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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 항일 의지가 새겨진 봉오동·청산리 유적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중국 지린성)>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 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이 가사는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들이 불렀던 군가의 일부에요. 독립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독립군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요?

독립군, 간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강한 무력을 앞세워 대한 제국을 압박하였어요. 의병과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으나 힘이 모자랐고, 결국 1910년 나라의 주권마저 일제에 빼앗기고 말았어요.

애국 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어요. 특히 일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중국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고, 독립군이 되어 싸웠지요.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계 지역인 간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에 알맞은 곳이었어요.

독립운동 기지를 세운 애국지사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만주 간도에 세운 여러 학교 중 대표적인 것이 신흥무관학교였어요. 이 학교는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무관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학교였지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만 약 3,000명이 넘는 무관이 졸업을 했어요. 졸업한 무관들은 독립군의 중심이 되어 일제에 맞서 무장 독립 투쟁을 펼쳤어요.

이렇게 힘을 기른 독립군은 주로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 또는 강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제 경찰이나 군대와 전투를 벌였어요.

이전의 의병 부대와 달리 군사 훈련도 잘 되어 있고, 최신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어 일본군에 많은 피해를 주었지요. 한반도에서 모든 의병을 없앴다고 믿고 있던 일제는 독립군의 활약에 깜짝 놀랐어요.

<독립군(북로 군정서군)의 기본 무장>   

독립군은 일제에게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어요. 일제는 독립군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데 큰 걸림돌이라 판단했어요. 그래서 중국의 허락도 없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추격했어요. 그 중 하나가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대한 독립군이었어요.

대한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일제 국경수비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어요. 크게 패한 일본군은 대규모 부대를 모아 대한 독립군을 쫓아 만주로 넘어왔어요. 독립군 부대는 깊은 산에 의지해 몰래 숨어있다 지나가는 일본군을 공격하고 사라지는 작전을 사용했어요. 대한 독립군은 공격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였어요.

봉오동 골짜기에는 대한 독립군 본대가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의 포위망에 들어오자 대한 독립군은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지요. 동서북 삼면에서 쏘아대는 독립군의 총에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며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봉오동에서 157명이 죽고, 200여 명이 부상당한 일본군과 달리 독립군은 4명 만이 목숨을 잃었어요. 부상자도 많지 않았지요. 독립군의 완벽한 승리였어요.

봉오동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더 많은 부대를 동원해 독립군 추격에 나섰어요. 일본군의 대규모 추격을 예상한 여러 독립군 부대도 백두산 쪽으로 이동하며 연합 작전을 준비했어요. 김좌진 장군의 북로 군정서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와 대규모 일본군 부대가 만난 곳은 바로 청산리였어요.

<독립군의 활약>   

청산리 역시 봉오동과 마찬가지로 높은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곳이었어요. 독립군 연합 부대가 백두산 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독립군의 앞뒤를 가로막아 포위하려는 작전을 펼쳤어요. 반면에 독립군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기습 공격하는 작전을 펼쳤어요.

청산리 일대 골짜기에서 5박 6일 동안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10차례의 큰 전투가 벌어졌어요. 병사 수가 적은 독립군은 쫓아오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해 공격하였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펴낸 독립신문에는 청산리 전투의 결과 독립군은 100여 명이 전사하였고, 독립군의 유인 전술에 걸린 일본군은 1,200여 명이 죽었다고 보도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독립군이 커다란 승리를 거둔 것이에요.

청산리 일대에서의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어요. 하지만 일제의 무력이 만주지역에 더욱 강해지면서 중국 사람들마저 독립군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결국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만주를 떠나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야만 했어요. 독립군이 떠나면서 만주에서의 독립 전쟁은 잠시 멈춰지고 말았어요.

  

신흥무관학교의 무관들은 누가 교육했을까?

간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교육을 받은 많은 무관들은 일제에 맞서 독립군을 지휘하는데 앞장섰어요. 병법이나 무기 다루는 법을 몰랐던 일반인들을 훌륭한 군인으로 키워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힘을 기르자! 독립을 찾자! 그래서 온 국민을 일제의 사슬에서 구하자.

신흥 무관 학교 생도들을 향해 신팔균 교관이 독립을 외쳤어요. 신팔균 교관은 대한 제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었어요. 하지만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국권마저 빼앗기자 만주로 이주해 신흥 무관 학교의 교관이 되었죠.

신흥 무관 학교에는 대한제국군 출신 교관이 여러 명이 있었어요. 이들은 대한 제국 군대의 병법과 중국의 병법을 연구해 생도들을 교육하였어요.

신흥 무관 학교에는 지청천 장군과 같이 일본 사관학교 출신 교관들도 있었어요. 일본군의 병서와 지도를 갖고 만주로 망명한 지청천은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였어요.

지청천이 갖고 온 병서를 통해 독립군은 일본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것은 생도들에게 일본군과 맞서 싸울 방법을 교육시킬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어요.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 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

중국 군관학교 출신 교관도 있었어요. 청산리 대첩에서 큰 활약을 한 이범석 장군은 중국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신흥 무관 학교의 교관이 되었어요.

