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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의 정복 전쟁

고구려의 천하가 열리다

미상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 대표 이미지

중국 길림 광개토왕릉비 정면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91년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하여 412년 사망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압박하며 경기도 북부를 비롯한 한강 이북지역을 장악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거란과 숙신(읍루)을 정벌하였다. 또 동쪽으로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며, 서쪽으로는 후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요동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영역을 사방으로 확장하며 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군주로 평가된다. 이러한 광개토왕의 위업은 414년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에 의해 건립된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 고구려, 고난의 세월을 맞이하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거세게 요동쳤다. 중원을 통일한 진(晉) 제국이 쇠퇴하면서 중국 각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북방민족들이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진 제국은 북방민족에 의해 낙양(311년)과 장안(316년)이 함락당하고 황제가 잡혀가 죽임을 당하며 멸망하기에 이른다. 317년 진 황실의 일족이었던 사마예(司馬睿)가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에서 동진(東晉)을 재건하였지만, 화북 지역은 다섯 계통의 북방종족이 건국한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5호 16국의 대혼란기가 시작되었다.

한편, 이 무렵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고(313~314) 동북아시아 세력의 한 축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왕은 왕 중의 왕 ‘태왕(太王)’으로 불리었으며, 고구려 세력권 내에는 말갈, 옥저, 동예 등 주변 세력뿐만 아니라 낙랑·대방 출신의 백성까지 흡수되어 있었다. 하지만 4세기 전반 서방으로부터 고구려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 북방민족의 발호 속에 요서 지역에는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 모용선비) 세력이 급격히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337년 모용선비는 전연(前燕)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세우고 순식간에 중국의 하북 일대와 요서 지역을 장악해나갔다. 고구려의 ‘숙명의 라이벌’ 모용선비의 등장이다.

이처럼 서쪽에서 모용선비가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을 때 고구려에서는 16대 왕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의 치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국원왕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던 불운한 군주였다. 특히 고국원왕 치세 전반기에는 강대한 모용선비(前燕)와 충돌하게 된다. 337년 전연을 세우고 연왕(燕王)을 자칭한 모용황(慕容皝)은 342년 병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자신은 직접 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 좁고 험한 남쪽 길로 진군하고, 별도로 1만 5천의 병력을 넓은 대로가 이어져 있는 북쪽 길로 진출 시켜 고구려로 진군하였다.

이렇게 전연의 군대가 남북 양로로 고구려의 왕도 환도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전연의 대군이 대로인 북쪽 길을 통해 진군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북쪽 방면에 5만의 정예병을 급파하였다. 그리고 고국원왕 자신은 직접 약졸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결국 전연의 대군은 소수의 고구려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좁고 험한 남로를 돌파하였고, 전연의 공세를 막지 못한 고구려는 왕도 환도성을 점령당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고국원왕은 옥저로 피신하였지만, 왕의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갔으며 미천왕(고국원왕의 아버지)의 시신도 탈취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용황은 고구려 왕도에 거주하던 백성 5만 여명도 함께 포로로 잡아갔다. 처참한 패배였다. 왕도에 살던 5만여 명이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끌려가자 중앙의 통치 시스템은 모두 붕괴하였고 왕실의 위엄도 추락하였다.

한편, 전연은 352년 경쟁국 후조(後趙)를 멸망시키고 황제국을 표방하였는데, 355년 고구려는 그러한 전연과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한 일시적 조치였으며, 고구려와 중원 왕조 사이 맺어진 최초의 조공-책봉 관계이기도 했다. 이처럼 고구려는 전연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며 간신히 서방의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쪽의 백제가 황해도 일대를 잠식해 들어왔다. 당시 황해도 지역은 옛 대방군의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곳으로 옛 낙랑군이 있었던 평양 지역과 함께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 백제는 고구려가 전연과의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황해도 일대로 진출하고 있었다. 고구려 또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유산을 사수하기 위해 백제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막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3 고구려와 백제,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다투다

고구려가 모용선비(전연)와의 전쟁으로 어려움에 빠져있을 당시 한반도 남쪽에서는 백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백제의 13대 왕이자 백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 받는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의 시대이다. 근초고왕은 안으로는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을 확정하여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밖으로는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낙동강 유역에 진출하여 김해의 구야국(금관가야)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고, 마한의 남은 영역을 흡수해가면서 그 영향력을 전라도 일대에까지 확장시켰다. 또 해외로 눈을 돌려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활발한 국제 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백제는 중국 문화의 세례를 입어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던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대한 진출을 꾀하였다. 물론 백제는 이 지역에 대한 단순한 점령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낙랑군이 오랜 시간을 들여 개척한 고대 해상무역로, 즉 낙랑에서 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교역로를 차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차곡차곡 국력을 쌓아왔던 백제는 곧 고구려가 느슨하게 점유하고 있던 옛 대방군 지역, 즉 황해도 일대를 잠식하여 들어갔다. 이에 고국원왕은 369년 직접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남부 배천군 일대를 공격해 들어갔으나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의 군대에 패하고 만다.

