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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농경

신석기인의 먹거리 혁신과 오곡

미상

신석기 시대 농경 대표 이미지

옥천 대천리 신석기유적 출토 탄화곡물

한남대학교 중앙박물관

1 개요 : 신석기 시대 농경을 바라보는 시각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에는 초보적인 농경이 행해졌다고 본다. 생업 활동 중 농경은 사전적 의미로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행위이다. 초보적인 농경이란 곡물을 자연 상태에서 채집하는 단계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이 작물의 재배를 위한 길들이기(순화) 과정에 관여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신석기 시대 시작부터 농경이 시작되어, 이른 시기의 괭이 농사, 중기에는 보습 농사로 발전되었다는 입장이다. 괭이 농사는 뒤지개나 괭이로 땅을 뒤지고 거기에 씨나 뿌리를 심는 원시적인 농사를 말하며, 유적에서 발견되는 괭이, 뒤지개 같은 도구들과 낟알이나 열매를 가공하는 갈판, 갈돌을 증거로 삼고 있다. 아울러 항구적인 정착 생활과 관련되는 움집과 대형 토기 및 저장 구덩이의 출현도 농경과 관련된다고 본다. 당시의 밭은 화전으로 일군 것으로 추정한다. 중기부터는 새로이 나타난 돌삽과 돌보습을 근거로 보습 농사를 상정하고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짓는 발전된 농법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늦은 시기에는 보습 농사를 바탕으로 곰배괭이가 호미로 이용되면서 김매기가 진행되었다고 본다.

두 번째는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채집과 어로로 생업을 영위하였으며, 농경은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괭이, 보습, 뒤지개 등은 농경 도구가 아니라 식물 뿌리를 캐거나 땅을 파는 데 이용된 도구로 파악하며, 갈판도 도토리 등의 야생 식료를 가공하는 데 이용한 것으로 본다.

세 번째는 절충적 입장으로 신석기 시대 중국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아 조와 기장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단순히 재배 식물이 존재한다고 하여 당시 사회를 농경사회로 볼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신석기 시대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조, 기장을 비롯한 쌀, 보리, 밀, 콩, 팥 등의 탄화 곡물이 다수 확인되면서, 신석기 시대 생업에 있어 농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다고 본다.

2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출토 곡물

1) 조와 기장
신석기 시대 출토 곡물 중 가장 많은 유적에서 확인된 것이 조와 기장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인들의 주요 먹거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대부분 북한 지역의 신석기 유적에서 탄화 곡물이 보고되었는데, 지탑리 유적에서 조 또는 피, 남경과 마산리 유적에서 조가 출토되었다. 남한에서는 김포 가현리에서 조 등의 탄화 곡물이 확인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부유선별법의 도입과 과학적 동정 결과로 남한 지역의 신석기 시대 중기 이후 대다수의 유적에서 조와 기장이 검출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옥천 대천리, 인천 중산동, 시흥 능곡동, 화성 석교리, 고성 문암리, 아산 장재리 안강골, 진주 상촌리, 진주 대평리, 진주 평거동, 부산 동삼동, 안산 대부북동, 양양 송전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중기에서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조와 기장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곡물을 가지고 절대연대(방사성탄소연대측정)를 측정한 값은 기원전 3,500년~2,500년에 해당한다. 또한 중산동과 대부북동, 문암리, 송전리 유적에서도 토기에 찍힌 조의 눌린 흔적이 탄화 곡물과 함께 확인되어, 신석기 시대 중기에 조와 기장이 주요 먹거리였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주사전자현미경을 이용한 눌린 흔적 관찰로 신석기 시대 곡물의 출현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다. 동삼동과 비봉리 유적의 이른 시기 토기에서 조와 기장의 눌린 흔적이 확인되면서, 잡곡 재배의 시작 연대가 기원전 5천 년까지 소급되고 있다.

2) 쌀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벼농사와 관련된 자료는 일산 지역의 토탄층 조사에서 처음 나왔다. 일산 1지역의 갈색 토탄층 시료를 물체질하여 볍씨 12알을 수습하였고, 2지역 1지구의 대화리층에서는 볍씨 10여 알이 검출되었다. 3지역의 갈색 토탄층과 대화리층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의 태토에서는 벼 규소체가 확인되었으며, 김포 가현리에서는 토탄을 부유선별법을 이용하여 벼, 조 등의 곡물을 확인하였다. 이들 유적에서 볍씨가 출토된 토탄층의 절대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3,000년~2,500년의 연대값이 측정되어, 적어도 신석기 시대 중기 이후에는 우리나라에 벼가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충주 조동리 출토 빗살무늬토기편의 바탕흙에서 벼의 규소체가 찾아졌고, 김해 농소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 가장 늦은 시기의 겹입술토기에서 벼와 기장족의 규소체가 확인되었다. 최근 진주 평거동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 35호 움구덩에서 벼 1알이 확인되었으며,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는 10호 야외 화덕시설의 돌 아래에서 탄화미 1알이 검출되어, 신석기 시대 벼농사의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벼농사와 관련하여 유력한 기원지 중 하나인 중국의 벼농사 관련 유적을 통해 보면, 기원전 6,000년경부터 초보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3,000년경에는 벼농사가 본격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벼농사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는 자료이다.

