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근대
  • 한국 디아스포라의 역사
  • 한국 디아스포라의 역사

한국 디아스포라의 역사

<한국을 찾은 재외동포 학생들>   
재외동포재단

“저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 머나먼 하와이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사진에서 본 얼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시네요. 그렇지만 이렇게 반겨 주시니 저도 마음을 다잡아볼게요. 앞으로 우리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도록 해요 ”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 7천여 명이 하와이로 이주했어요. 하와이로 간 사람들은 주로 결혼하지 않은 남성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결혼할 사람을 찾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자신의 사진을 고국으로 보내 신부가 될 여성들을 구했지요.

여성들은 그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정한 뒤에 하와이로 건너갔는데, 이들을 ‘사진 신부’라고 해요. 이렇게 하와이로 건너간 ‘사진 신부’들은 정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요. 그래도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어요.

이러한 ‘사진 신부’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이민을 떠나던 초창기에 일어났던 흥미로운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해외로 이주했을까요? 또 주로 어느 지역으로 건너갔을까요?

재외동포와 디아스포라의 의미

재외동포란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의미해요. ‘해외동포’, ‘해외교포’, ‘해외한민족’, ‘재외한인’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정부에서 정식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재외동포’예요. 일반적으로는 여기에 거주하는 국가명을 넣어 표기하지요.

예를 들면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재일동포,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재중동포,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재미동포 등으로 부르고 있어요. 재외동포는 어디에 몇 명이나 살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2021년 기준으로 만든 자료를 살펴보아요.

<재외동포 분포 현황>   

재외동포 관련 용어 중에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있어요. ‘디아스포라’란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본래 팔레스타인 지방(오늘날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둘러싸인 곳)을 떠나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이었어요.

나중에 그 의미가 확대되어서 본래 살던 땅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조선 말기까지 거슬러 갈 수 있어요. 그때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생존을 위해 떠난 사람이 많았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부터는 생존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해외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어요. 또한 징용, 징병,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다 광복 이후 그대로 그 지역에 머물게 된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주했던 지역도 시기적으로 변화가 나타나요.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 지역으로 이주했어요.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이주 확대 정책이 시행되면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많이 이주했지요. 그리고 1960년대부터는 특정 지역이 아닌 세계 곳곳으로 이주가 행해졌어요. 이렇게 해외로 떠난 사람들이 각지에서 한인 사회를 형성하였지요. 2023년 현재 730만 명 이상의 재외동포가 전 세계에 살고 있대요.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주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어요. 당시 흉년이 잦아 먹고 살기 힘든 조선인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국경 너머 만주 지역으로 이주했어요.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제의 침략이 심해지자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넘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만주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사람들은 현지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열심히 터전을 일구었어요. 또 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의 역사, 언어 등을 가르치는 학교도 세웠지요. 학교에서는 군사 훈련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기반으로 항일 무장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어요.

<1910년대 만주·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와 학교>   

1919년 3ㆍ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했어요. 그러자 일제는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애겠다는 구실로 한국인 마을을 불태우고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켰어요. 1930년대 일제가 만주 지역을 점령한 후에는 그곳의 개발을 위해 국내에 사는 한국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기도 했어요.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 후 중국 내 한국인들은 중국 국적을 받게 되었어요. 그리고 1952년에는 한국인들이 많은 중국 옌볜 지역에 조선족 자치주가 만들어졌어요. 도로 표지판, 가게 간판 등에서 한글이 사용되고 있지요. 1992년 우리나라와 중국이 국교를 맺은 이후에는 수많은 조선족이 서울, 인천, 안산 등에 이주해서 살고 있어요.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다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국경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주를 허용했어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지요. 신한촌을 비롯한 한국인 마을들이 형성되었고, 각기 여러 단체와 학교가 세워졌어요. 이 지역의 동포들은 1914년에 대한 광복군 정부를 구성해 무장 투쟁을 목표로 내걸었으며, 1919년에는 임시 정부 성격을 띤 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하였어요. 대한 국민 의회는 나중에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통합했어요.

러시아 사람들은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을 카레이스키 또는 카레이츠라고 불렀어요. 고려인이라는 뜻이지요. 한편 러시아는 1922년에 소련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1937년 소련의 권력자 스탈린은 소련과 일본 간에 전쟁이 발발하면 고려인들이 일본을 지원할 것으로 의심하며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어요.

당시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 중에서 17만여 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어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희생되었고요.

