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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각간의 난

신라 중대의 종말을 알리다

768년(혜공왕 4)

96각간의 난 대표 이미지

삼국유사(권2 기이 혜공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96각간(角干)의 난은 신라 혜공왕(惠恭王) 시대에 발생한 전국적인 대규모 반란이다. 일명 대공(大恭)의 난이라고도 한다. 혜공왕은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모후(母后)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攝政)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에 천재지변이 잇따라 발생하여 정국이 불안하였다. 대공과 그의 동생 대렴(大廉)을 위시한 불만 세력은 이를 기회로 반란을 일으켰다. 96각간의 난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국적인 반란이었다. 반란은 3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신라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반란 진압 이후 혜공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은 반란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고 정치적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혜공왕은 재위 14년(780)에 발생한 김지정(金志貞)의 난 중에 사망한다. 혜공왕의 사망으로 신라 중대는 종말을 고한다.

2 어린 왕의 즉위와 모후(母后)의 섭정(攝政)

신라 중대를 대표하는 군주 중 한 명인 경덕왕(景德王)은 자신의 형인 효성왕(孝成王)을 이어 즉위하여 24년간 신라를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계를 정비하여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으며 대규모 불사(佛事)를 진행하는 등 유능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덕왕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경덕왕 2년에는 왕비였던 삼모부인(三毛夫人)을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無子)로 출궁시키고 새로이 만월부인과 혼인하였다. 아들을 얻기 위해 새롭게 혼인을 하였으나 경덕왕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당시의 고승이었던 표훈에게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표훈이 하늘에 올라가 상제에게 고하자 상제는 딸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표훈이 이를 경덕왕에게 전하자 경덕왕은 나라가 위태로울지라도 아들을 얻길 바란다고 하였고, 결국 만월부인을 통해서 혜공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비록 불교적 색체가 가미되어 있는 설화적 내용이긴 하지만 경덕왕이 아들을 얻기 위해 힘써 노력했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경덕왕 17년 7월 23일, 경덕왕의 바람대로 왕자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경덕왕은 경덕왕 24년(765)에 사망함으로써 왕자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다. 경덕왕이 사망하자 경덕왕의 태자로서 왕위를 이은 이가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즉위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혜공왕의 모후인 만월부인이 혜공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혜공왕 즉위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은 어린 왕과 모후가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기에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먼저 선왕인 경덕왕 재위 말년부터 중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대하는 진골들이 등장함으로써 왕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왕권 강화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진골 귀족층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골품제(骨品制)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한계로부터 발생하는 진골들의 불만이 있었다. 골품제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혈연을 통한 신분 세습을 보장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대(代)를 지날수록 진골 계층의 숫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그들을 수용할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골이라 하더라도 주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신라의 경우 관직의 겸직이 허용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몇몇 진골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골품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한계는 권력에서 소외되는 진골 계층의 불만을 야기하였고, 이것은 권력 쟁탈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효성왕대(孝成王) 시대부터 왕실과 결혼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진골 세력이 왕비종당을 형성하면서 효성왕·경덕왕 시대에는 권력층의 범위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의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진골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들은 어린 혜공왕과 그의 모후인 만월부인이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불만이 극에 달한 진골들은 급기야대공과 그의 동생 대렴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3 96각간의 난 발발과 그 경과

혜공왕 즉위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예고하듯 천재지변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혜공왕 2년(766) 정월에 두 개의 해(日)가 동시에 나타났다. 동왕(同王) 2년 2월에는 양리공(良里公)의 집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 개였으며 다리 하나는 위로 뻗쳐있었다. 또 강주(康州)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 땅이 저절로 꺼져 못을 이루었다. 10월에는 하늘에서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왕 3년(767) 6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7월에는 별 세 개가 대궐 뜰에 떨어졌다.

96각간의 난이 발생하는 혜공왕 4년에도 다시 천재지변이 거듭되었다. 봄에는 혜성(彗星)이 동북쪽에서 나타났으며, 6월에는 경주에 우레와 우박이 내려 초목을 해쳤다. 황룡사 남쪽에는 큰 별이 떨어졌으며, 지진이 일어났고 우물과 샘이 다 말라버렸다. 또 호랑이가 궁중 속으로 들어와서 쫓아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특히 96각간의 난의 주모자인 대공의 집에는 수많은 참새가 모여들었다. 이와 같은 잇따른 천재지변의 발생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민심의 불안을 야기하였다.

