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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

나라의 명운을 걸고 제국에 맞서 싸우다

644년 ~ 668년

고구려·당 전쟁 대표 이미지

고구려와 당의 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

수 양제(隋煬帝)의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후유증과 무리한 토목 공사가 계속되면서 양제의 통치에 대한 수 백성들의 원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양제의 계속된 실정에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나고 내란이 발생하면서 수의 혼란은 깊어갔고 결국 수는 성립한지 40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했다. 수를 대신하여 618년 이연이 당(唐)을 세웠으니, 그가 바로 당 고조다. 당시 고구려에서도 3차에 걸친 수의 고구려 원정을 물리쳤던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고조는 613년 수의 2차 고구려 원정 당시 회원진(懷遠鎭)으로의 군량 운반을 감독하면서 당을 건국한 이후 주변국과의 우호에 힘쓰며 창업기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수 말기의 혼란 속에 강성해진 돌궐에 칭신(稱臣)까지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에도 관심을 쏟을 틈이 없었다. 고조의 이러한 생각은 622년 고구려에 보낸 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조서에는, 수와 고구려가 전쟁을 계속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으나 지금 당과 고구려는 화통한 상태이므로 각기 서로의 영역을 잘 다스리자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와 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양국 포로의 교환을 제의하는 등 시종일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조는 수의 고구려 원정이 무력을 남용하고 중원을 피폐하게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자신은 명분을 위해 실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당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내치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고조의 치세에 고구려와 당은 유례없는 화친기를 보냈다.

2 태종(太宗)의 고구려 인식

고조의 뒤를 이어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하였다. 태종은 즉위 초부터 내치에 집중했던 아버지와 달리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실시하여 돌궐, 토욕혼, 고창, 설연타를 차례로 복속해나갔다. 태종은 즉위년인 626년,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가 당으로 입조할 길을 막는다고 하자, 산기시랑(散騎侍郞) 주자사(朱子奢)를 고구려에 보내 백제, 신라와 화친을 권하며 삼국 사이의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627년에는 돌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태종은 630년 돌궐을 침략하여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으면서 아버지 고조 대에 있었던 칭신(稱臣)의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고구려의 경관(京觀) 파괴로 이어졌는데 경관은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한 상징물이었다.

당의 도발적인 행동을 경험한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631년 2월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장성이 바로 16년이나 걸려 축조된 천리장성(千里長城)이었다. 고구려는 639년 당이 고창(高昌)을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고창의 다음 목표로 고구려를 침략할 것이라 예상하고 경관 파괴 이후 단절되었던 당으로의 사신 파견을 재개하였다. 640년에는 세자 환권(桓權)을 보내는 등 당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한편 당의 동태를 살폈다.

당 역시 고구려의 세자가 입조한 것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직방낭중은 천하의 지도(地圖), 성황(城隍), 진수(鎭戍), 봉후(烽候) 등의 일을 담당하고, 주변국과의 원근(遠近)을 판별하며 사이(四夷)의 귀화 등을 처리하는 직책이었다. 이러한 직방낭중을 고구려에 파견한 것은 역시 고구려의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파악하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고 진대덕은 당으로 돌아가서 정보수집의 결과물인 『고려기(高麗記)』를 지어서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

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한이 설치한 사군(四郡)의 땅’이라며 고구려에 대한 침략 의지를 다져온 태종으로서는 고구려 정벌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 태종은 이후 왕을 잃은 고구려의 백성을 위로하고 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조민벌죄(弔民伐罪)’를 고구려와의 전쟁 명분으로 내세운다.

당은 상리현장(相里玄獎)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으면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내용의 조서를 보냈다. 이에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은 고구려의 땅 500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상리현장이 당에 돌아와 상황을 보고하자 태종은 마침내 고구려와의 전쟁을 천명하였다.

3 고종대의 고구려와 당의 전쟁

태종의 뒤를 이어 고종 이치(李治)가 즉위하였다. 655년 고구려와 백제, 말갈의 군사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하여 33개 성을 취하는 상황이 되자, 김춘추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은 2월 영주도독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귀단수(貴端水) 근처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천 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성곽과 촌락을 불사르고 돌아갔다. 다시 658년 6월 정명진과 설인귀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659년 11월에도 설인귀가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溫沙門)과 싸워 승리하였다. 660년에도 소정방 등이 군사를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61년 4월에는 고종이 직접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무후(武后)와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고 8월에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에는 연개소문이 아들 남생을 시켜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는데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압록수를 건너와 고구려군 3만 명을 죽이고 돌아갔다. 662년에는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크게 패하고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고종대의 당군의 전략은 대규모 군대의 파견을 통한 정복전쟁의 수행보다는 소규모의 군대를 자주 파견하여 고구려의 민심을 동요하게 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연개소문의 사망은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 변화를 가져왔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남생과 아우 남건, 남산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무리가 있었고 결국 형제들이 분열하여 남생은 당으로 귀순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 당은 666년 12월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하북의 조세를 군량미로 보내는 등 이전과는 다른 규모의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였다. 667년과 668년 전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598년 고구려의 요서 선제공격부터 시작해서 고구려의 백성들은 7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수·당과의 전쟁을 겪었다.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기도 하고, 소규모의 병력을 보내 간헐적으로 공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지만, 그때마다 고구려의 백성들은 사력을 다해 막아냈다. 비록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스스로 실패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의 역사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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