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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丙寅迫害]]

최후의 천주교 박해,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다

1866년(고종 3) ~ 1873년(고종 10)

병인박해 대표 이미지

치명일기

e뮤지엄(국립한글박물관)

1 개요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조선에서 자행된 천주교 박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최후의 박해이다. 1866년(고종 3) 병인년에 시작되어 병인박해라고 불리며, 그 여파는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의 실각까지 장장 8년간 지속되었다. 병인박해의 발생은 대내적으로 누적된 천주교 사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금지령이 본질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해를 직접적으로 촉발한 원인은 첫째, 변경에 접근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세력을 이용하려다가 중지된 점, 둘째,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선택으로 천주교를 박해한 점을 들 수 있다. 병인박해는 1866년 봄을 시작으로 이후 3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1866년 여름 병인양요(丙寅洋擾)에 대한 보복으로 천주교 신자를 대대적으로 처단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는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 이후 천주교 신자를 박해하였다. 마지막으로 1871년(고종 8)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에 대한 반작용으로 박해를 가했다.

1868년과 1871년은 별도의 사건으로 무진사옥, 신미사옥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병인박해의 영향 하에서 자행된 연속된 사건으로, 병인박해의 일부로 지칭되고 있다. 이러한 병인박해는 1873년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가 단행되면서 박해는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2 병인박해의 근본적 배경

천주교 박해의 근본 원인은 ‘세계관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천주교는 조선에서 종교적으로 신봉되던 성리학과 질적으로 달랐다. 성리학의 윤리는 군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강조한다. 반면, 천주교에서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절대적이다. 부모나 군주보다 하나님에 대해 강한 믿음을 주장한 천주교는 성리학의 신봉자들에게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는 패륜적 사상이라고 강하게 비판을 받는다. 하나님에 대한 숭배 이외에 조상에 대한 제사를 부정한 것도 조선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더욱이 신분제를 부정하고 평등을 주창한 천주교는 성리학의 양반, 평민, 노비의 계급론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부분이었다. 천주교도들은 실제로 노비를 해방하며 신분제를 부정해 당시 국가나 사회의 계급 요소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가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요인이 된다.

한편, 국가에서는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헌종대 반포되었던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를 배척한 국가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개국 이념인 성리학을 수호하고, 이단인 천주교를 배척하라는 지시를 담아 임금의 명령으로 ‘척사윤음’을 전국에 내렸고, 이에 따라 일반 백성들조차 천주교는 배척해야 할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에 다수의 성리학자들은 척사론(斥邪論)을 표방하며 천주교에 대한 부정을 공공연히 표방하고 있었다. 척사에 관한 다수의 상소문을 올려 국가적 차원에서 배격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기까지 조선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천주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병인박해가 발생하고 또 그것이 지속적으로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사상적 요인이 내재해 있던 것이다. 더욱이 병인박해가 발생한 즈음에는 고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권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정책들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사상으로 인식된 천주교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3 박해의 직접적 원인

병인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촉발시킨 것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이다. 1858년(철종 9) 6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텐진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연히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는 관계가 설정되었다. 1864년(고종 1)부터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진행하였고, 육로를 통해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과 대왕대비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이때 승지(承旨) 남종삼(南鍾三)이 적극적으로 프랑스와의 수교를 통한 러시아의 견제를 건의하였다. 이는 천주교도였던 김면주(金勉柱)나 홍봉주(洪鳳周), 그리고 조선에 체류해 있던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Berneux ; 장경일(張敬一)) 주교가 천주교의 선교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방책에서 제시한 것이다.

조선에 거주하던 천주교도들은 조선이 프랑스, 영국과 함께 삼국동맹을 맺으면, 러시아가 조선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는 방책을 흥선대원군에게 제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가 러시아를 견제한다면 천주교 선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해주겠다는 암시를 주었다. 이에 흥선대원군과의 만남을 통해 동맹을 주선하기 위해 지방에서 포교를 하고 있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서울로 급히 올라왔다. 그러나 지방에서 서울로 오기까지 한 달이 경과되면서 흥선대원군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1866년 1월에 북경에서 조선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이후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는 프랑스의 이 끔찍한 살육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프랑스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던 대원군을 압박하였다. 도성 내에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끌어들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고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당시 대왕대비와 조정 대신들 역시 흥선대원군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두었다. 결국 대왕대비와 연맹하여 권력을 행사했던 흥선대원군도 프랑스나 천주교도들과의 관계가 이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더욱이,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이후 지속되지 않으면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종결되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기로 결심하였다. 병인박해는 이렇게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결정으로 시작되었다.

