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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李子淵]

엄정한 법집행을 추구했던 명문가의 정치가

1003년(목종 6) ~ 1061년(문종 15)

이자연 대표 이미지

이자연 묘지명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이자연(李子淵)은 11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고려 시대의 정치가였다. 현종(顯宗) 때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정계에 들어온 후, 문종(文宗) 시대까지 정계에서 중책을 맡았다. 또한 세 딸이 문종의 후비(后妃)가 되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명문가를 이루었다.

2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명문가, 이자연의 집안

이자연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볼 때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그의 집안이다. 이자연의 집안은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문벌(門閥)로 지칭되는 당대의 명문가였기 때문이다. 이자연의 아버지쪽은 인주(仁州) 이씨로, 신라 시대 이래로 인주 즉 지금의 인천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집안이라고 한다. 경원(慶源) 이씨로 불리기도 한다. 아버지 이한(李翰)은 고위직인 정2품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할아버지 이허겸(李許謙)은 중추부사 이부시랑(中樞副使 吏部侍郞)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허겸은 김은부라는 이를 사위로 삼았다. 김은부는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로 재임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이자연 집안의 운명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거란은 이미 993년(성종 12)에 고려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이 1차 전쟁은 서희(徐熙)의 협상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고려 내부에서 강조(康兆)의 정변이 일어나 국왕이 교체되고, 여진과의 갈등 속에서 이 사실이 거란에 알려지면서 1010년(현종 1)에 다시 거란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이를 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로 이 1010년(현종 1)의 전쟁에서 김은부의 이름이 역사서에 크게 등장하게 된다.

전쟁 초반, 강조가 이끌고 간 30만의 주력군이 격파당하면서 고려의 방어 전선은 붕괴되었다. 강조에 의해 옹립된 새 국왕 현종은 개경(開京)을 포기하고 부랴부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신하들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심지어 이곳저곳에서 무시를 당하고 위협까지 당하는 처지였다. 이 때 거의 유일하게 현종을 환대하며 정중하게 모신 지방관이 바로 김은부였다. 공주를 지나 더 남쪽까지 내려갔다가 거란과 화의를 맺고 올라오던 현종은 공주를 지나며 김은부의 큰 딸을 연경원주(延慶院主)로 맞이했다. 바로 훗날 덕종(德宗)·정종(靖宗)·인평왕후(仁平王后)·경숙공주(景肅公主)를 낳는 왕비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현종은 김은부의 두 딸을 더 후비로 맞이하여, 문종 등의 자식을 얻었다. 김은부의 지위는 하늘을 찔렀고, 그 장인인 이허겸도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候) 식읍 1,500호에 봉해졌다. 이허겸의 딸이자 김은부의 부인인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은 바로 이자연의 고모로, 현종의 장모이자 덕종·정종·문종의 외할머니라는 대단한 지위에 올랐다.

이렇듯 이자연의 집안은 이미 현종대 이래로 당대의 명문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개인이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의 집안은 물론 아들 내외 및 딸 내외의 집안과 깊은 유대 관계를 가졌던 고려 시대의 시대상을 감안할 때, 그의 집안이 차지했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잠시 시계를 빨리 돌려 문종대와 그 이후로 가보자.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을 후비로 맞이하였다. 이들은 『고려사』에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로 기록되었다. 문종의 뒤를 잇는 순종(順宗)·선종(宣宗)·숙종(肅宗)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등이 바로 인예태후의 자식들이다. 이자연은 문종의 장인이자 태자의 외할아버지라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또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에 오르거나 불교계에 출가하여 고승이 되었다. 이 아들들이 다른 문벌의 딸과 혼인을 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들이 또 고위 관직에 오르며 이자연의 후손들은 날로 번창하였다. 이자연의 동생인 이자상(李子祥)의 후손들도 역시 고위 관직에 오르거나 왕실과 혼인을 하였다. 이렇게 몇 대에 걸쳐 고관대작을 지내고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또 의천과 소현(韶顯), 세량(世良), 의장(義莊) 등 자손들이 불교계의 고위직에 올라가며 이자연의 집안은 대표적인 문벌로 자리를 잡았다. 후손 중에는 정변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으나, 명문가의 가풍은 면면히 흘러 고려 후기까지도 명망 있는 정치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3 법과 제도를 중시했던 정치 활동

