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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羅濟同盟]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미상

나제동맹 대표 이미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나제동맹은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에 맞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맺어진 동맹을 말한다. 백제는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에 맞서 신라와의 연대를 꾀하였다. 5세기 전반까지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던 신라 또한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백제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맺어진 나제동맹을 바탕으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었고, 이후 대대적인 반격을 통해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 확보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백제를 배신하고 기습적으로 한강 유역 전체를 독점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선택은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적으로 돌리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2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된 신라왕

4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신라는 진한(辰韓) 사회의 통합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김씨(金氏) 왕실이 들어섰고, 마립간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면서 북방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던 중이었다. 신라가 377년(내물왕 22)과 382년(내물왕 27)두 차례에 걸쳐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러한 신라의 외교적 노력과 신라 사신을 자국 사행에 동반시킴으로써 자신의 국력을 과시하려 하였던 고구려의 의도가 합치한 성과였다.

하지만 4세기 후반 무렵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 다툼이 본격화되면서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양국의 충돌 중에 벌어진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사망과 이후 전개된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맹공은 백제에게 크나큰 위기로 다가왔다.

이처럼 고구려의 압박에 어려움을 겪던 백제는 가야·왜·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가야와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신라로서는 백제보다는 고구려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도리어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는 형국이 전개되었고, 신라는 이에 대응하여 내물왕(奈勿王) 37년(392) 정월 고구려에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고구려에 대한 저자세 ‘인질 외교’를 통해 내물왕은 밖으로는 고구려와 우호를 다지는 한편, 안으로는 정치적 경쟁자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맺어진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 관계는 ‘인질 외교’ 이후로 점차 수직적 상하 관계로 전환되게 되었다. 즉 양국의 관계는 고구려가 상국(上國)이 되고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위치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에게 있어 ‘속민’이란 고구려 천하 안에 속해 있으면서 고구려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속민으로 위치한 나라들은 스스로 왕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였지만, 그 나라 왕은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을 칭하면서 조공을 바치고 국내의 정사를 보고하고 간섭을 받아야 했다.

신라왕이 고구려왕의 노객이 된 것은 399년 백제의 사주를 받은 왜·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한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내물왕은 광개토왕에게 급히 사신을 보내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광개토왕은 이듬해인 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 왕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을 축출하고 가야 세력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이 전쟁으로 낙동강 하류 유역의 가야 사회를 주도하던 김해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낙동강 동쪽의 가야세력은 모두 신라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다. 또한 고구려에게 있어서는 한반도 남부로의 진출이 중요한 목표로 떠올랐으며, 백제를 견제할 세력으로 고구려왕의 ‘속민’이 된 신라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백제↔신라, 가야↔신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군사를 주둔시켜 신라를 보호하는 한편, 신라 왕경이 위치한 경주 일대에 군대를 배치하여 신라가 반기를 들 수 없도록 압박하며 국정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반면, 신라는 고구려 ‘속민’으로서의 위치를 활용하여 고구려를 배후에 둠으로써 백제와 가야의 압박을 벗어났고, 고구려로부터는 선진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3 자립을 모색하는 신라

신라는 눌지왕(訥祗王) 시대에 이르러 점차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눌지왕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자신의 정적 실성왕(實聖王)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또 고구려의 후원 속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 후 그는 제상(堤上)에게 명령을 내려 고구려에 볼모로 가있던 동생 복호(卜好)를 몰래 데려오게 하는 한편, 왜에 인질로 가있던 막내 동생 미사흔(未斯欣)마저 구출하는 등 외국으로부터의 간섭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그리고 이처럼 신라의 자립을 꿈꾸던 눌지왕에게 있어 본격적으로 반고구려 기치를 들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고구려 장수왕이 반대하는 귀족들을 숙청하면서까지 평양으로의 천도를 강행한 일이었다.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단순히 영향력을 확대하는 개념을 넘어서는 실질적 영토 확장을 의도하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이러한 정책 변화에 따라 한반도 남부에 포진한 세력들도 대책을 고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여기에 가장 큰 위협을 느낀 나라는 백제였다.

이에 백제는 434년 2월 좋은 말 두 필을 신라에 보내며 화친의 손을 내밀었다. 여기에 대해 신라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백제는 그 해 9월 다시 흰 매를 보내며 신라에 화호를 청했다. 신라는 이후로도 1개월을 더 숙고한 뒤에야 백제에 황금과 명주를 보내며 화답했다. ‘탈고구려’를 꾀하던 신라가 백제의 제안에 숙고를 거듭하였던 이유는 우선 백제의 화친 제안의 진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그와 함께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대항할 경우의 벌어질 향후 정세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백제가 접촉한 것에 대해 고구려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고구려는 왕실이 직접 나서서 신라왕과 그 신료들에게 관복을 사여하는 의식을 개최하였는데, 관련 회맹의 내용은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에 새겨져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장수왕은 신라 매금(寐錦: 마립간의 다른 표기)과 그 신하들을 우벌성(于伐城)의 궤영(跪營)으로 불러 회맹의 자리를 가지고, 그와 함께 의복을 사여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이때 신라의 눌지왕도 직접 회맹에 참여하여 고구려왕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았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되는 듯 보였지만, 얼마 뒤인 450년 고구려 장수가 실직(悉直: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슬라(何瑟羅: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성주 삼직(三直)의 공격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에 불씨를 지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고구려왕은 신라왕에게 거세게 항의하였다. 결국 신라왕이 고구려왕에게 사죄함으로서 사건을 일단락되었고, 신라 왕권의 자립 노력도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신라 눌지왕은 결국 고구려를 향해 칼을 빼들 결심을 하게 된다. 결심을 굳힌 눌지왕은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정병 100명을 몰살시키는 명령을 내린다. 일명 ‘수탉을 죽여라!’ 작전으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라와 고구려는 완전히 결별하고 서로를 적국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4 나제동맹의 체결과 가동