4 병인박해의 전개 과정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조선 정부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병인박해는 8년의 기간 동안 총 4차례에 걸쳐 일어난 박해를 총칭하여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866년 봄 병인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후 1866년 가을의 박해, 1868년 발생한 무진사옥, 마지막으로 1871년 단행된 신미사옥까지가 모두 병인박해의 하나였다.

병인박해는 1866년 1월, 러시아의 남하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선택, 그리고 누적된 천주교에 대한 반감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시작으로, 1866년 1월 프랑스와 협력해야 한다던 남종삼의 체포를 명하였다. 이어 그 정책을 제의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고, 홍봉주와 이선이도 붙잡혔다. 이때 주교를 비롯하여 선교사들과 신자들 다수가 처형당했다. 특히,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신부 12명 가운데 9명이 처형당했다. 서양인 선교자가 조선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신자들도 다수 처형당했다. 프랑스 선교사 3명은 도망갔지만,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중앙 정부는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들에게 연안 지방의 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곳이 천주교도들이 드나드는 골목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추적 과정에서도 많은 수의 천주교인들이 희생당하였다. 천주교 서적들도 다수 불태워졌다. 대왕대비는 천주교 신자를 고발하면 포상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도망갔던 프랑스 신부들은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들 가운데 리델 신부는 중국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프랑스 대리공사인 벨로네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실상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벨로네는 조선에 전쟁을 선포하고, 조선 국왕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한편으로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연락하여, 해군함대를 조선에 보내 전쟁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들은 곧장 강화도로 해군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이 함선에는 리델(Ridel ; 이복명(李福明)) 신부가 타고 있었다.

1866년 9월 시작된 프랑스의 침략은 11월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주요 시설에 방화하고, 다량의 서적과 보물들을 약탈하여 청으로 돌아갔다. 조선으로서는 그나마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가해 퇴각을 이끌어냈다. 조선에서는 곧바로 병인양요를 일으킨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다.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천주교인들에게 있다고 단언하고 이들에 대한 박해를 가했다. 병인양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 이의송 등을 효수하였다.

이후 소강 상태였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1868년(고종 5) 다시 시작되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알려진 남연군묘의 도굴 시도가 발생했고, 정부에서는 이것 역시 천주교도들의 소행으로 간주하였다. 천주교 신자 장치선(張致善)과 최영준(崔英俊)이 공개 처형되었으며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묘가 있던 내포 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준 일당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1871년까지 이어져 조사가 지속되었으며, 무진사옥(戊辰死獄)이라 별도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선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어 병인박해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71년에는 미국의 배가 평양으로 들어오며 교섭을 요청한 제너럴샤먼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국의 통상 교섭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사실 천주교도와 직접적 관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이를 천주교도들에 의해 발생한 교섭으로 인식하고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명령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사옥(辛未死獄)이라고 별도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병인박해의 연속이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1866년을 시작으로 1871년까지 지속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에 가서야 마무리되었다. 장장 8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이 기간 8천 명이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리델 신부가 조선 신자로부터 들었던 소문으로, 실제 순교자는 최대 4천 5백여 명일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많은 희생자들이 충청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외에 서울과 경기 지역에도 있었다.

5 병인박해의 결과와 영향

병인박해는 1873년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종결되었다. 병인박해는 조선후기 지속된 다양한 형태의 천주교 탄압의 종착점이자, 최대 규모로 발생하였다. 특히, 앞서 발생했던 여러 천주교 박해와 달리 정치세력 간의 정쟁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와 같은 서구 열강들의 침입과 이에 대한 대항의 과정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훨씬 더 큰 피해를 가져왔다. 병인박해는 정쟁의 희생양으로 천주교도를 탄압한 것이 아니라, 외국 열강의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단행되었던 만큼 훨씬 많은 사람이 연루되었다. 병인박해 당시에 독실한 천주교도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어서 한국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였다.

병인박해로 인한 프랑스와 조선과의 외교적 단절은 1886년(고종 23)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회복되었다.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미국, 러시아, 청 등의 국가와 근대적인 조약을 차례로 체결하였는데 프랑스와의 조약 역시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천주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되면서 더 이상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1890년(고종 27) 주교였던 뮈텔은 병인박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이후 근거 자료로 활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치명일기(致命日記)』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자료에 근거하여 1968년에 병인박해의 순교자 가운데 24명이 복자(福者)로 정식으로 추숭되었다. 1984년에는 이들을 성인(聖人)으로 올려 그 희생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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