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고종 32)
대한 제국 시기에는 재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두 개 있었다. 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탁지부이고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기관은 내장원이었다. 그런데 1901년에 들어서 탁지부의 재정이 어려워져 관리들의 봉급조차 주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탁지부에서는 하는 수 없이 내장원에서 돈을 꾸어다가 봉급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고종 은 즉각 탁지부에 명하여 내장원에서 꾸어간 돈은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이 탁지부는 공적인 것으로 본 반면에 내장원은 사유물로 여겨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내장원은 대한 제국 시기 고종 황제의 개인 금고나 다를 바 없었다.
대한 제국 시기 내장원은 고종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내장원은 1895년 4월 2일 반포된 궁내부관제에 의해 그 산하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이 관제에 따르면 내장원은 왕실의 보물과 대대로 전해져 오는 장원(莊園) 및 기타 재산을 보관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당시는 갑오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의정부와 궁내부를 구분하면서 국가 재정도 의정부 산하의 탁지부로 일원화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894년 6월 궁내부가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그 산하에 왕실의 경비 출납만을 담당하는 회계사(會計司)를 두었다. 이에 대해 왕실 측에서 반발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왕실의 사유재산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내장원을 신설한 것이다. 당초 개화파 정권은 이전의 내수사(內需司) 및 그에 소속해 있던 용동궁, 어의궁, 수진궁, 명례궁 등이 소관하는 재원을 관리하는 일만을 내장원에게 맡길 심산이었다.
따라서 개화파 정권은 내장원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내장원장에 대한 인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처음 내장원이 설치되었을 때에는 농상공부 협판이 내장원장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895년 9월 궁내부 회계원 출납사 주사로 있던 정병기(鄭秉岐)란 인물이 실질적인 첫 번째 내장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10일에는 궁내부관제를 개정하여 내장원(內藏院)을 내장사(內藏司)로 격하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처음 설치될 당시의 내장원의 면모는 대한 제국 시기 내장원의 그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내장원은 대한 제국 시기에 신중하지만 매우 착실히 위상이 강화되었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은 이후 현흥택(玄興澤)을 내장사장으로 임명하였다. 현흥택은 당시 내장원 장원사장(莊園司長)과 시위대 연대장을 역임하였으며 을미사변 직후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 시도한 춘생문사건에도 관여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고종은 가장 믿을만한 인물에게 내장사를 맡긴 것이다.
또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한 후 내장사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본격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1898년 12월 독립협회의 도전을 물리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1899년 8월 17일 선포한 대한국국제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한국국제를 선포한지 1주일 뒤인 8월 24일에 궁내부관제를 개정하여 내장사를 내장원으로 승격하였다. 갑오개혁기 개화파 정권이 격하한 것을 다시 원위치한 셈이다.
내장사가 내장원이 되면서 단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장원에서 관할하는 업무가 늘어났다. 사실 내장원 업무의 확대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고종은 1898년 6월 43개 군에 소재한 농상공부 소속 여러 광산을 궁내부로 이속하였으며 이 광산들을 내장사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또한 1899년 12월에는 내장원 내에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인삼과 관련된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인삼과 광산은 당시 가장 중요한 재정수입원이었다. 이러한 재정수입원을 내장사를 통해 왕실에서 직접 관할하겠다는 것이었다.
1899년 2월에는 내장원 내에 수륜과(水輪課)를 신설하였다. 수륜과란 전국의 황무지에 수차를 설치하여 관개를 하고 세금을 걷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황무지 개발권도 당시 새로운 재정수입원이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전국의 역둔토와 목장토를 내장원으로 이속시켜 이전부터 관장하고 있던 궁방전과 함께 관리하였다. 이밖에 어염세(魚鹽稅), 선세(船稅), 포사세(庖肆稅) 등 각종 잡세의 수세권도 내장원이 가져왔다. 고종은 이러한 방법으로 내장원을 통해서 재정수입원을 한 손에 틀어쥐려 하였다.
이렇게 내장원은 고종의 개인 금고가 되었는데 이의 대표로는 이용익(李容翊)을 들 수 있다. 고종 황제는 내장사를 내장원으로 승격시키기 전에 이미 그를 내장사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내장사가 내장원로 승격되자 곧바로 그를 내장원경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내 내장원경 자리를 지켰다.
이용익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이 광산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임오군란 당시 피난을 떠난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은 공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함경도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는데 그때마다 해당 지역의 광무감리(鑛務監理)를 겸임하였으며 그 역할을 잘 수행하여 신임을 얻고 있었다. 내장원의 재정수입원 가운데 하나가 광산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는 일찍부터 내장원과 관련 있는 관직을 역임하였던 셈이다.
이용익은 내장원경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대한 제국 정부의 돈줄을 쥐고 있었다. 그는 1897년 12월 29일 탁지부 전환국장에 임명되었다. 전환국은 신식 화폐를 주조하는 기관이었다. 이 기관에서 신식화폐인 백동화를 찍어내면 정부는 상당한 주조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물가가 올라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아가면서 정력적으로 백동화를 찍어내어 대한 제국 재정에 기여하였다.
고종은 이용익을 내장원경에 임명하면서 탁지부의 직무도 그대로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정부 재정과 황실 재정을 한손에 움켜쥐게 된 것이다. 대한 제국 정부는 이러한 재원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광무개혁이라고 하는데 이용익은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서울을 강점하면서부터 대한 제국의 황실과 정부는 단계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내장원도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해체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였다.
내장원 해체는 이용익을 몰아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2월 22일 일본으로 강제 압송되어 그해 연말까지 일본에 머물러야만 하였다. 그가 대한 제국의 국외중립 선언을 주도하는 등 일제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날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는 점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일본은 이용익을 몰아낸 뒤 곧바로 내장원의 문을 닫지는 않았다. 대신 인사를 통해서 내장원의 위상을 격하하였다. 1904년 2월 28일 이성렬(李聖烈)이 내장원경으로 임명된 이후 그해 연말까지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내장원경 자리를 거쳐 갔다. 한 달에 평균 너덧 번 내장원경이 바뀌었으니 임기를 채 열흘도 채우지 못하고 바뀐 셈이다. 내장원경에 임명된 인물들도 대부분 무명 인사들이었다. 내장원경 인사를 이렇게 하였으니 내장원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내장원 해체는 이듬해인 1905년 본격화되었다. 내장원은 이때 내장사와 경리원으로 쪼개졌다. 내장사는 황실의 보물과 회계를 맡아보도록 하였으며 경리원은 황실에서 대대로 전하는 장원(莊園), 광업, 인삼 관계의 정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은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대한 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심어 넣고 그로 하여금 이른바 재정정리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메가타의 재정정리의 핵심은 황실재정에 속했던 재정수입원을 대부분 정부재정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이 추진되면 황실재정은 양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도 나름대로 이에 저항하였다. 1905년 6월 24일 주일 공사 조민희에게 칙령을 보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요청하여 메가타로 하여금 내장원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고종의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리원에 소속되어 있던 역둔토의 세금을 탁지부로 이관하는 등 황실재정 해체를 밀어 붙였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한 후 해체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광업 관련 사무와 광산 관리권이 농상공부로 이관되었고 염세 선세 등 잡세가 폐지되거나 탁지부 등으로 이관되었다. 1907년 12월 경리원은 이러한 세원들을 모두 넘겨준 뒤 그 자체가 폐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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