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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조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다

미상

1 개요

의병은 국가 또는 왕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기하거나 국가의 소집에 응한 병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국가 또는 왕조에 위협을 가하는 세력이 반드시 외국군일 필요는 없으며,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일체의 군사 행동도 모두 의병의 범주에 들어간다. ‘의병’이라는 말의 뜻은 ‘의로운 군병’ 또는 ‘의를 위해 일어난 군병’으로, 거기에는 자신은 의롭고 자신이 대적하는 상대방은 불의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의병’은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나와 남, 선과 악의 구분이 미리 전제되어 있는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용어로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의병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는 조선 중기의 전란기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한말의 두 시기이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의병의 역할이 부각되는 전쟁인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를 중심으로 의병의 의미와 실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임진 의병 활동의 배경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 배경에는 초기 전투에서 관군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상황이 놓여있다. 그것은 당시 조선 군사제도 자체의 결함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15세기 오위(五衛) 제도를 근간으로 성립된 병농일치적 군사제도는 군포(軍布)를 받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붕괴되었다. 군포제는 농민을 징집하는 대신 군포를 거두어 그것으로 급료병을 고용하는 병농분리적 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포 수입은 각 군영의 일반 경상비로 전용되거나 지휘관의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되었을 뿐, 군사제도는 공백에 놓여있었다.

조선은 이러한 상황에서 방위체제를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전의 지방 방위제도는 진관(鎭管) 체제로 각 도의 감사와 병사의 지휘 아래 각 고을의 수령이 각각 군직을 겸하면서 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체제였다. 하지만 농민의 동원이 어려워지자 제도 운영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개편된 제승방략 체제는 간헐적으로 국경을 침범하던 왜구(倭寇)나 여진족의 침투 경로 및 수단이 비교적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기에 적합한 체제였다. 곧 변경에서 군사적 상황이 발생한 경우 중앙에서 장수가 중앙군과 무기 등을 가지고 내려가 지방의 병·수사와 같이 군사를 나누어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 상황에서 적의 진격에 맞서 신속하게 중앙군을 파견할 수 없었고, 가까운 곳의 병사를 집중하여 구축한 방어선이 무너지는 경우 그것을 보완할 수단이 없었다. 소규모 국지전에 대응하는 체제로는 전면전을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군에 대한 관군의 초기 대응이 실패로 돌아가자 왜군은 조선군의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북진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장악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왜군은 후방의 요충지에 소수의 병력만 남긴 채 북진하였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 지역의 사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특히 왜군의 북상과 함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던 영남 지역은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郭再祐)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호남 지역은 영남에 비해 직접적인 왜군의 침탈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 봉기의 동기가 가족과 마을을 지킨다는 현실적인 필요보다는 임금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이념적인 측면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지역이든 의병을 이끈 지도부인 지방의 유력 사족들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근왕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의 침입에 대한 민족적 저항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인 지역을 방어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가지고 있었다.

3 지역별 주요 의병 활동

영남에서의 의병 활동은 경상우도의 조식(曺植) 문인들이 주도하였다. 곽재우는 왜란 발발 10일 후 의령(宜寧)에서 이미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의 의병은 전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의병이며, 정부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명령하기 전에 자생적으로 일어난 의병이다. 곽재우 의병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을 지켜냄으로써 왜군의 호남 진출을 차단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후 활동 범위를 넓혀 현풍(玄風)·창녕(昌寧) 등지에서 잇달아 왜군을 격파하였으며, 1592년 10월에는 제1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여 진주성 외곽에서 왜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도 경상우도 지역의 유력 사족으로서 정부의 의병 모집에 응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정인홍은 당시 58세의 고령이었지만 수천의 군사를 모았고, 손인갑(孫仁甲), 김준민(金俊民) 등 능력을 갖춘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정인홍의 의병은 무계(茂溪)·초계(草溪) 등지에서 승리한 다음 최경회(崔慶會) 등과 연합하여 개녕(開寧)·성주(星州) 등지의 왜군을 공격하였다.

김면은 고령(高靈)에서 기병하여 거창(居昌)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갈등 관계에 있었던 영남의 관군과 의병을 중재하여 내분을 수습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왜군과 싸우기도 전에 내분으로 와해될 위기를 맞았던 상황을 타개하여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끈 데에는 그의 공이 컸다. 이후 김면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경상우도의 군무를 총괄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다. 그밖에도 경상 좌도의 권응수(權應銖), 정대임(鄭大任), 정세아(鄭世雅), 조종도(趙宗道), 유종개(柳宗介), 김호(金虎) 등이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호남 지역의 의병 창의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광(李洸)이 호남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붕괴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관군이 붕괴하자 호남에서도 의병 창의의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옥과(玉果)의 유팽로(柳彭老)와 남원(南原)의 양대박(梁大撲)이 가장 먼저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호남 최대의 의병군을 구성한 인물은 고경명(高敬命)이었다. 그는 유팽로와 양대박의 의병을 비롯한 호남 각지의 의병을 모아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왜군과 대결하여 크게 패하였다.

