러나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 제국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렸어요. 한 나라의 국민을 지켜 줄 군대조차 없는 나라라니요.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쫓겨난 많은 군인들은 의병 부대에 들어갔어요. 잘 훈련받은 군인이 성능이 뛰어난 근대식 무기를 가지고 의병 부대에 합류하자 의병의 조직력과 전투력은 더욱 높아졌지요. 이제 의병 운동은 기존의 차원을 넘어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지요.

의병장 이인영은 각 지방 의병장들에게 힘을 합쳐 서울로 쳐들어가자고 호소하였어요.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 부대들이 양주로 모여들었고, ‘13도 창의군’이라는 의병 연합 부대가 만들어졌지요. 총병력은 해산된 군인 3,000여 명을 포함하여 1만여 명에 이르렀어요.

이때 신돌석도 기쁜 마음으로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어요. 아,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13도 연합 의병 부대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 부대가 제외된 것이에요.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 부대의 활약은 조선 사람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어느 의병장 못지않게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데 말이지요. 무슨 이유일까요?

13도 창의군의 구성을 보면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를 포함하여 민긍호, 이강년, 권중희 등 전국 각도의 의병 부대가 다 모였지요. 이들의 공통점이 있었어요. 이들 의병 대장은 모두 양반 또는 유생 출신이었어요.

신돌석은 비록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지만,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개편된 13도 창의군에 편성되지 못한 것이에요. 당시에는 양반 출신만 의병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나라를 구하는데 양반, 평민이 따로 있을 수 없지요. 13도 창의군이 가진 큰 한계이자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어요. 그 가운데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먼저 서울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어요.

게다가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진격을 눈앞에 앞두고 부친상을 치르러 내려가 버리고 말았어요. 허위가 이를 이어받아 작전을 전개하였지만,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순국하였지요.

이후 일본은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삼남 지방의 의병 부대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작전을 펼쳤어요. 결국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의병 활동을 벌이기 어려워지자, 의병들은 만주 등지로 옮겨가 독립군으로 활동을 이어갔지요.

나라가 힘이 약해지면 사람들 모두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나라가 위급해지는 상황이 닥칠 수 있어요.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겠지만, 만약 나라가 위급해진다면 옛날 의병처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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