대한 제국 육군군관학교 출신 신팔균, 일본 사관학교 출신 지청천, 중국 군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 장교 출신의 훌륭한 교관이 들어오면서 신흥 무관 학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어요. 전국에서 학교를 찾아와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날로 늘어났어요. 강한 독립군이 만들어져 가면서 독립에 대한 희망도 더욱 커져 갔어요.

독립군은 많은 무기를 어떻게 구했을까?

1894년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 1천여 명과 전투를 치렀어요. 수가 많은 동학농민군은 단번에 이길 수 있으리라 예상했어요.

그러나 산을 오르는 동학농민군을 일본군의 개틀링 기관총이 막아섰어요.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은 전투가 끝나고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 전투로 큰 피해를 입은 동학농민군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어요.

거꾸로 청산리 대첩에서는 일본군이 2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해 독립군을 없애고자 했어요. 이에 맞선 독립군은 2천 명이 넘지 않았어요. 하지만 결과는 독립군의 승리였지요.

동학농민군이나 의병 때와는 달리 독립군은 높은 지형을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과 일본군에 뒤지지 않는 무기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 무기를 만들 수 없었던 독립군은 그 많은 무기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에 망명한 체코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가 독립하면서 연해주에 머물던 체코 군단은 무기와 군수 물자를 빨리 처분하고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려고 했어요. 이를 알게 된 독립군은 이들의 무기를 구매하고자 했어요. 식민지를 경험한 체코 군단도 독립군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호의적이었어요.

<독립군이 사용한 체코 군단의 무기(전쟁기념관)>   

독립군에게는 무기를 살 군자금이 필요했어요. 간도와 연해주의 동포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했어요. 돈이 없으면 갖고 있던 금비녀, 금반지, 비단, 심지어 놋쇠 요강까지도 내놓았어요. 동포들이 모아준 군자금으로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총알 등 많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체코 군단으로부터 구입할 수 있었어요.

군자금을 모아 간신히 무기를 샀지만 이것을 운반하는 일도 매우 힘들었어요. 간도의 독립군 부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200km가 넘는 거리였어요. 독립군 운반대는 어깨에 메거나 양손으로 직접 들고 무기를 날랐어요.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중국 마적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 시간에 깊은 산길을 이용했기에 무기 운반은 더욱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운반해 온 무기를 독립군은 매우 소중히 다뤘어요. 힘들게 구한 체코 군단의 무기는 독립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독립군과 의병은 뭐가 다를까?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무기를 들고 일어나 맞서 싸운 일반 백성들을 의병이라 해요. 외침이 많았던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관군만으로 외적을 물리치지 못할 때 많은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맞서 싸운 경우가 많았어요.

외적과 싸우기 위해 일반 백성이 무기를 들었지만 그 무기는 주로 생활 속에서 구한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가장 많이 사용한 죽창도 주변의 대나무를 구해 만들었고, 낫과 같은 농기구도 의병의 무기가 되었어요.

의병들의 이런 무기는 대한제국 시기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화약무기는 주로 구식 화승총이었고, 대나무로 만든 죽창을 여전히 사용하였어요.

<의병이 사용한 화승총과 일본군의 소총(전쟁기념관)>   

대한 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하자 의병의 전투력도 올라갔어요. 그렇지만 의병들에게 신식 소총은 여전히 적었고 대부분 화승총으로 무장을 했어요. 그나마 의병 모두가 무장을 한 경우도 많지 않았어요.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가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제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한 외국인 기자가 의병들을 만났을 때 의병이 한 이야기에요. 비록 옛 화승총과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든 의병이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는 매우 강했어요. 한때는 약 1만여 명의 의병이 모여 일본군이 점령한 한성을 되찾고자 했어요.

하지만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심한 경우 수십 명의 의병이 단 3명의 일본군에게 패해 쫓기는 경우도 있었어요.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 부대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국내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진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를 세웠어요. 애국지사들은 무엇보다도 독립군을 키우고 싶었어요.

독립군도 처음에는 의병이나 다름없었어요. 다만 1910년에 국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되찾자는 것을 강조하면서 독립군이라 불리우게 되었어요. 애국지사들은 젊은이들을 독립군으로 기르기 위해 체계적으로 훈련시켰고, 신식 무기로 무장시키고자 했어요.

의지는 강했으나 낡은 무기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의병과 달리 독립군은 강한 군대가 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어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더 많은 수의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독립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일제의 침략에 목숨을 바쳐 저항했던 의병들의 뜻은 독립군으로 이어졌어요. 독립군의 뜻은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국군의 뿌리가 되었어요.

변변한 무기 하나 제대로 없던 독립군은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가며 군대를 길러 일본군에 맞서 싸웠어요. 그리고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하였죠. 그것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군의 값진 승리였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늘 앞서나와 이를 극복하고자 했어요. 역사의 여러 장면 속에서 우리 스스로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찾아보아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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