고경명 의병은 비록 금산전투에서 패하였지만,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좌절시키는 데 일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후 고경명 의병의 막하 의병장들은 계속하여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의 맏아들 고종후(高從厚)가 광주(光州)에서 거병하였으며, 능주(綾州)의 최경회·문홍헌(文弘獻), 보성(寶城)의 임계영(任啓英), 남원(南原)의 변사정(邊士貞)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고경명과 함께 호남 의병의 한 축을 이루었던 인물은 김천일(金千鎰)이었다. 이항(李恒)의 문인이었던 김천일은 나주(羅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상하였다. 수원(水原)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공을 세운 뒤 김천일의 의병은 강화(江華)에 들어가 주둔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이후 왜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그들을 따라 남하하여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는 김천일을 비롯하여 황진(黃進), 최경회, 고종후, 민여운(閔汝雲), 변사정 등 호남 의병들이 다수 참전하였다. 비록 전투가 진주성의 함락으로 막을 내렸고,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왜군은 더 이상 호남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충청 지역의 의병장으로 유명한 사람은 조헌(趙憲)이다. 그는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報恩)을 거쳐 충청도 서남 지방에서 병사를 모집하였고, 승군장(僧軍長) 영규(靈圭)와 합세하여 청주(淸州)를 수복하였다. 청주성 수복 이후 북상하려던 조헌의 의병은 금산(錦山)을 통해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권율(權慄)과 함께 금산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약속대로 원병이 도착하지 않자 조헌의 의병은 오히려 왜군의 역습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헌과 7백 명의 용사 그리고 영규와 그 부하들까지 왜군과 혈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

한편 안성(安城)에서는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대적하고 있었는데, 홍언수가 죽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자 그 아들인 홍계남(洪季男)이 대신 의병을 이끌었다. 11 그는 양성(陽城), 용인 등 여러 고을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고, 안강현(安康縣)에 쳐들어온 적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자 추격하여 그들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황해도에서는 개성(開城)의 이정암(李廷馣)이 배천(白川)의 김덕성(金德誠), 박춘영(朴春榮)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정암의 의병 부대는 연안성(延安城)에서 일본군을 맞아 4일간의 공방전을 펼쳤다. 연안성의 전투 이후 적은 다시 연안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애초에 함경도는 국경인(鞠景仁)과 같은 반민(叛民)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들은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에 와 있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포로로 잡은 다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항복하고 그들을 넘겨주었다. 당시 북평사(北評事)로 있던 정문부(鄭文孚)는 종성(鐘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지역을 수복하였다. 그는 국세필(鞠世弼), 국경인, 정말수(鄭末守) 등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함경도로 진입하였던 왜군들을 남쪽으로 몰아내었다.

의병의 중심 세력은 전진 관료나 유생이었지만 그 일원으로서 승군(僧軍)의 역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 영규 외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전국 각 사찰에 격문을 띄워 승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그의 제자인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유정(惟政)은 관동에서 승군을 일으키는 등 전국에서 호응하여 승군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각 지방에서 봉기한 의병군에 가담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4 의병의 특성

1) 의병 창의의 주도층

의병 창의를 주도한 지도층을 살펴보면, 모두 각 지역의 명망 높은 유력 인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정인홍은 학자 출신에 나이가 많았지만 당시 경상우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명망가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또 다른 의병장인 김면의 경우도 조선 초기부터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고령 김씨 출신으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소유하고 있던 전형적인 재지사족이었다. 또한 정인홍, 김면,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들이 모두 조식의 문인으로서 학문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중요하다. 경상우도 지역에서 조식이 갖는 정치적·사상적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는데, 정인홍 등은 조식 문인들 사이에서 확고한 위상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향우도의 남명 문인들을 자신들의 휘하에 빠르게 결집할 수 있었다.

호남에서 창의한 의병장들도 대부분 문과 출신이거나 전직 관인인 지역의 명망가들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연합 의병의 성격을 가졌던 고경명과 김천일 부대의 지도층을 보면, 고경명, 유팽로, 양사형(楊士衡), 박광옥(朴光玉), 임계영, 최경회, 고종후 등이 문과 급제자이거나 지방관을 역임한 이들이었다. 호남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난 곳은 유학이 발달하고 유림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다. 전라도 의병 활동은 곧 호남 사림의 활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라도의 의병 지도층은 거의 대부분이 이항,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성혼(成渾), 박순(朴淳), 정철(鄭澈) 등의 문하에서 수업한 이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계, 학문적으로는 기호학파의 성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2) 의병 조직의 구성원