그러나 카레이스키(고려인)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에서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척하였지요. 황무지를 농경지로 만들며 성공적으로 정착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한편 1990년에 우리나라는 소련과 국교를 맺고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어요. 이에 따라 옛 소련 지역에 살고 있던 독립운동가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 중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이들은 광주, 안산, 인천 등지에 정착해서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어요.

<소련 내 카레이스키(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일본으로 이주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다수는 유학생이었어요.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생활 기반을 잃은 농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일제는 임금이 낮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 이주를 허용하였어요. 이주는 점차 증가하였지요.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으며 힘든 일을 했고, 일본인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어요.

그러던 중 1923년에는 일본 간토(관동) 지역에서 진도 7.9의 지진이 발생했어요.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 피해가 컸지요. 경찰력이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가 흉흉했어요. 그러자 일부 일본인들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기 시작했어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

“조선인들이 우물 안에 독약을 넣었다.”

일본에서 벌어진 사회 불안의 원인을 그곳의 힘 없는 조선인 탓으로 돌렸던 거지요. 이런 유언비어에 흥분한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어요. 이로 인해 적어도 6천여 명의 동포가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어요.

1930년대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 이주는 계속되었어요. 특히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으로 국제 정세가 혼란해지는 가운데 일본 내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광산이나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했어요.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하면서 제대로 임금도 받지 못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왔다는 이유로 심한 차별을 받았어요.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에 살던 이들 중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당시 일본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귀국한 사람은 1950년까지 약 100만 명이 넘었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귀국자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해요.

한편 60여만 명은 일본에 남았어요. 이들은 일본에 뿌리내리며 재일동포(자이니치)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현재 그 후손들이 재일동포 4세 혹은 5세로 이어지고 있어요.

미주 지역으로 이주하다

20세기 초 농장 노동자들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미국 하와이의 농장 주인들은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인의 이주를 요청했어요. 대한제국 정부는 하와이 이주 공고를 냈고, 많은 사람이 응모했어요.

그 결과 1902년 12월 22일에 이민 희망자 121명 중 신체검사에 통과한 102명이 상선 갤릭호를 타게 되었지요. 이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어요. 이 중 질병이 없는 97명이 하와이에 입국하였지요.

이후 1905년 하와이 이민이 폐지될 때까지 7천여 명이 하와이로 이주했어요. 그때의 이주민은 하와이의 농장에서 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무더위 속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지요. 하와이로 이주한 사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혼이었어요.

대부분 미혼으로 건너간 남성들은 당시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기를 꺼렸어요. 그래서 고향의 친척들에게 사진을 보내 결혼할 여성을 구해달라고 했지요. 그런 남성의 사진을 보고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간 여성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사진 신부’라고 불렸어요.

그런데 남성들이 보낸 사진은 대부분 이주할 때 찍은 사진이어서 실제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았대요. 낡은 사진 한 장을 믿고 바다를 건너온 여성들은 사진보다 나이 든 남성들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어요.

할머니는 시집오기 전 한국에서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행복했대요. … 몇 날 며칠 배를 타고 할머니가 하와이에 도착했어요. … 처음으로 할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순간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 보여 할머니는 속이 상해 울었대요.
- 「우리 가족의 역사」

  

많은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건너가면서 그곳의 한국인 사회는 안정되기 시작했어요. 농장 생활을 그만두고 미국 내 도시로 이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지로 옮겨가서 농장, 광산, 철도 회사 등에서 일했지요. 오늘날 미국의 한국인 사회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어요.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한반도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장 투쟁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었어요. 대신 성금을 모아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어요.

특히 독립 공채를 구매하거나 의연금을 모으는 등의 방식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자금을 지원했어요. 또한 1910년에는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고 1941년에는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를 결성하여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힘썼어요.

광복 이후에는 주한 미군의 배우자가 된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입양이나 유학으로 건너가기도 했어요. 또한 경제적인 이유로 미국 이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어요. 이미 미국에서 생활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가족을 초청해서 이민 가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먹고 살기 위해 해외 이주를 하기 시작했어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했지요. 광복 이후에는 세계 각지로 이주하는 한국 사람들이 더욱 늘었어요. 요즘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 가는 사람들도 많지요.

여러분 주위의 친척이나 이웃 중에도 재외동포가 있지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재외동포는 더욱 늘어날 거예요. 그리고 요즈음은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엄청 많아요. 여러분은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재외동포의 형성 과정이나 정체성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또한 이들과 더불어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 보도록 해요.

[집필자] 방대광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