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금위영

금위영[禁衛營]

숙종, 금위영 창설로 오군영을 완성하다

1682년(숙종 8) ~ 1895년(고종 32)

1 개요

금위영(禁衛營)은 조선 숙종대 창설된 중앙군영의 하나이다. 조선후기 중앙군제의 핵심을 이루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과 함께 ‘오군영(五軍營)’의 하나로 불렸다. 도성 방어에 있어서는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금위영은 숙종 초년 정초청(精抄廳)과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통합하여 하나의 군영을 만든 것이다. 1881년(고종 18) 장어영(壯禦營)에 흡수되고 1895년(고종 32) 완전히 혁파될 때까지 조선후기 도성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군사기구였다. 주로 한양 도성의 방어와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등 궁성의 수비, 국왕 행차 시에 신변 경호 등의 업무를 맡았다.

2 정초청과 훈련별대를 통합해 금위영을 설치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전기의 군사제도였던 ‘오위(五衛)’체제가 붕괴하고, 이를 대신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이후 어영청과 수어청, 총융청이 차례로 설치되어 조선후기 중앙군을 구성하였다. 금위영은 이들 오군영 가운데는 가장 마지막에 창설되었다. 1682년(숙종 8) 정초청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만들었다.

정초청은 본래 인조 연간에 도성 방어와 숙위를 목적으로 경기도의 속오군(束伍軍) 가운데 우수한 기병을 선별하여 만든 부대로, 정초군이라 불렸다. 이후 현종대를 거치면서 군사의 수가 급증하였으며, 정초청이란 명칭의 독립 군영으로 설립되었다. 숙종대 금위영에 통합되기 직전에는 정초청의 보인(保人, 정군에게 딸린 경제적 보조자)이 12,474명에 이르렀다.

훈련별대는 1669년(현종 10) 창설된 부대이다. 중앙 군영 가운데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유일하게 상비군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이 심했다. 조정에서는 훈련도감 역시 다른 군영과 동일하게 번상(番上)으로 운영할 것을 요구하였다. 번상은 지방 농민들이 돌아가면서 서울로 올라와 군역을 지는 것으로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결국에는 훈련도감을 없애지 못했다. 대신 별도로 훈련도감 산하에 번상으로 운영되는 훈련별대를 만들었다.

1682년(숙종 8)에 이르러 정초청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정식 군영의 형태로 금위영을 창설하였다. 금위영의 창설에는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비용 감소의 논리였다. 현종부터 숙종 초년의 시기는 극심한 재해로 중앙의 재원이 많이 부족해지고 백성들의 삶도 척박한 시기였다. 이러한 가운데 효종부터 현종 시기까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장으로 군사 재정의 부담 역시 심화되었다. 따라서 금위영의 창설은 정초청과 훈련별대라는 두 개의 군영을 하나로 통합하여 군사 경비를 절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둘째, 도성의 수비 강화라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설치되었다. 금위영은 어영청과 동일한 운영체제와 조직구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영청과 함께 도성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수어청과 총융청은 경기 지방의 수호를 위해 외방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반면, 훈련도감과 어영청은 한양 도성을 사수하였다. 여기에 금위영이 새롭게 설치되면서 ‘삼군문’이 연립하며 방어하는 ‘도성방어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금위영의 창설은 정치적 원인도 있었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김석주(金錫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병조는 군사문제를 다루는 핵심 기구이지만, 군영은 병조의 산하가 아닌 독립된 기구로서 존재했다. 그런데 김석주는 병조판서가 직접 통솔할 수 있는 군대의 조직을 원했고, 금위영은 병조판서가 겸임으로 관장하면서 병조 산하의 군영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82년(숙종 8) 금위영은 창설되었지만 병조 산하에 있어서 완전한 독립 군영은 아니었다. 금위영은 1754년(영조 30)에야 다른 군영과 마찬가지로 ‘대장(大將)’을 병조판서가 겸임하지 않게 되었고, 이때부터 독립 군영으로서 완전하게 자리 잡았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삼군문의 하나로 중앙의 핵심 군영 역할을 하였던 금위영은 1881년(고종 18) 장어영에 흡수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군제 개편 때 완전히 혁파되었다.

