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3.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
  • 1) 점령 직후 주한 미군 사령부의 신탁 통치안 반대 입장
  • 마. 미 군정의 인공 부인과 임정 요인 귀국 조치

하지 장군 휘하의 미 육군 24군단은 매우 위압적인 자세로 38도선 이남 지역의 점령에 임하였다. 1) 한국의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처하도록 진주 이전부터 강조되었지만 하지가 맞닥뜨린 남한의 혁명적 열기는 전술군 사령관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남한의 정세를 ‘불만 댕기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으로 비유하면서 점령군의 처지를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산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형국으로 묘사한 하지의 수선스러운 보고서는 과장이 아니었다. 2) 물론 군정 실시에 따른 초기적 혼란과 행정적⋅실무적 문제들이 하지를 괴롭혔지만, 이런 점들은 요원을 보강하고 지역 상황에 익숙해지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오히려 하지가 당면했던 주요 문제점은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태평양의 섬들에서 전투에 몰두하였던 야전군 사령관 하지가 군정의 수립, 과도적 행정 이후 한국의 미래에 관한 미국의 구상과 계획에 익숙해질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국내의 폭발적인 정치 열기에 대처하는 자세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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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 설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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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 설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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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에 대하여 하지와 상급자 맥아더가 받은 초기의 지침은 “초기의 두 지역 점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4대국에 의한 중앙 집권적 행정 기구로 대치되어야 하고, 이어서 같은 4대국에 의하여 국제 신탁 통치로 대치되어야 한다. 전국에 걸친 정상적 정치⋅경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소련군 사령부와의 연락 여하에 달려 있다.”는 일반적 방침에 대한 확인뿐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와 육군부는 국무부 측에 군사적 점령과 일본군 항복 접수 이후 남한의 정치⋅경제 문제들에 관한 방침을 조속히 하달해 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특히 점령군 당국은 인위적인 38도선 분할 점령의 불합리성에 대하여 종전 직후부터 우려를 나타냈다.

후자의 문제, 즉 한국 내의 정치적 열기와 한국인의 ‘조급한 독립 요구’에 대처하는 문제는 더욱 시급했다. 이미 해방 이전부터 미국은 국내⋅외에 급진 성향의 혁명 세력이 존재하고, 이들이 보수 세력에 비하여 훨씬 대중적이고 활동적이기 때문에 해방 직후 정국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주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진공기를 조속한 시일 내에 군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점령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하지만 진주 직후에 미 군정이 접한 한국인의 반응은 미국으로서는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항복 접수와 소련에 대한 보루의 구축을 점령 목적으로 생각했던 하지는 잘 조직된 급진 세력의 존재와 그에 비하여 조직도, 인기도 없는 보수 세력 사이의 역관계를 점령 목적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결국 이것은 대한 정책의 일반적 지침을 한국의 내부 정세에 어떻게 적응시켜 갈 것인가의 문제가 점령 이후 담당 관리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었음을 의미하였다. 특히 국내 정치를 어떤 방향, 어떤 목표를 향하여 끌어갈 것인가, 또 국내 정치 세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국무부는 원래의 신탁 통치안이 상정하였던 대로 한국의 그 어떤 정치 세력에게도 대표성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 즉 한국인에게 고위의 정책 결정권을 부여하지 않은 채 한국인들을 선택적으로 활용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사태 발전은 이러한 원론적 방침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급박하였다.

미군이 진주하여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정부 형태를 지닌 국내의 ‘조선 인민 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과 국외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처리였다. 미국은 해방 이전부터 임정(臨政)의 정부 자격 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진주 이후 미 군정이 맞닥뜨린 인민 공화국은 그 실체를 간단히 부정해 버릴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의 활동력이나 지방에서 인민 위원회 조직의 광범한 존재, 일본 항복 후의 진공기에 중앙이나 지방에서 보여 주었던 자치의 경험 등은 이들의 실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였다. 3)

