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6년(고종 23) ~ 1308년(충렬왕 복위 10)
고려의 제25대 왕인 충렬왕은 1236년(고종 23) 원종[고려](元宗)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의 사위로 추밀부사를 지낸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이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즉위해 1308년(충렬왕 34) 사망하기까지 34년간 재위했다.
이 시기 고려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벌어졌다. 100년가량 계속되었던 무신집권기는 몽골이 마지막 무신집정인 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부자를 제거하면서 끝이 났다. 정권은 다시 국왕에게 돌아갔으나, 이것이 고려 전기처럼 국왕이 중심이 되고 조정이 작동하는 모습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몽골이라는 전대미문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고려의 정치에 깊숙이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충렬왕은 이 복잡한 시기에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정립하고 국왕권을 재구축하는 데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측근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행하여 폐단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또한 재위 후반기에는 아들인 충선왕과 정쟁을 벌인 끝에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다시 즉위하는 등 기존에 없었던 사건의 중심에 섰다. 이는 달라진 권력구조 아래에서 변하게 된 국왕 위상의 단면과 그로 인한 정치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충렬왕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자매로, 종실의 딸인 경창궁주(慶昌宮主) 소생의 시양후(始陽侯), 순안공(順安公), 경안궁주(慶安宮主), 함녕궁주(咸寧宮主)가 있다. 처음 이름은 왕심(王諶), 왕춘(王賰)이었으며 후에 이름을 고쳐 왕거(昛)라 했다. 부인으로는 몽골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종실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의 딸인 정화궁주(貞和宮主), 김양감(金良鑑)의 딸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있었다. 자녀는 제국대장공주 소생의 충선왕(忠宣王), 정화궁주 소생의 강양공(江陽公), 서자인 왕서(王湑) 등 세 명의 아들과 정화궁주 소생의 두 딸, 정녕원비(靖寧院妃)와 명순원비(明順院妃)가 있다.
충렬왕은 무신집권기와 원간섭기라는, 고려 정치사에서 매우 특별한 두 시기가 연결되는 역동적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충렬왕 자신이 무신집권기에서 원간섭기로의 전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중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즉위 이전에도 태손, 세자로서 정치 경험이 있었다. 1259년(고종 46)에 당시 태자였던 원종이 강화를 위해 몽골에 가 있던 중 고종[고려](高宗)이 사망하자, 충렬왕은 고종의 유지에 따라 태손으로서 임시로 국사를 대리했다. 원종이 귀국해 즉위한 후 1260년(원종 원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의 정치활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표면화된 계기는 1269년(원종 10) 원종폐위 사건에서였다. 고려의 세자로서 숙위생활을 하기 위해 몽골에 갔던 세자 왕심은 1269년(원종 10) 4월, 귀국길에 아버지인 원종이 당시 무신집권자였던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다시 몽골로 가서 황제에게 임연의 군대를 제압할 군사를 보내줄 것을 청함과 동시에, 황실의 딸과 혼인하게 해줄 것을 청했다.
1259년(고종 46)에 강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여러 가지 몽골의 요구사항들을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았던 고려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몽골은 고려의 일개 신하가 몽골의 칸이 임명한 국왕을 폐위시켰다는 소식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세자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해 원종을 복위시키는 한편, 몽골 황실과 고려왕실의 통혼을 허락했다. 세자 왕심과 쿠빌라이의 딸 쿠틀룩켈미쉬의 통혼은 1274년(원종 15)에 이루어졌다.
세자의 적극적 대응과 몽골의 개입으로 원종은 폐위 5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1258년(고종 45)에 최씨정권이 종식된 이후로도 김준(金俊), 임연(林衍) 등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던 무신집권기의 권력구조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1269년(원종 10)의 원종 복위 과정을 통해 고려의 국왕과 신료들은 이제 몽골 황제의 권력이 고려 국왕의 입지를 크게 좌우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 국왕과 몽골 황제의 관계는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 간 통혼이 성사되자 더욱 분명해졌다. 몽골 황실 부마로서의 고려 국왕의 권력과 권위는 곧 몽골 황실, 황제의 권력과 권위와 직결되어 그에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는 세자 왕심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1272년(원종 13)에 몽골 황실과의 통혼을 허락받고 귀국한 세자는 몽골인들의 머리모양인 변발을 하고 그들의 의복인 호복을 입고 왔다. 그는 스스로 변발과 호복을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신료들에게도 이를 강요하여, 1278년(충렬왕 4)에는 전국에 명을 내려 모두 몽골의 의복과 관(冠)을 쓰도록 했다. 이러한 충렬왕의 행동은 인공수(印公秀)가 몽골의 제도에 따라 변발과 호복을 시행할 것을 누차 권했음에도 “하루아침에 조상 전래의 가풍을 바꾸지 못하겠다”고 했던 원종의 태도와는 상반된다.
