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의 주도세력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 집단과 부여계의 남하 집단과의 융합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하천과 계곡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나(那)’라고 하는 작은 정치 단위들의 상호 협력과 정복 과정을 통해 국가를 형성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전하는 건국 설화에 따르면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朱蒙)이다.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이고, 어머니는 물을 다스리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고 전한다. 유화는 부모의 허락 없이 해모수와 정을 통하여 쫓겨났다가 부여의 왕인 금와왕(金蛙王)에게 거두어졌다. 부여 왕궁에 머물게 된 유화의 몸에는 햇빛이 따라 다니며 비추었는데 이 때문에 임신이 되었다. 유화는 얼마 후 사람이 아닌 알을 낳았고,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바로 주몽이다. 주몽은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고 재주가 뛰어나 부여의 왕자 대소(帶素) 등에게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함을 알고,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주몽은 기원전 37년 졸본천(卒本川)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원래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松讓王)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타고난 재주와 권능으로 제압하였고, 이후 주변국들에 대한 정복 활동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기원전 19년(동명성왕 19) 부여에 남겨 두고 왔던 부인과 함께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오자 태자로 임명하였고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건국 설화의 내용은 상당 부분 부여의 건국 설화인 동명 설화를 차용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집단이 부여의 건국 설화를 차용해 사용했다는 것도 생각하기 힘들다. 부여계 집단이 남하하여 고구려라는 정치 집단을 형성하는 데 참여한 것은 사실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고구려 5부 중 ‘계루부(桂婁部)’가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부명이다. 『삼국지』나 『후한서』에 따르면 다른 부들은 모두 ‘○奴部’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계루부만은 예외이다. 이를 통해 계루부가 나머지 네 부와는 출자 계통이 다소 달랐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부여계 집단이 대규모로 남하했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부여의 중심지인 길림(吉林) 지역과 고구려 중심지인 압록강 중상류 지역은 무덤 양식이 서로 다른데, 부여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돌널무덤(石棺墓)을 조성하다가 철기시대에는 움무덤(土壙墓)을 조성하였다. 반면 압록강 중상류에서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전반까지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주된 무덤 양식이었고, 돌널무덤이나 움무덤은 조성되지는 않았다. 만약 부여계 집단이 대규모로 남하했다면 압록강 중상류에서도 돌널무덤이나 움무덤이 조성되었어야 하는데, 그러한 양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부여 계통 집단의 남하는 오랜 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것이었고 토착 집단과의 융합과 동화 현상을 거치며 진행되었기에 급격한 고고학적 변동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유적이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던 환인(桓仁) 지역의 망강루 고분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고구려 특유의 초기 무기단 돌무지무덤에서 부여계 귀고리 장식이 출토된 바 있다. 이는 부여계 집단과 고구려 토착 집단의 교류와 융합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한편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는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며, 말이나 풍속이 부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종’이라는 것은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새로운 지파를 의미하는데, 이는 고구려 건국 설화의 내용과도 부합한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는 부여 종족에 대해 예족(濊族)라고 서술하고 있는 반면 고구려에 대해서는 맥족(貊族)으로 서술하여 다소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중국 사서인 『후한서』에서도 고구려는 맥족(貊族)으로 규정되어 있는 동시에 동예(東濊)와 같은 종족이라는 서술이 공존하기도 한다.
예족은 북만주의 지린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였던 족속이다. 기록에 따라 ‘예(濊)’라 표기하기도 하고, ‘예(穢)’라 표기하기도 한다. 그중 일부가 분화하여 고구려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점차 맥족이라고 구분해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맥족인 고구려를 예족인 부여의 별종이라고 서술하거나, 동예와 같은 족속이라고 하는 등의 기록이 남았던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는 과거 어느 단계에서 분화되기는 하였으나 원래 같은 족속이었기 때문에 재차 융합하는 과정에서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라는 말에서 어간이 되는 것은 원래 ‘구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後漢書)』에 ‘구려(句驪)’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으며 전한(前漢) 왕조를 끝내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공격해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죽인 후 하구려후(下句驪侯)라고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를 통해 ‘구려’가 기본이 되는 말이고, 그 앞의 ‘고’는 수식하여 붙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원래 성(城)을 ‘구루(溝漊)’나 ‘홀(忽)’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라는 국명은 ‘큰 고을’, ‘높은 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는 원래 ‘나(那)’라고 하는 다수의 지역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하천과 골짜기를 기준으로 주거하며 집단을 형성하였고, 상호 연합과 무력을 통한 복속 등의 정치적 변동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부여계 이주 세력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의 나 집단들은 최종적으로 다섯 개의 정치 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이 고구려 5부이다. 5부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계루부는 왕을 배출하는 한편, 외교와 전쟁 등 대외적인 권한을 독점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계루부를 대표하는 부의 장이면서, 동시에 5개 부 전체와 고구려를 대표하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외교나 전쟁과 같은 대외 교섭권은 왕에게 위임되었지만, 각각의 부는 부 내의 자치권을 보장받았고, 부의 장은 각기 독립적인 관원들을 둘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태조대왕(太祖大王)대인 72년(태조대왕 20)과 74년(태조대왕 22) 5부의 구성원인 관나부(貫那部)와 환나부(桓那部)가 각각 조나(藻那)와 주나(朱那)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후 더 이상 비슷한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태조대왕 대에 독립적인 정치 집단인 나 세력들에 대한 편제가 사실상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보면 고구려는 기원전에 현도군 축출을 거치며 나 정치 집단 간의 결합 등 정치적 성장을 이어나가다가 1세기 중후반 경 5부를 중심으로 한 통합적인 국가 체제 확립에 도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