수립 과정의 졸속성이나 조직의 성격⋅위상 문제 등을 별도로 한다면 인민 공화국은 해방 직후 시점에서 임정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정치 조직의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임정이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정부 승인 외교를 적극 펼쳤던 것과 비슷하게 해방 직후 국내의 첫 움직임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매개로 한 완전 독립의 성취라는 방향이었다. 미국은 국제 민간 행정 기구를 통하여 독립 이전의 과도기에 대처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국인들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앞질러 매우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인 정부 수립과 국가 건설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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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여운형
박헌영과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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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은 남한에서 미 군정 이외 일체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외에 천명함으로써 일단 인민 공화국과 임정 모두를 부인하였다. 미 군정은 10월 10일과 12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인민 공화국 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 임정 요인들에게는 귀국 이전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미 군정의 정부 자격 부인이 인민 공화국과 임정에 각각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인민 공화국의 부인은 지방 인민 위원회에 대한 미 군정과 경찰의 물리적 탄압을 동반한 조직, 활동 전반에 대한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부인이었다. 미 군정은 건국 준비 위원회, 인공, 각지의 인민 위원회 등 자생적 조직들을 모두 부인하였다. 점령 이후 각지에 전술군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이들을 해체하고 대신 구래의 식민지 통치 기구와 친일 관리, 경찰을 부활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점령 초기 미 군정은 반소⋅반공 체제의 구축이라는 목표하에 점령 통치 기구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한편 미 군정은 임정의 정부 자격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임정 요인과 그들의 대중적 명성을 이용하여 국내 정치에 대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는 진주한 지 일주일 만인 9월 15일, 맥아더에게 ‘임시 정부 자격으로 중경(重慶) 망명 정부를 환국시켜 간판으로 활용’하게 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하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국무부에 교섭하였고, 9월 하순 미 군정⋅맥아더 사령부와 국무부 사이에 임정의 귀국과 활용 문제를 둘러싼 교섭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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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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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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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와 맥아더의 건의를 받은 국무부는 개인별 송환을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지만 임정을 승인하거나 하나의 단체로 송환해서는 안 된다는 회답을 보내 왔다. 4) 맥아더 사령부는 상부에 재차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조속한 개인 자격 입국을 권고하였으며, 이들이 현재의 고문 회의(顧問會議)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5) 육군부도 현지 의견에 동의하였고, 이것은 해방 이전에 군부가 한국의 전후 처리를 위하여 소련과의 사전 협정을 강조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점령 이후 군부는 현지의 견해를 좇아 정책적 태도를 결정하였다. 6) 국무부는 10월 16일 군정에 필요한 한국인들의 개인 자격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언론에 발표하였다.

임정 요인의 귀국에 관한 하지⋅맥아더와 국무부의 교섭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양자의 교섭 과정에서 나타난 국무부의 태도와 도출된 결론의 의미이다. 국무부는 임정의 정부 자격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는 종래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임정 요인의 개인 자격 귀국에 동의함으로써 정치 세력 통합에 임정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미 군정의 건의를 사실상 받아들였다.

또 미 군정은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임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으나, 이러한 설명이 한국인들 사이에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임정 귀국을 전후한 시점에 미 군정은 인민 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미 군정이 임정 환국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였던 것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미 군정은 김구(金九) 등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임정을 ‘정부’로서 대접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7) 임정을 ‘간판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하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임정은 자신이 끓이는 국물(stew)의 간을 맞추는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이었다. 즉 미 군정의 임정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인 것으로서 공식적으로는 임정의 정부 자격과 법통성(法統性)을 부인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정의 ‘독립운동의 화신’으로서의 명성을 남한의 정치적 대표자라는 대중적 이미지와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사료 3-1-05〕 육군 대장 더글러스 맥아더가 합동 참모부에게, 1945년 12월 16일

본관은 주한 미군 사령관이 작성한 다음과 같은 보고서에 대하여 주의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메시지는 이전에 제출된 바 있는 몇 가지 사실과 건의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부연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현재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 상황이 마침내 위기로까지 발전하도록 방치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하 하지가 작성한 보고서: 역주)

