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국보 제24호 석굴암(石窟庵)은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로 불국사(佛國寺)의 부속 암자이다. 8세기 중엽 신라인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불국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석굴암은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일한 인조 석굴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크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토함산을 불국토로 구현하고자 했던 김대성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어 당대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석굴암은 고대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석굴이라는 점과 함께 불교 조각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석굴암은 조선시대까지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그 원형이 잘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0~1920년대에 일제에 의해 중수가 시작될 당시에는 석굴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해체·복원공사 이후 석굴암에는 누수·결로 등 보존상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해방 이후 1960년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에는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사(石佛寺)을 창건하여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대성은 745년(경덕왕 4)~750년(경덕왕 9)에 중시(中侍)를 역임한 진골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문량(金文亮) 또한 706년(성덕왕 5)~711년(성덕왕 10)에 중시직을 맡아 국정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김대성은 진골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중시직 사임 후에 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이라는 대규모의 불사(佛事)를 거행한 것이다.
이때 석굴암의 창건 연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현전하는 사료에서 석굴암 공사 시작 과 완공 시기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사중기(寺中記)’에 따르면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774년(혜공왕 10)에 김대성이 죽자 국가가 불국사를 완성시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1966년 석가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묵서지편(墨書紙片)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에 의하면 무구정광탑(석가탑)이 742년(경덕왕 1)에 조성되어 혜공왕 때(765~780)에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석굴암의 공사가 시작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불국사가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와 같다고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대성효이세부모」에서 김대성이 석불사 천장의 천개석(天蓋石)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천개석을 만들려고 한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깨지는 바람에 김대성이 안타까워하며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 천개석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이에 천개석 조성을 석굴암 공사의 마지막 단계였다고 추론하여 석굴암이 김대성 생전에 완공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석굴암이 위치한 토함산은 신라 오악(五岳) 중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삼국유사』의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에서 탈해(脫解)가 신하에게 물을 떠 오라고 했던 동악의 요내정(遥乃井)은 석굴암에 있는 샘물과 연결되어 토함산의 신성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석굴암은 정면으로 동해를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여 본존불(本尊佛)의 방위각이 일출 각도와 거의 일치한다. 이를 바탕으로 석굴암을 고대 태양 숭배 신앙과 관련짓기도 한다.
이러한 토함산의 신성성을 생각해보면 석굴암이 단순히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김대성의 발원으로 지어진 개인 원찰(願刹)이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또한 석굴암과 불국사의 조성은 고도의 기술과 막대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대규모 불사였다. 따라서 석굴암과 불국사는 당시 왕실의 영향을 받아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원찰 또는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석굴암이 단순히 개인의 원찰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은 김대성이 경덕왕 때 고승 표훈(表訓)과 긴밀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대성은 신라 의상(義湘)의 제자로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했다고 알려진 승려 신림(神琳)과 표훈을 불국사와 석굴암에 머무르게 하였다. 표훈은 천궁을 왕래하며 경덕왕의 후사 문제를 해결해 준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로, 국가적으로 추앙받던 승려였다. 이러한 표훈에게 김대성이 직접 찾아가 화엄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경덕왕 때는 여러 사찰 창건과 다양한 불교 공예품 제작 등 많은 불사 활동이 거행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덕왕의 깊은 불심이 석굴암 조성에 크게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곧 석굴암의 창건 배경에는 김대성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 고승인 표훈과 왕실이 모두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김대성이 죽고 난 이후 국가가 불국사를 대신 완공시켰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석굴암의 창건 주체들과 관련하여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김대성이 표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석굴암에 부처의 영역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김대성은 표훈에게 배운 화엄의 가르침을 석굴암과 불국사에 반영하여 표훈의 화엄 세계를 조성하였다. 그는 불국사에 조성한 여러 부처와 보살들을 모신 불전을 통해 다양한 불국토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다음으로 석굴암에는 부처가 깨달은 직후의 모습을 형상화한 본존불을 봉안하여 부처의 영역을 구현하였다. 이를 통해 토함산을 하나의 화엄 세계로 만들고자 한 김대성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주로 돌을 뚫고 들어가는 개착식(開鑿式) 석굴이 조성되지만, 한국은 인도·중국과 암석의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석굴의 조성 방식이 달랐다. 돌을 쌓는 조적식(造積式) 석굴인 석굴암은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본존불이 있는 원형의 주실(主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인 비도(扉道)가 있다. 석굴암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 좌우에는 각각 4구씩의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 비도 입구 좌우에는 2구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비도의 좁아지는 부분의 좌우에는 2구씩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주실 입구의 좌우에는 팔각형 돌기둥이 각각 세워져 있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앙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본존불의 뒤쪽 벽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거대한 원형 연판(蓮瓣)이 있다. 정면에서 연판을 보면 본존불의 광배(光背)처럼 보인다. 또한 주실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벽면에 보살상 및 범천상(梵天像), 제석천상(帝釋天像),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 등이 조각되어 있다. 연판 위쪽 벽에는 열 개의 작은 감실이 있고 각각 보살상들이 놓여 있는데, 그중 2구의 조각상은 현재 사라진 상태이다.
이러한 석굴암의 구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이국적인 요소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우선 석굴암 본존불의 경우 그 모델이 인도에 위치한 사찰의 불상으로 지목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당(唐)의 승려 현장(玄奬)이 저술한 인도 순례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인도 보드가야 대각사(大覺寺)의 성도상(成道像)을 서술한 부분과 관련된다. 이 성도상의 형태를 살펴보면, 석굴암 본존불과 동일하게 불상이 동쪽을 향하고 있고, 수인의 종류와 불상의 높이, 어깨·무릎의 폭이 모두 서로 일치한다. 이를 통해 석굴암에 나타나는 인도적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석굴암 주실의 원형 평면과 둥근 형태의 천장인 돔 구조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건축 양식으로 이국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원형은 보통 태양과 하늘, 완전함과 영원함을 상징한다. 예부터 원형 평면은 동아시아에서 특별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한편 인도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원형 평면 건축물이 확인된다. 사리를 보관하는 스투파의 형태를 따라 원형 평면의 건축인 탑당(塔堂)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굴암은 중국, 나아가 인도의 이국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에 독창적인 형태로 구현된 최고의 인조 석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