의병 조직은 크게 상층의 지도부와 하층의 일반 가담자로 구분할 수 있다. 상층의 지도부는 특정 의병장을 중심으로 결집한 사족의 연합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들 사족 연합은 학문적 교류, 통혼관계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영남의 의병은 남명 조식의 문인과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혼인을 통해 통혼권을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재지사족들은 성리학적 향촌 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서원 건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향촌 자치를 통해 지역민의 호응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의병을 일으키는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의병의 하층부를 구성하는 일반 의병의 경우 그 구성이 매우 복잡하였다. 명망 높은 의병장 아래 그들의 동족, 동계(洞契)의 유생, 가노(家奴), 농지를 매개로 맺어진 농민, 같은 마을이나 인근 마을의 장정 등이 모여 일반 의병을 구성하였다. 또한 상당수의 패잔병과 관군에서 투입한 자, 피난민인 부동자들이 가담하였다. 의병은 전투에 패배해도 벌을 받지 않는 반면 승리하여 공을 세우면 일반 관병보다 높은 상을 받기 때문에 패잔하여 흩어진 관병들이 의병에 가입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또 관군에 소속되면 전쟁터를 전전해야 하지만, 의병은 향리 방어에 그쳤다. 생명의 위협이 적고 고향에 머물 수 있으며 식량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의병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많았다.

3) 의병 활동의 범위

경상우도의 의병은 곽재우·정인홍·김면의 세 부대가 주력을 이루었고, 그밖에 초계의 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 고령의 김응성(金應聖), 성주의 문려(文勵)·이홍우(李弘宇) 등이 활동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각자의 주둔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곽재우 의병은 그 독립적인 성격이 더 강하였다. 이들은 연합 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각 부대별로 나름의 지휘 체계를 가지고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들은 권응수, 김호 등의 경상좌도 의병과도 별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향토방위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대부분 거주지를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에 활동하였다.

반면 호남 의병은 영남에 비해 부대의 규모가 컸고 그에 따른 조직과 지휘 체계가 초기부터 정비되어 있었다. 호남 의병은 주현 단위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조직을 이룬 다음, 유력 의병장을 중심으로 재결집하여 대규모의 부대를 결성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영남에 비해 훨씬 넓은 지역에서 의병 결집이 이루어졌다. 영남 의병이 지역 단위의 향토방위를 우선한 데 비해, 왜군의 직접 침입을 받지 않았던 호남 의병은 ‘근왕(勤王)’이 거병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의병 결집의 지역적 범위가 넓어졌고, 그 결과 의병 부대의 규모도 영남 의병보다 더 커지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호남 의병은 전라도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라도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호남 의병의 활동은 크게 근왕을 위해 서울·경기로 북상한 경우와 경상도로 진출해서 영남의 군대와 연합 작전을 펼친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고경명, 김천일의 의병 활동이고,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 1,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4) 의병과 관군의 관계

의병은 왜군의 공격에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임금에 대한 충성을 거병의 기치로 내걸고 나왔지만, 국가에 의해 장악되지 않은 무력으로서 언제든지 갈등 관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곽재우 의병이 부족한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관군이 도망가고 비어 있던 초계성(草溪城)의 병장기와 군량을 이용한 것 때문에 도적으로 오인 받은 것은 그러한 좋은 예이다. 또한 곽재우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수(金睟)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김수가 전쟁 초기 왜군에게 패배하고 도망친 사실을 들어 그를 비판하였고, 김수 또한 곽재우의 의병이 불순하다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두 사람의 갈등은 김성일(金誠一), 김면 등에 의해 조정될 수 있었지만 자칫하면 내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호남에서도 의병장 김천일이 선조(宣祖)의 파천 소식을 듣고 근왕군을 해산했던 전라도관찰사 이광을 비난했다가 고경명의 설득으로 자제한 일이 있었다. 이는 김수를 비난했던 곽재우와 비슷한 모습으로 큰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것은 의병과 조정 사이에 내재되었던 갈등이 불거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기본적으로 의병을 ‘사병(私兵)’적인 성격의 집단으로 보고, 잠재적으로는 조정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군사조직으로 생각하였다는 점을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국가는 의병장들이 군사를 일으키면 그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였다. 의병장들이 관직을 받게 되면 휘하의 의병들도 관군에 편입되었다. 영남의 의병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향토방위의 차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의병 활동의 사실이 알려진 이후 사후적으로 관직이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고, 호남 의병은 창의하는 당시부터 국가에 그 사실을 알리고 관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국가의 통제를 거부하는 일부 의병들은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제하거나, 인근 관군에게 예속시켰으며, 심한 경우 의병을 해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의병은 끈질기게 독자성을 확보하였는데, 그것은 의병의 독자성이 의병에 참여한 병사들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담보해 주었기 때문이다. 의병과 관군의 관계는 이분법적이거나 단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기존의 의병 연구가 임진왜란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는 인식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의병에 대비하여 초라하게 보이는 관군의 존재로 인해 당시 조선의 무능과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의 부재라는 측면을 과장하게 하는 그릇된 역사 인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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