제목: 한국 전쟁

3개월간의 남한 점령 이후 본관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전의 보고서들을 보다 결정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한국을 복수로 점령한다는 것은, 건전한 경제를 건설하고 한국을 앞으로의 독립에 대비하게 한다는 우리의 점령 과업에 불가능한 조건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미국은 분할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건설적인 노력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을 포함하여 남한에는 일체의 미국적인 것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사실에 의하여 반박될 것이므로 그 어떠한 설명도 민중들에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현 상황하에서의 미봉책은 한국 내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우리의 미약한 인기 및 업무의 효율성을 더욱 감소시키고 있습니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및 부일 협력자에 친미라는 용어가 추가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라는 존재의 유일한 이점은 한국 분할에 대한 민중의 적개심을 일부 나누어 갖는다는 것뿐입니다. 한국인들은 모두 복수 점령하에서는 진정한 자주 독립에 대한 논의가 그냥 학술적일 뿐이라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그들이 38도선 장벽이 제거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통일 정신을 심어 주는 것조차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계속되는 지연은 그 이상의 영구적인 민족 분단을 촉진시킬 따름입니다.

(B. 한국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독립을, 그것도 지금 당장에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연합국의 자주 독립 공약에 기인하는 것으로, 한국인들은 누구나 한정적 표현인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만 빼고는 그 공약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관은 “적당한 시기에”라는 표현을 뜻하는 적합한 한국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전반적인 불확실성 및 최초 점령 이래의 한국 대중의 좌절된 희망은,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공약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확신 및 가망 없음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서양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인들은 독립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현 정세 하에서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그들의 자치 능력이 크게 향상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 나날이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중략)

(F. 모든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는 '신탁 통치'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현재나 미래 어느 시기에 신탁 통치가 부과되는 경우, 한국인은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H. 요약하면, 현재의 조건과 정책하에서 미국의 한국 점령은 극동에서 미국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정치⋅경제적 심연의 끝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조치 및 미국이 남한에서 빠른 시일 내에 완전한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은, 이와 같은 표류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긴요한 일입니다. 특히 긴급히 요구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 통일을 위한 38도선 장벽의 철폐.

(2) '신탁 통치'를 포기한다는 명백한 성명.

(3) 한국에 있는 이전 일본의 소유였던 재산의 지위 및 이에 적용될 배상 문제에 관한 적극적인 정책 성명.

(4) 전술한 조치를 수반하는 한국 독립에 대한 연합국 공약의 재확인.

(5) 언론과 민중, 국무성, 육군성 및 연합국의 심중에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완전 분리 의식을 심어 줄 것.

현 조건 하에서 올바른 조치가 조만간 전혀 취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소 양군은 한국으로부터 동시 철군해야 하고, 한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며, 불가피한 내부적 혼란도 한국의 자체 정화에 맡겨 둔다는 내용의 대소 협정을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을 본관은 계속 건의할 것입니다.

(출처: 김국태 편, 『해방 3년과 미국 I』 돌베개, 169~172쪽)

1)미 육군 태평양 방면 군사령관 명의의 포고문 1호와 2호에는 전승군(戰勝軍) 사령관으로서의 정복자적인 태도가 포고문 전반에 스며 있다.
2)점령 직후 미 군정의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보고서는 어느 것이나 한국의 혁명적 열기, 특히 좌익 세력의 활성화와 조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3)미 군정 관리는 미군의 물리력이 없었더라면 인민 공화국 세력은 어느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4)이 전문에서 맥아더는 미주에는 임정(臨政)과 협조하기 원하는 약 50인 가량의 보수적 인사들이 있으며, 중경(重慶)에도 그 정도의 숫자가 있으니 필요하면 이들을 개인 자격으로 보내겠다며 논평을 부탁하였다.
5)미 군정 고문 회의는 9명의 ‘저명한 보수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김성수(金性洙), 김용무(金用茂), 김동원(金東元), 송진우(宋鎭禹), 이용설(李容卨), 강병순(姜柄順), 오영수(吳泳秀), 윤기익(尹基益), 전용순(全用淳)으로 모두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애초에 미 군정은 11명을 임명하였는데, 조만식(曺晩植)은 북한에 있어 참석할 수 없었고, 여운형(呂運亨)은 고문 회의가 우익에 편중되었다는 점을 들어 임명을 거부하였다.
6)맥클로이는 하지의 이승만, 김구 활용 구상을 반대하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를 논박하며 하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7)김구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11월 26일의 기자 회견장에서 하지는 그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하였으며, 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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