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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의 전개

670년 ~ 684년

고구려 부흥운동 대표 이미지

고구려 부흥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고구려의 멸망과 전후 처리

668년(보장왕 27) 9월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寶藏王)을 비롯하여 연남산(淵男産), 연남건(淵男建) 등 고구려의 최고위 지배층들도 포로가 되어 당으로 들어갔다. 보장왕 등은 당의 소릉(昭陵)과 대묘(大廟)를 거치는 굴욕을 당하며 장안(長安)의 함원전(含元殿)에 도착하였다. 이후 포로로 끌려간 보장왕과 고구려 지배층들은 당의 고구려 정복전쟁 과정에서 협력의 정도와 공과(功課)에 따라 관계를 받거나 유배에 처해졌다. 당은 당과 고구려의 전쟁의 모든 원인을 제공한 것은 보장왕이 아닌 연개소문의 탓이므로 보장왕은 처벌하지 않고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다. 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 남생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적과 내응하여 평양성이 함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승려 신성(信誠)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받아 남산보다도 높은 관직을 받는 등 협력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반면 끝까지 저항하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를 보냈다.

포로가 된 지배층의 처리는 일단락되었고, 고구려의 영역과 백성에 대한 처리가 남았다. 당은 멸망 당시 고구려의 5부(部) 176성(城) 69만 여 호(戶)를 나누어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으로 재편했으며,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로 삼았다. 또한 고구려인 중에 당에 협력하였던 인물 중에서 도독·자사·현령을 뽑아 당에서 파견된 관리와 함께 다스리도록 하였다. 669년 4월에는 고구려의 백성 3만 8300호를 강남 (江南), 회남 (淮南), 산남 (山南), 경서 (京西) 지역의 빈 땅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지역과 유력자, 민들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졌다.

2 검모잠의 부흥운동

당은 고구려의 유력 지배자들을 당 내지의 빈 땅으로 옮겨 그들의 원래 기반이었던 고구려 본토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였다. 그것은 유력자들을 그들의 연고지에 그대로 둘 경우 물적·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굳이 이러한 불안 요소를 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70년 당이 우려했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수임성(水臨城: 고구려의 臨津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추정) 출신의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었다. 당의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수임성 지역에서 검모잠이 백성들을 규합한 것이다. 그리고 669년 2월,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했던 안승(安勝) 을 사야도(史冶島: 인천의 소야도 蘇爺島)에서 맞이하여 부흥군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검모잠은 안정적으로 부흥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신라에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보내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도리이므로 이제 다시 안승을 왕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부흥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670년(문무왕 10) 3월, 신라의 사찬(沙湌)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의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가 연합하여 당과 전투를 벌이는 등 신라와 당의 대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부흥 운동 세력과 그 왕인 안승이 신라의 영역 내에 있다는 것은 당의 신경을 거스르는 문제였다. 그러나 고구려 부흥 운동의 주역이었던 검모잠은 자신이 세운 안승에 의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고, 안승은 신라로 다시 돌아갔다.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부흥한 고구려의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3 안승의 보덕국(報德國)

670년(문무왕 10) 7월, 문무왕은 김수미산(金須彌山)을 보내 정식으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안치하였다. 한편 671년 7월, 당 장군 고간(髙侃)이 안시성(安市城)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물리쳤다. 672년 7월에는 고간과 이근행이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여덟 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연합하여 당군 수 천 명을 죽이며 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12월에는 고간의 군사와 고구려 부흥군이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구원병을 보냈지만 역시 패배하였다. 검모잠이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키면서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신라도 당군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다. 673년 5월 당은 연산도 총관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을 파견하여 호로하(지금의 연천, 임진강)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물리치고 수 천 명을 포로로 잡으니 나머지 무리는 신라로 달아났다 는 것이 고구려 부흥군의 마지막 전투였다.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의 계속된 연합 작전에 당은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에 살게 한다고 지적하며 문무왕의 관작을 없애고 숙위로 당에 가 있던 왕의 동생 김인문을 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무왕은 다시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였다. 금마저에 안승의 보덕국(報德國)이 세워진 것이다. 안승의 보덕국은 신라의 영역 내에 있지만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도 보덕국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나름의 자치를 영위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680년(문무왕 20) 3월 문무왕은 자신의 여동생을 안승에게 내려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에 안승은 고연무(高延武)를 보내 표문을 올려 감사를 표시하였다. 문무왕은 실상은 독립적이지 않았으나 형식은 독립적이었던 보덕국의 왕 안승을 보덕국의 왕이 아닌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삼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경순왕을 고려 왕실의 일원으로 귀속시킨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안의 옛 백제 지역이었던 금마저에 안치했던 것부터 시작하여 신라는 처음부터 보덕국에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문무왕의 여동생과 안승의 혼인 관계가 성립되면서 신라의 보덕국에 대한 구속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신라는 혼인에서 더 나아가 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고, 신라의 성인 김씨(金氏)를 내렸다. 또한 보덕국이 있었던 금마저가 아닌 경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신라는 안승에 대하여 혼인 정책과 사성 정책을 구사하며 신라 진골귀족에 편입시켰다. 신라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금마저에 있던 보덕국의 사람들은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684년(신문왕 4) 11월 안승의 조카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의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안승이 금마저에서 경주로 옮겨 살게 되면서 보덕국의 존재는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대문을 중심으로 한 금마저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라는 반란군을 토벌하였고 금마저에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로 경주의 남쪽으로 옮겨버렸다. 이제 더 이상 금마저는 고구려 유민의 땅이 아니었다. 이름뿐이었던 보덕국의 운명은 완전히 끝나버렸고, 금마군(金馬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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