세자 왕심, 즉 충렬왕의 변발과 호복은 착용은 무신집권자의 권력을 압도하는 몽골황제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고 통혼을 통해 황제와 매우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한눈에 강조할 수 있는 장치였다. 고려 국왕과 신료들이 모두 변발과 호복을 착용하면서 몽골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질서 안에 실질적으로 포함되었음을 상호 인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정점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국왕의 권위 역시 고려 내에서는 최고라는 사실을 서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충렬왕은 즉위 이후에도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몽골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우선 충렬왕은 국왕이 직접 몽골황제를 만나기 위해 몽골에 가는, 친조(親朝)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는 몽골이 정복지에 요구했던 사안들 가운데 하나로, 몽골 황제는 친조를 통해 정복지의 수장들의 복속을 분명히 확인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정복된 지역의 수장들은 몽골 황제 및 몽골 조정의 주요 인물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중요한 현안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그의 재위기간동안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청하여 빈번하게 친조하였다. 1278년(충렬왕 4)에는 친조를 앞두고는 “조근(朝覲)은 제후가 위를 섬기는 예절”이라고 하며 이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부왕인 원종대까지만 하더라도 고려 국왕과 신료들이 국왕의 친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충렬왕이 친조를 통해 거둔 성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278년(충렬왕 4) 친조에서의 성과이다. 이때의 친조는 전년인 1277년(충렬왕 3)에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 등이 김방경(金方慶)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무고하여 촉발된 일련의 사건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충렬왕은 김방경의 혐의를 벗기고 그간 고려에 부담이 되어 왔던 여러 사안들을 해결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예컨대, 충렬왕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던 일본원정 준비를 위해 고려에 와 있었던 몽골의 동정원수부 및 그 휘하 군대를 철수시켰다. 당시 동정원수부를 지휘하던 흔도와 홍다구(洪茶丘)는 군사 관련 업무뿐 아니라 국사에까지 간여하였다. 특히 홍다구는 1218년(고종 5)에 몽골군이 강동성(江東城) 전투를 위해 고려에 왔을 때 몽골에 투항했던 홍대순(洪大純)의 후손으로, 대표적 부원세력이었다. 그런데 충렬왕이 친조를 통해 이들을 몽골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고려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몽골은 이때까지 고려에 두었던 감독관인 다루가치도 소환했다. 이로써 고려에는 더 이상 몽골의 군대나 관리가 상주하면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고려 국왕이 자체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278년(충렬왕 4) 충렬왕 친조의 성과는 그가 몽골황제 세조 쿠빌라이의 부마였다는 점, 그러한 관계를 통해 쿠빌라이에게 신뢰를 줄 수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담도 동반되었다. 그간 동정원수부 및 몽골의 군대가 담당하고 있던 일본원정 준비를 이제 몽골 황실의 부마인 충렬왕이 주도하여 준비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280년(충렬왕 6)에 일본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승상에 임명되기를 자청했다. 실제 일본원정은 1281년(충렬왕 7)의 제2차 원정이 마지막이었으나, 1294년(충렬왕 20)에 쿠빌라이가 사망하여 사실상 일본원정이 포기되기 전까지 원정 준비를 위한 인력과 물자의 제공에 대한 부담이 계속되었다.
이외에도 충렬왕은 1290년(충렬왕 16)에 쿠빌라이에게 직접 요청하여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된 지역을 돌려받고 이곳에 서경유수관을 설치했다. 1269년(원종 10)에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자비령(慈悲嶺) 이북 지역을 들고 몽골에 투항하자 1270년(원종 11)에 동녕부가 설치되어 몽골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후 원종이 반환을 요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이때에 와서 반환된 것이다.
한편, 원종폐위 사건과 복위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후로서의 위상도 더욱 분명해졌다. 이전 시기 고려 국왕의 제후로서의 위상은 외교적 질서 상에서만 의미를 갖았으나 몽골과의 관계에서는 몽골황제권이 고려 내에서도 실질적 권력과 권위를 갖게 되면서 고려 국왕의 제후로서의 위상 또한 현실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우선 고려의 관제 등 형식적 측면에서 확인된다. 1275년(충렬왕 원년)에 몽골은 고려에 관제를 개편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충렬왕은 몽골의 관제와 유사한 고려의 관제의 격을 하향 조정하는 방향으로 관제개편을 단행했다. 또한 묘호, 의식, 의복, 왕실 용어 등이 격하되면서 고려는 제후국으로 강등되었고 더불어 고려 국왕의 위상 역시 제후화했다.
제후 위상의 실질화는 실제 정치의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고려 국왕에 대한 몽골황제의 ‘책봉’이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몽골 황제와의 관계에 따라, 혹은 고려 국왕 통치능력상의 문제에 따라 고려 국왕은 몽골황제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실제 정치의 측면에서 제후화한 고려 국왕의 위상은 초반에는 고려 국왕이나 신료들에게 분명히 인지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렬왕 재위 중반 이후, 세조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성종 테무르가 즉위하면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보다 분명히 고려사회에 인식되었다.
1294년(충렬왕 20)에 몽골의 세조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성종이 즉위하는 정국 변동 속에서 고려-몽골 관계는 일시 경색되었다.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성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충렬왕이 반대 세력을 지지했을 가능성, 그리고 제국대장공주와 성종의 아버지의 어머니가 다르다는 점 등이 그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경색되었던 고려-몽골 관계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세자 왕장(뒤의 충선왕)과 성종의 조카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간 통혼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회복되었다.