그리고 2년 후인 371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백제군의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고, 승세를 탄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더불어 정병 3만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평양성까지 고구려를 몰아쳤다. 고구려군은 성문을 닫아걸고 수비를 하였는데, 이때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이후 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자 백제군 또한 군대를 물려 돌아갔다. 이로써 양측의 첫 전쟁은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고, 평안도의 낙랑군 지역은 고구려가 황해도의 대방군 지역은 백제가 서로 양분하여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고국원왕 시대 전반에 걸쳐 힘겨운 세월을 보내던 고구려는 고국원왕 사후 즉위한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의 치세를 맞이하여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고구려는 불교의 수용, 태학의 설립, 율령의 반포 등 일련의 체제 정비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고국원왕 시대의 국난을 극복하고 점차 안정기에 돌입하게 된 고구려는 380년 무렵부터 후연(後燕)과 요동 지역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해나갔다.

4 광개토왕의 즉위, 전성기를 맞이하는 고구려

한편, 이 무렵 중국에서는 한때 중국 북부 전역을 통일했던 전진(前秦)이 비수 전투에서 패배하며 허무하게 무너지고 화북 지역이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화북 동부 일대에서는 384년 전연의 황족으로 전진에 항복했던 모용수(慕容垂)가 모용선비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거병하였고, 곧 후연을 건국하였다. 후연은 곧바로 세력을 확장해가며 동쪽의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에서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이 즉위하였다. 광개토왕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왕으로서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그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왕의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 측 사서에서는 ‘안(安)’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기도 한다.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391)의 아들로서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고 전한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고국양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 반도의 패권을 놓고 380년 무렵부터 후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해나가는 한편, 백제에 대한 복수전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392년,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에 대한 파상공세를 개시하였다. 고구려의 압도적인 무력에 백제는 석현성(石峴城), 관미성(關彌城) 등 북쪽 국경의 주요 요충지를 빼앗기며 맥없이 밀려났다. 이에 백제는 394년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수곡성(水谷城) 전투에서 패하며 격퇴당하였고, 395년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 전투에서 또다시 크게 패하며 물러나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에 의해 북쪽으로의 진출이 가로막히자 백제는 방향을 바꾸어 가야·왜(倭)와 함께 동쪽의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는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나라 사정이 매우 피폐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왜의 군사 활동 배후에는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해상 동맹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의 군주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은 392년 왕자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 고구려는 후연과 요동 지역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의 상황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396년 무렵부터 후연은 선비 탁발부가 세운 북위(北魏)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하북 지역을 대부분 상실하며 후연의 세력이 크게 꺾이게 되었다. 이렇게 서쪽 국경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된 고구려는 396년 대군을 동원하여 한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하였고, 백제의 58성과 700개 촌락을 함락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의 압도적인 무력에 굴복한 백제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은 백성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고구려에 바치며 광개토왕의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다. 광개토왕은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백제는 북한산을 경계로 그 이북의 영토를 모두 고구려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자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공을 들여온 해상 동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백제는 김해의 구야국이 주도하던 가야 제국과 일본열도의 왜 세력과 함께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었던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다시 도움을 요청하였고, 광개토왕은 백제 해상 동맹의 핵심 연결점이었던 낙동강 유역으로 5만의 병력을 급파하여 가야 지역에 주둔하였던 왜병과 구야국 세력을 대파하였다(400). 이로써 가야 지역에 주둔하였던 왜병은 궤멸하였고 구야국 중심의 가야 연맹세력과 백제의 해상 네트워크도 일시 붕괴하고 만다.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이를 계기로 “신라 매금(寐錦=내물마립간)이 몸소 와서 조공을 바쳤다.”라고 적고 있어 이 무렵 신라가 고구려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고구려가 남쪽으로 대군을 파견한 사이에 요동 방면에서는 후연의 군대가 다시 쳐들어 왔다. 고구려의 주력은 한반도 남부로부터 급히 철군하여 다시 요동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고구려는 402년부터 요동 일대에 대한 파상공세를 전개하였고, 407년에는 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후연의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후연 세력을 요동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요동 전 지역을 완전히 점유하게 된다. 404년에는 고구려의 주력이 서쪽 전선으로 이동한 틈을 타 백제가 다시 왜군과 함께 고구려에 반격을 가해 황해도의 옛 대방군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광개토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해도 일대로 진군하여 침입해온 백제군과 왜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로 한반도에 주둔하던 왜군이 절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제가 구축한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해상 동맹 또한 힘을 잃게 되고 만다.

이처럼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은 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가야와 요동반도 일대의 후연을 상대로 전개되었다. 전쟁의 결과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며 신라 조정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또 후연을 요동반도에서 밀어내고 요동반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이 비단 백제·왜·후연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392년 9월 백제와의 전투가 한창일 무렵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거란을 정벌하였고, 398년에는 동북쪽에 있던 숙신을 정벌하였으며, 또 410년에는 두만강 중하류 유역에 있던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가히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은 고구려를 둘러싼 사방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의 정복 활동은 여기까지였다. 412년 겨울이 다가올 무렵 광개토왕은 서거하였고,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위업을 기리며 왕에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라는 시호를 올렸다. 말 그대로 “나라 언덕 위에 묻히신(國岡上) 땅의 경계를 넓게 개척하고(廣開土境) 나라를 평안케 하였던(平安) 위대한 왕(好太王)”을 위한 시호였다. 3년에 걸친 부친의 장례를 마친 장수왕은 414년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한 6.4m 높이의 거대한 비석을 세웠으니, 바로 오늘날 중국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광개토왕비」이다. 비문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적고 있어 광개토왕이 단순히 정복 전쟁에만 골몰한 군주가 아닌 진정한 명군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위대한 정복 군주 광개토왕의 시대를 기점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강대국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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