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
  • 3) 좌익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지지 선언

좌익은 삼상 회의 이전에는 반탁 의사를 표명해 왔지만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이 국내에 보도되자 대중들의 반탁 정서와 우익 측의 반탁 운동을 의식하면서 신중하게 반응했다. 삼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진 이후 임정이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며 반탁 운동을 강화하는 가운데 좌익 계열은 1945년 12월 30일 별도로 반 파쇼 공동 투쟁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2월 31일에 신탁 통치 철폐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12월 31일에는 홍남표, 홍증식, 이강국, 정백으로 구성된 조선 인민 공화국(이하 ‘인공’) 대표 4인이 성주식, 장건상, 최동오 3인으로 구성된 임정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조선 민족 통일을 위하여 인공과 임정을 모두 해체하고 통일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인공 측의 제안은 1946년 1월 1일 임정 국무 위원인 최동오에게 전달되었는데 임정 측은 이를 서식상 접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환하였다. 하지만 비등한 민족 통일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지 임정 측은 1월 2일 인공 측 제안을 다시 검토하고, “성의 있는 태도로 합작에 임할 것”을 원칙적으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인공 측은 1월 3일에 다시 회담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임정 주석 김구가 임정을 확대 강화하여 통일 정권을 수립하자고 제안하면서 양측의 통일 공작을 무위로 돌리자, 마침내 1월 6일 인공과 임정 간의 회합이 결렬되며 통일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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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회의 결정 지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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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삼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전달된 1945년 연말 시점에서 좌익의 삼상 회의에 대한 대응은 1946년 1월 1일 조선 인민 공화국 중앙 인민 위원회가 내건 “신탁 문제의 해결은 민족 통일 전선 결성으로”라는 슬로건에 집약되어 있다. 좌익은 철시, 파업과 같은 강렬한 반탁 운동을 통하여 대중들의 반탁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반탁 운동의 주도권을 잡아 가던 임정 측의 전술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한편, 반탁 구호를 분명히 내세우지 않은 채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민족 통일 전선의 결성이라는 원칙적 입장만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정서적으로는 반탁에 기울고 있었으나 삼상 회의 결정의 진의와 소련 측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좌익은 1946년 1월 2일 인공 중앙 인민 위원회가 미⋅영⋅중⋅소 4개국에 삼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전문을 보내고, 조선 공산당도 1월 3일자 성명에서 지지 노선을 밝히자 종전의 애매했던 태도를 버리고 삼상 회의 결정 지지 노선을 명백히 하게 되었다. 조선 공산당의 성명은 탁치는 식민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탁치 자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비록 즉시 절대 독립 허용은 ... 승인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 식민지화의 위험이 제거되고 ... 자주 독립이 성립될 수 있는 보장을 얻은 것은 ... 커다란 전진”이라고 쓰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즉시 독립을 신탁을 거친 독립보다 선호하지만 탁치가 독립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방책이기에 이를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또 신탁이 거론되는 원인이 민족 통일이 달성되지 못한 데 있으므로 반탁 운동을 민족 통일 전선 결성 운동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하였다. 좌익은 대중들의 반탁 정서를 의식하여 찬탁이라는 표현을 삼가는 대신 삼상 회의 결정 지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월 3일 좌익은 서울시 인민 위원회, 정 연합회(町聯合會), 반 파쇼 투쟁 위원회 공동 주최로 탁치 반대 민족 통일 촉성 시민 대회를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반탁 노선을 삼상 결정 지지 노선으로 선회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사료 4-3-0120〕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인공 중앙 인민 위원회의 결정서(1945. 1. 4)

“조선의 해방이 우리 민족의 분열로 인하여 자력으로 그 길이 열리지 못하고 연합국의 원조 밑에서 국제 문제의 해결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어 우리의 완전 독립을 획득하는 데 수많은 국제적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모스크바 회담이 조선 민족 해방에 대하여 가지는 의의를 지극히 크게 평가하여, 그 규정과 이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째로, 그것은 카이로⋅포츠담 양 회담의 구체화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의 독립은 이 회담에서 약속되었으나 그것은 시기도 방법도 결정되지 않은 추상적이요 막연한 것이었다. 이후의 국제 문제 해결과 조선 민족의 노력에 의하여 이번 모스크바 회담에서 건립의 범위와 방법이 처음으로 구체적 결정을 보게 되었다. 즉 적당한 시기가 최고 5년이 되었고, 적당한 순서가 신탁 제도를 거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소위 배신 행위나 기만도 아니요, 하등의 국제법 위반도 아니다.

둘째로, 공동 위원회는 그 존재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일소하고 조선의 자유 독립 국가 건설을 원조⋅촉진하는 데 사명이 있는 한 완전히 진보적 의사를 갖는다. 또 신탁 제도 역시 그 내용이 조선 독립을 달성하는 순서상 과도적 방도인 한 충분히 진보적 역할을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 전진이다. 그것은 을사조약이나 위임 통치와는 전연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신탁과도 아주 판이할 것이다.

셋째로, 이번 신탁 제도는 그 책임이 3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우리 민족 자신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적 필연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치 못하여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이 함부로 날뛰고 민족은 분열되어 파시스트 데마고그(Demagogue)가 민중의 일부를 현혹하고 반역적 자본가의 태업, 모리배의 준동으로 경제 부흥은 곤경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3국으로 하여금 우리가 갈망하는 완전 독립을 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세를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모아 이상과 같은 규정과 자기 비판을 세우고 이번 모스크바 회담의 진보적 역할과 현 단계에서의 그 필연성, 정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신탁 통치를 규정하여 문제를 해소하고 완전 독립을 하루라도 속히 달성하는 유일 최선의 방도는, 무모한 반탁 운동이나 연합국 배척, 독선, 전제, 테러, 폭행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 정세의 몽매에서 기인하는 민족 자멸책이다. 우리는 도리어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여 공동 위원회 및 기타 제 기관에 호의적으로 협력하고, 임시적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을 촉진하는 유일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지에서 중앙 인민 위원회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강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정보 부족으로 인하여 지난날에 범한 오류, 반신탁의 태도를 솔직히 극복하고서 신탁 반대 위원회를 해산하고 세계 민주주의의 원칙과 합치되는 강력한 민족 전선에 총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모스크바 회담 결정에 의한 모든 국제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천하에 명시한다.”

조선 인민 공화국 중앙 인민 위원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 공산당의 방향 전환은 당내로부터도 반발이 적지 않았고, 당시 우익 정치 지도자들은 좌익의 방향 전환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들은 좌익을 ‘국론 통일의 교란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좌익 노선은 즉시 독립을 열망하는 대중들을 설득시키기에도 어려움이 많았고, 우익은 그들의 반탁 운동을 활용하여 일시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 군정은 박헌영⋅존스턴 기자 회견 사건에서 살펴보듯이 좌익의 궁색한 입장을 이용하여 조선 공산당을 소련의 앞잡이로 몰아가는 공작을 서슴지 않았다. 좌익은 1946년 1월 하순 소련의 타스 통신이 삼상 회의의 협상 전말을 공개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대중적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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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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