한편, 세자 왕장이 고려-몽골 관계에서 고려 측 주체가 되면서 고려 내에서도 그 정치적 위상이 부각되었고, 그와 함께 충렬왕의 정치운영에 대한 비판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280년(충렬왕 6)에 감찰사 관원들이 간쟁으로 처벌받은 후 보이지 않았던 국왕의 정치운영에 대한 비판이 다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그를 가능하게 한 것이 세자의 정치적 부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1297년(충렬왕 23) 5월 제국대장공주의 사망과 뒤이은 7월의 옥사는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 움직임과 세자의 정치적 부상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세자는 공주의 사망 원인이 충렬왕의 측근세력에 있다고 판단하여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던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陶成器), 최세연(崔世延) 등을 죽이고 그 일당 40명을 귀양보냈다. 같은 해 8월과 10월, 12월, 세자가 주도한 세 차례의 인사를 통해 정치세력 재편이 이루어졌다. 10월 충렬왕은 국왕위를 세자에게 넘길 것을 몽골에 청했다. 이때의 표문은 직전에 세자의 사부로 임명되었던 정가신(鄭可臣)이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 중 충렬왕의 본의가 아닌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충렬왕의 선위는 일차적으로는 몽골 황실·황제와의 관계 변화에서 강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이루어진 세자 중심의 고려 내 정치세력 재편에서 비롯된 내부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1298년(충렬왕 24) 1월에 충선왕이 즉위했지만, 충선왕은 즉위 후 7개월 만에 폐위되었다. 여기에는 그가 즉위 후 단행한 관제개편이 몽골에 참월하게 인식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와 불화하고 조인규(趙仁規)의 딸인 조비를 총애한 데에서 비롯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이 원인이 되었다. 공주가 이를 몽골에 알림으로써 결국 충선왕은 폐위되었고,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다.
이렇게 충선왕이 즉위 7개월 만에 몽골에 의해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되는 과정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고려 국왕과 신료들은 고려의 국왕이 몽골황제권에 기반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몽골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경우 황제에 의해 실제 폐위가 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이 과정은 한 차례 왕위에서 물러났던 국왕이 다시 복위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충선왕에 대한 불신으로 충렬왕을 복위시켰으나, 몽골은 충렬왕에 대해서도 이전과 같은 신임을 보이지 않았다. 몽골 성종은 평장사 쿠쿠추(闊闊出)와 좌승 카산(哈散)을 보내 충렬왕과 함께 나랏일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러한 가운데 1299년(충렬왕 25) 1월 초에는, 충선왕을 지지했던 인후(印侯), 김흔(金忻), 원경(元卿) 등이 충렬왕의 측근 한희유(韓希愈)가 충렬왕과 함께 몽골에 대한 반역을 도모했다는 무고를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에 한희유 등 10여명을 체포하고 이를 카산에게 고하였다. 이른바 ‘한희유 무고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이를 접한 후 귀국한 카산은 왕이 그 신하들을 제어하지 못하니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함께 다스리도록 할 것을 청했고, 이에 따라 몽골에서는 활리길사(闊里吉思)를 정동행중서성평장정사(征東行中書省平章事)로, 야율희일(耶律希逸)을 정동행중서성좌승(征東行中書省左丞)으로 임명해 보냈다. 활리길사는 고려 관리들을 처벌하는 등 사법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고려의 제도들을 변경하려 하는 등 복위 직후 충렬왕이 국정을 주도하는 데에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노비법을 변경하려 했던 것이 고려 측의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서, 1301년(충렬왕 27) 3월에 파직되어 몽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충렬왕은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음을 경계해야 했다. 이에 충렬왕 측근세력들은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를 다른 왕실 인물인 왕전(王琠)과 재혼시키려 하였다. 충선왕과 몽골 황실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그가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을 없애려는 시도였다. 1305년(충렬왕 31) 11월, 충렬왕은 직접 왕유소(王維紹), 송방영(宋邦英), 송린(宋璘), 한신(韓愼) 등 측근세력들을 이끌고 몽골로 갔다. 이에 폐위 이후 몽골에서 숙위 중이던 충선왕은 홍자번(洪子蕃) 등 자신의 지지세력들도 함께 몽골에 오도록 했다. 이들은 몽골 조정에서 공주의 재혼 및 충렬왕 부자의 관계를 두고 열띤 정쟁을 벌였다.
이 정쟁은 결국 1306년(충렬왕 32)에 몽골이 충선왕 세력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끝나게 되고, 충선왕은 이후 고려국정을 장악했다. 같은 시기에 몽골에서는 성종이 사망한 후 무종(武宗)이 즉위했는데, 그 과정에서 있었던 즉위 경쟁 과정에서 충선왕이 공을 세웠던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실권을 잃은 상태에서 국왕위에 있었던 충렬왕은 얼마 후인 1308년(충렬왕 34)에 사망했고, 충선왕이 복위했다.
충렬왕의 능인 경릉(慶陵)은 개성에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