이렇듯 이자연의 집안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에 가리어 정작 이자연 본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덜 주목하게 될 수 있다. 『고려사』나 그의 묘지명 등에서 이자연의 삶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문벌 이자연’이 아닌 ‘정치가 이자연’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실 이자연은 1024년(현종 15) 3월의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왕명으로 내려가는 글을 짓는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했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문장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법과 제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였던 정치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지명과 열전 모두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여 서술하였다. 묘지명에서는 덕종대에 그가 형부(刑部)와 이부(吏部)의 원외랑(員外郞)과 이부낭중 어사잡단 좌부승선(吏部郞中 御史雜端 左副承宣)으로 재직하였을 때 ‘억울하고 정체된 옥사를 정밀히 결단하여 ▨하고, 전형(銓衡)의 권한을 바로 들어 잘못됨이 없었으며, 추상같은 법망을 다시 엄하게 펴서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라고 묘사하였다. 젊은 시절의 이러한 면모는 그의 정치활동 내내 계속되었던 것 같다. 1055년(문종 9) 재상급인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 상소를 올려 ‘천지의 재앙과 상서로움은 매번 형정(刑政)의 잘 잘못과 상응하니, 상과 벌은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살펴보면, 이부(吏部)와 형부(刑部)는 변별하여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하지만 나날이 느슨해져 지체시키고 미처 처결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라고 하며, 관리들의 근태를 잘 살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자연은 개인의 사정을 참작하여 관대하게 결정하는 것보다 규정에 따라 처리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내놓곤 하였다. 위에 나온 묘사나 상소문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가령 1058년(문종 12) 5월에 문종과 고위 신료들이 모여 열린 어전 회의의 한 토막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시 두 가지 사안이 논의되었다. 하나는 어머니의 혈통에 당시의 관습 및 법규상 하자가 있었던 유중경(庾仲卿)이라는 사람에게 음서로 관직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였다. 이자연은 그에 대하여 위의 하자가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시기를 전후로 근친 간 혼인으로 인해 태어난 자식에게는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제가 논의되고 있었던 점과 관련이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과거 시험에 10번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한 강사후(康師厚)라는 사람에게 은사(恩賜) 급제를 내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에 대해서 이자연은 기존에 내려진 세 차례의 왕명을 근거로 그는 은사 급제의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협박치사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논의할 때에도 이자연은 가해자의 범위를 넓게 잡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할 때 관련 지역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이들을 불쌍히 여겨 부역을 감면해 주자는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그가 법과 제도에 충실하려 했다는 것이 반드시 가혹한 쪽으로 집행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자연은 문종대에 옛 제도에 따라 사직단(社稷壇)을 새로 짓는 일을 감독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내용이 묘지명에 전한다. 또 『파한집』에는 이자연이 송에 사신으로 다녀와 감로사(甘露寺)의 절경을 보고 감동을 받아, 뱃사공에게 고려에서 이런 경치를 찾게 하여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역시 감로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때 그는 재물을 내어 절을 지으면서, 누각과 연못과 대(臺)를 모두 송나라 감로사의 것을 따라 짓게 하였다고 한다. 건축물을 지을 때에도 그의 성향이 충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자연은 1061년(문종 15) 8월,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 문종은 애도를 표하며 중신을 보내 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 1086년(선종 3) 2월, 국왕 선종은 이자연을 선왕 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문종의 중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벌을 형성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자연. 훗날 그의 손자인 이자의(李資儀)는 종실인 계림공(鷄林松), 즉 숙종이 되는 인물과의 권력 다툼에 패해 반역자로 제거가 된다. 또 다른 손자인 이자겸(李資謙)은 예종(睿宗)의 장인이 되고,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외손자 인종(仁宗)의 후견인이 되어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가 역시 제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권력의 핵심부에 다가섰던 이자연의 집안이기에, 그만큼 권력에 도취하는 인물도 나오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생겼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자연 본인의 삶에서는 오히려 법과 질서에 충실하려 했던 정치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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