혜공왕 4년(768) 7월 96각간의 난으로 알려진 대공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국적인 반란이었던 만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 뿐 아니라 『신당서(新唐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각 사서(史書)에서 기록된 반란의 양상은 큰 흐름에서 동일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나 발생 시점이나 대공의 관직 등 디테일 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발생 시점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혜공왕 3년 7월 3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혜공왕4년 7월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당의 사신 귀숭경(歸崇敬)이 혜공왕4년 여름에 신라에 와서 이 반란을 목격하였던 것일 가능성이 높아 난의 발생 시점은 『삼국사기』 기록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란의 주모자인 대공의 관직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라 최고 관등인 각간(角干)이 아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일길찬(一吉飡)이며, 함께 반란을 일으킨 대공의 동생 대렴(大廉)의 관직은 아찬(阿飡)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기록된 96각간이라는 표현 역시 96명의 각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간이 신라 최고위 관등이었던 만큼 각간 관등을 지닌 자가 96명이나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96각간이라는 표현은 각간 96명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당시 반란에 동조한 인원과 이를 진압하는 인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96각간의 난이 왕도(王都)였던 경주에서 뿐 아니라 5도(道) 주군(州郡)에서 함께 발생하여 96각간이 서로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신문왕 5년(685)에 9주 5소경 제도를 완비하였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표현된 이 ‘5도 주군’이라는 표현은 후대의 윤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는 성종(成宗) 시대에 한 개 내지 몇 개의 주를 묶어 한 개의 도를 이루게 하고 전국을 총 10도(道)로 나누었다. 따라서 10도는 전국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보면 96각간의 난에 기록된 5도라는 표현은 10도의 절반에 달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이 표현은 ‘신라 전 영토의 절반’이라는 개념으로 쓰였던 것이다.

요컨대, 왕도와 5도 주군에서 96각간이 일어나 싸웠다는 것은 왕도를 비롯하여 전 국토의 절반에 달하는 지역이 반란에 휩싸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96각간의 난은 이전까지 신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국적인 반란 사건이었다. 96각간의 난 발생으로 신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장창(長倉)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대공 형제가 이끄는 반란군은 왕궁을 33일간이나 포위하였으나 이후 왕군(王軍)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반란의 규모가 전국적이었던 만큼 지방의 반란 세력까지 완전히 제압하는 데는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어린 혜공왕을 대신하여 96각간의 난을 진압한 것은 왕의 외숙부(元舅)이자 당시 신라군(軍)을 총괄하는 병부령(兵部令) 관직에 있던 김옹(金邕)이었을 것이다. 혜공왕은 반란을 평정한 이후 대공과 관련된 9족(族)을 참수하였으며, 대공 가문의 재산과 보물, 비단 등을 몰수하여 모두 왕궁으로 옮겼다. 또한 사량부(沙梁部)와 모량부(牟梁部)에 있었던 반란 귀족들의 곡식도 왕궁으로 옮겼다.

한편, 『신당서』에는혜공왕 6년(770)에 발생하는 김융(金融)의 난까지 포함하여 반란이 3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 96각간의 난 이후의 정국안정을 위한 노력

96각간의 난이 전국적인 대규모 반란이었던 만큼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혼란스러운 상황은 지속되었다. 혜공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은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혜공왕은 반란을 진압한 동년(同年) 10월에 이찬 신유(神猷)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이찬 김은거(金隱居)를 시중에 임명함으로써 새롭게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5년(669) 3월에는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와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는 반란 진압에 공훈을 세훈 공신들을 치하하고 새로 임명된 상대등과 시중을 축하하고자 마련된 것으로 혜공왕은 연회를 통해 신하들의 단합을 꾀하였다. 또한 5월에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새로운 인재를 추천·발탁하여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써 지배층 사회에 누적되어 온 정치적 불만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또한 96각간의 난이 전국적인 반란이었던 만큼 왕도 뿐 아니라 지방을 안정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6년 정월에는 서원경에 행차하여 지나는 주·현의 죄수들을 사면하는 등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혜공왕은 성덕대왕신종 의 주조 사업에도 다시 착수하였다. 성덕대왕신종 의 주조는 일찍이 경덕왕이 성덕왕의 권위를 빌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차원에서 추진한 바 있으나 결국 종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혜공왕은 이 사업을 재차 추진하여 완성을 보았는데, 이때 주조된 성덕대왕신종 에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어 종을 주조한 목적과 여기에 참여한 인원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성덕대왕신종 의 명문을 살펴보면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특히 명문의 구성이 성덕왕→경덕왕→혜공왕으로 이어지는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내용 구성은 성덕왕의 권위를 빌어 혜공왕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고 중대 왕실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확보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다. 성덕대왕신종 의 주조를 주도한 것은 당시 혜공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고 있던 만월부인이었고, 주조의 총책임자는 병부령으로서 96각간의 난을 진압한 김옹이었다. 이처럼 혜공왕 세력은 성덕대왕신종 주조를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96각간의 난 이후 흐트러진 정국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혜공왕을 중심으로 한 집권 세력은 96각간의 난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왕권에 대항하는 진골 세력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결국 혜공왕은 재위 16년(780)에 발생한 김지정의 난 중에 난병(亂兵)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그리고 혜공왕의 사망으로 신라의 중대 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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