특히,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벼농사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유적이 바로 옥천 대천리 유적인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생활하였던 집자리에서 탄화된 쌀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신석기 시대 벼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적 작물이 아닌 특별한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본다.

3) 보리·밀과 콩·팥류
신석기 시대 곡물 중 맥(麥)류, 즉 보리와 밀의 경우는 최근 출토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맥류는 근동과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작물로 판단하여,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맥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밀의 경우 탄화 종자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남아시아 기원의 밀과 보리는 중국의 용산 문화 단계 이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고 우리나라에는 청동기 시대에 출현한다는 고정 관념 때문에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밀의 경우 후대 교란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예가 고성 문암리와 진주 평거동의 신석기 시대 유적 출토 밀의 경우이다.

그러나 옥천 대천리 유적 출토 밀에 대한 절대연대 측정 결과, 신석기 시대 곡물로 확인됨으로써 밀을 비롯한 신석기 시대 맥류를 먹거리로 활용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결국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의 신석기 시대 맥류 출토 현황을 통해 보면, 보리와 밀의 기원 혹은 전래 문제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성이 있게 되었다.

콩과 팥은 이미 5천 년 전 무렵부터 중국, 일본을 비롯한 우리나라에서 독자적 작물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진주 평거동, 시흥 능곡동, 고성 문암리, 창녕 비봉리, 진주 대평리 유적 등이 있다. 창녕 비봉리 제1조개더미층과 부석층에서 출토된 이른 시기 토기에서도 팥속의 눌린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능곡동 유적에서도 콩과 팥 종류의 종자가 검출되었다. 팥은 콩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어 온 중요한 작물이다. 작물종 팥과 같은 종에 속하는 야생 팥이 널리 자생한다는 점에 기초하여 동아시아 내의 특정 지역에서 작물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최근 유전학을 활용한 고고학 연구에서 우리나라가 콩 작물화 기원지 중 한 지역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진주 평거동 유적의 신석기 시대 늦은 시기에 속하는 유구에서 콩 종류의 종자가 다량 출토되어 콩과 팥이 식량 자원으로 이용되었고, 또한 재배를 통해 작물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토기 재료인 점토를 구덩이를 파고 모아둔 유구(토취장)에서는 다수의 신석기 시대 토기와 석기 조각이 섞인 상태로 조, 기장, 콩, 팥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평거동 유적에서 출토된 조, 팥, 콩을 시료로 측정된 방사성탄소 연대값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보면, 기원전 3,000년~2,500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양양 오산리 유적의 신석기 시대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에서 팥의 눌린 흔적이 확인되어, 기존의 연대보다 2,000년 이상 이른 시기에 팥이 순화 과정 중에 있었음이 밝혀져 신석기 시대의 농경 문제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3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농경의 과제

최근에는 고고학에서도 자연과학적 자료와 연구법을 전문적으로 이용하는 환경고고학, 특히 식물고고학 연구가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활성화되면서, 농경 출현과 확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농경 출현을 이제는 사건이 아닌 과정, 즉 식물의 관점에서는 야생종과 선재배종에서 재배종으로 변화, 인간의 관점에서는 야생의 자연 자원보다 인위적 간섭이 들어가는 관리 자원의 비중이 점차 증가해가는 농경화 과정으로 바라보는 추세이다.

신석기 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도구를 중심으로 가설 수준으로 진행되었던 연구가 이후 부유선별법에 의한 작물 유체의 분석, 토기에서의 누른 흔적(압흔) 분석 등의 방법을 도입하여, 최소한 신석기 시대 중기에는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작물 재배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신석기 시대 전기에 비해 정주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내륙으로 확산되는 신석기 시대 마을, 대용량 토기의 증가, 땅을 파는 데 사용하는 기경구, 식물성 먹거리를 거두어들이는 데 사용하는 수확구, 도토리나 알곡의 껍질을 벗기기 위한 제분구 등 석기의 등장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작물의 재배가 계획적인지, 아니면 국지적이면서 소규모 경작인지의 여지는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탄화 종자는 시대가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그 출토 양이 감소한다. 농경 개시의 규명을 위해서는 보다 오래된 유적에서의 탄화 종자가 찾아져야겠지만, 조사 대상이 오래되면 될수록 근거 자료인 탄화 종자의 검출은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천 대천리 유적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신석기 유적에서 다양한 종류의 탄화 곡물이 출토되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농경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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