3 한양 도성을 수호하고 궁궐을 수비하다

금위영은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한양 도성을 수비하는 업무가 가장 중요하였고, 궁궐을 지키고[숙위(宿衛)] 주변을 경호하였다[순라(巡邏)]. 고종대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금위영의 업무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도성과 궁성의 수비, 궁성의 파수(把守), 도성과 궁성의 순라, 군포팔처(軍鋪八處)의 호위, 척후(斥候)와 복병(伏兵), 금송(禁松), 준천(濬川), 착호(捉虎)의 업무가 확인된다. 이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첫째, 도성과 궁성의 수비, 파수와 순라이다. 도성은 4대문으로 둘러싸인 성곽으로 한양의 경계이기도 하다. 도성은 금위영이 훈련도감, 어영청과 나누어 함께 지켰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는 도성의 방어를 3개 군영이 어떻게 분담했는지 알려준다. 금위영은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부터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까지를 지켰다. 그리고 동궐(東闕)인 창덕궁과 창경궁, 서궐(西闕)인 경희궁의 성벽을 도성과 같은 방식으로 3개의 군문에서 나누어 지켰다.

둘째, 척후와 복병이다. 척후와 복병은 국왕의 행차를 호위하며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대비하는 것이다. 국왕이 도성 밖에서 숙박할 때는 척후병을 보내 경계를 강화하였고 혹시 모를 변란에 대비해 복병하는 군사들을 두었다.

셋째, 금송, 준천, 착호이다. 이는 정기적인 업무가 아닌 비정기적으로 담당한 잡무이다. 금송은 도성 주변의 목재를 벌목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말한다. 준천은 도성에 흐르는 청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수시로 강을 파내는 일을 말한다. 착호는 도성 주변에 호랑이가 나올 경우 이를 잡는 것을 말한다.

4 금위영의 관료 조직과 군대 편성

금위영은 중앙관서이면서 군영이었기 때문에 두 개의 조직구조를 가졌다. 하나는 중앙 관원으로서 양반관료의 조직이고, 또 하나는 병력의 편성구조이다.

우선, 중앙 관원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정1품 도제조 1명, 병조판서가 겸임하는 정2품 제조 1명, 종2품의 대장 1명, 종2품의 중군(中軍) 1명, 정3품의 별장(別將) 1명, 정3품의 천총(千摠) 4명, 정3품의 기사장(騎士將) 3명, 종4품의 파총(把摠) 5명, 종4품의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2명, 종9품의 초관(哨官) 41명이다. 또한, 종6품의 종사관(從事官) 2명, 교련관(敎鍊官) 12명, 기패관(旗牌官) 10명 등이 있었다. 이들은 편성된 부대의 지휘관 역할을 하였고 병력의 교육훈련을 전담하였으며 정예군으로서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였다.

도제조와 제조는 겸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금위영의 책임자는 종2품의 금위대장이라 할 수 있다. 금위대장은 어영청, 훈련도감의 대장과 함께 군문의 책임자로서 주로 유능한 무신 집안의 사람을 선출하거나 왕실과 외척을 맺고 있던 인물, 아니면 국가에 공을 세운 공신의 자손이 대장에 선발될 수 있었다.

둘째, 병력의 편성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처음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했을 때에는 금위영에 5부 20사 105초로 편제하고, 이들을 10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번상하게 하였다. 이후 수효가 증가해 5부 25사 125초에 평안도 아병(牙兵) 10초와 별중초(別中哨) 1초를 포함해 136초로 편제되었다. 1초에 대략 127명이 편성되기 때문에 군인의 정액은 17,000여 명으로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전체 인원수이고, 실제로 근무한 군인의 수효는 훨씬 적었다. 금위영의 군인은 대부분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개도의 향군(鄕軍)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25번으로 나뉘어 교대로 올라와 근무하였다. 즉, 125초에서 25번마다 올라왔으므로 한 번에 올라오는 향군의 수는 5초에 불과했다. 당시 1초의 인원이 127명이었기 때문에 635명 가량이 올라와서 업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향군의 경우에만 한정한 것인데, 금위영은 향군 외에도 향기사(鄕騎士), 별파진(別破陣), 공장아병(工匠牙兵) 등 다양한 종류의 병종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번상하고 있었다. 경기사(京騎士)와 같은 병종은 상비군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양에 올라온 금위영 군사들의 수와 성격을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