나제동맹이 정식으로 성립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앞서 언급한 434년 신라와 백제의 사신 교류는 양자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때 신라 눌지왕과 백제 비유왕(毗有王) 사이에 동맹이 약속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까지는 고구려 병력이 신라 왕경에 주둔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450년 실직에서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이 발생하고 눌지왕의 주도 하에 ‘수탉을 죽여라!’ 작전이 개시됨으로써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모두 축출되었고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눌지왕이 고구려군을 소탕한 것은 아마도 나제동맹이 원활하게 가동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은 곧 고구려의 거센 침공을 불러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눌지왕 38년(454)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하자 눌지왕이 군대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구려의 공격에 대항하여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서로 구원군을 보내주는 관례가 생겨났고, 고구려는 이러한 신라와 백제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형세가 지속되었다.

눌지왕이 죽고 그 아들 자비(慈悲)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시기에도 고구려의 신라 공격은 계속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1년(468) 기사에는 그해 봄 고구려가 말갈 병력과 함께 실직성을 습격하였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공격이 거세지자 신라는 자비왕 13년(470)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일대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이 산성은 고구려군이 충주에서 죽령이나 계립령을 넘지 않고 괴산 방면으로 우회하여 신라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왜국과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시 북중국을 호령하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남쪽의 송(宋)과 북방의 유목국가 유연(柔然)에 대항하고 있었기에 백제의 요청을 들어줄 형편이 못되었다. 한편, 백제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을 청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수왕은 대대적인 백제 정벌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미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파견하여 백제 내부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던 고구려 장수왕은 마침내 475년 가을 몸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백제의 왕도 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백제는 끝내 한성을 지켜내지 못하였고,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성을 빠져나와 도주하다가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의 공격이 시작되자 개로왕은 동생 문주(文周)를 신라로 급파하여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문주는 신라로부터 1만의 병력을 지원받아 급히 한성으로 되돌아왔지만, 이미 전쟁은 끝이 나고 한성은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이에 문주는 남은 세력을 거느리고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내려가 나라를 재건하였지만, 백제 건국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모조리 빼앗기게 되었다.

5 더욱 굳건해지는 나제동맹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의 왕도 한성이 맥없이 무너진 이후 신라는 혹 고구려가 침공해올까 두려움에 떨었다. 자비왕을 이어 소지왕(炤智王)이 즉위한 이듬해인 480년 고구려가 동원한 말갈 병력이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고구려군이 말갈 병력과 함께 동해안 방면으로 진격하여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까지 침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나제동맹을 바탕으로 출병한 백제와 가야의 구원군이 신라군에 합세함으로써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484년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이때도 신라와 백제 두 나라가 합세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나제동맹은 백제와 신라의 존립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로 작동하였다. 두 나라는 이 동맹이 공고히 유지되는 한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에 493년 백제 동성왕(東城王)은 나제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고, 신라에서는 이벌찬(伊伐飡) 비지(比智)의 딸을 보내 화답하였다. 이 혼인을 통해 신라 왕녀가 백제의 왕비가 되면서 나제동맹은 왕실 간 혼인에 기반을 둔 혼인동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나제동맹은 한층 더 공고해졌다.

이후 494년 남한강 지류로 추정되는 살수(薩水)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이던 신라군이 위기에 처하자 백제 동성왕은 3천의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군을 구원하였다. 그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 변경을 공격하자, 이번에는 백제 동성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신라 소지왕이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처럼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내자 고구려도 더 이상의 남진이 어렵게 되었다. 반면, 신라와 백제는 대외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점차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백제는 한강 유역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 정치적 안정을 찾아나갔고, 신라 또한 체제정비를 통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국가적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6 한강 유역 쟁탈전과 동맹의 와해

안정적인 대외정세 속에서 내부 체제 정비에 성공한 신라는 국력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진흥왕(眞興王) 시대에 이르러 신라는 죽령을 넘어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적성(赤城)을 차지함으로써 고구려와 중원(中原: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551년 고구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틈을 타 마침내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聖王)은 공동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특히 백제에게 있어 한강 유역의 회복은 오랜 숙원사업이었는데, 이를 위해 백제는 신라·가야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자 오랜 기간 공을 들여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백제·신라·가야 3국의 힘을 합친 연합 작전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연합작전이 성공한 뒤에는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각각 차지한다는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553년 신라가 갑자기 동맹을 깨고 백제가 장악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까지 모조리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두 나라의 동맹은 와해되었고, 갑작스런 신라의 배신에 분노한 백제 성왕은 신라를 응징하기 위해 가야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켰다. 두 진영의 군대는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붙잡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전쟁은 신라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이처럼 나제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와 전쟁을 벌였던 신라의 선택은 한강 하류 유역 확보라는 큰 성과를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적으로 만드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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