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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전투[大耶城 戰鬪]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백제인의 저항

642년

대야성 전투 대표 이미지

합천 대야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대야성(大耶城) 전투는 642년에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대야성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말한다.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한층 강화하였던 백제는 대야성을 함락함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트렸다. 반면, 당시 신라의 권력자였던 김춘추는 대야성이 함락될 당시 성 안에 있던 자신의 딸과 사위를 모두 잃고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당을 오가는 외교전을 펼치게 되었고, 결국 김춘추의 대당(對唐) 외교가 성공함으로써 신라와 당은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바야흐로 삼국의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순간이다.

2 백제와 신라의 동상이몽, 흔들리는 나제동맹

오랫동안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받아왔던 백제와 신라는 551년 합동 군사작전을 펼치며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성과 남평양을 비롯한 한강 유역 전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성왕(聖旺, 재위: 523~554)이 이끄는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의 6개 군(郡)을 차지하였고,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이끄는 신라는 한강 상류 유역의 10개 군을 점령하였다. 백제와 신라가 그 강대했던 고구려를 마침내 한강 유역 북쪽으로 몰아내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강 상·하류 지역을 장악하면서 양국의 합동 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 나라는 향후의 군사작전을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다. 백제는 승세를 타고 고구려를 계속 압박하면서 북진하고자 하였지만, 신라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두 나라가 지금처럼 계속 북진하여봤자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는 서해안 지역은 모두 백제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라가 한강 상류 유역을 넘어 계속 진군한다면 백두대간을 끼고 진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 얻게 되는 영토 또한 대부분 험하고 척박한 산간지대뿐이었다. 반면 백제는 양국의 연합군이 계속 북진할수록 기름진 서해 연안 지역을 모두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즉 전투가 계속될수록 고생은 두 나라가 같이 하지만 노른자 땅은 백제 차지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신라는 이제 척박한 산간지대가 아닌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서해안 지역이 탐이 났다. 혈기왕성했던 18세의 젊은 진흥왕은 국운을 건 도박을 시작한다.

3 관산성 전투, 백제와 신라를 철천지원수로 만들다

한편, 신라가 더 이상의 연합 군사작전을 거부하자 성왕의 태자 여창(餘昌, 훗날의 백제 위덕왕)이 이끄는 백제군이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위기에 봉착한 고구려는 신라에 은밀히 휴전을 제안하였고, 신라는 백제로부터 등을 돌려 고구려의 손을 잡고 만다. 곧 이 소식이 백제 측에 알려지자 백제는 신라에 의해 배후를 공격당할 것이 염려되어 부랴부랴 군대를 되돌려 한강 유역마저 포기한 채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신라는 무주공산의 한강 하류 유역을 손쉽게 장악하였다.

백제는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배신으로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을 모조리 신라에 빼앗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554년 백제 성왕과 태자 여창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전쟁에 동원된 백제의 병력은 3만에 달하였으며, 여기에 왜(倭)와 가야의 병력도 백제를 돕기 위해 참전하였다. 성왕의 태자 여창의 지휘 아래 백제군은 관산성(管山城, 충청북도 옥천)으로 진군하였다.

관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백제는 처음 우세를 보였지만, 태자를 위문하기 위해 관산성으로 향하던 백제 성왕이 구천(狗川)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전세가 단번에 역전되었다. 결국 관산성에서 성왕을 비롯하여 4명의 좌평(佐平)과 3만에 달하는 백제군은 모조리 전멸을 당하고 만다. 물론 백제와 함께 참전한 가야와 왜의 병력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대가야는 이로부터 8년 뒤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고(562) 신라는 가야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의 패전은 백제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안겨 주었다. 이제 한강 유역 전역은 신라 소유가 기정사실화되었으며,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과 태자가 직접 전쟁을 주도하였다가 크게 패하고 왕마저 죽임을 당한 만큼 왕실의 위엄은 크게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동성왕(東城王) 이후 무령왕(武寧王)을 거쳐 성왕 시대까지 꾸준히 추진하여왔던 백제 왕실의 왕권 강화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만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관산성의 패전으로 백제는 오랫동안 행사해오던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남해안을 기반으로 구축한 백제의 해상 네트워크 또한 상당 부분 붕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이 아닌 신라에 대한 처절한 보복전을 먼저 준비해야만 했다.

반면, 신라는 관산성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중국과 통교를 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는 오랫동안 백제가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가야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되면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김무력(金武力, 김유신의 조부)을 비롯한 금관가야계 지배층은 이를 계기로 신라 지배층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었다.

4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다

성왕이 전사한 뒤로 위덕왕(威德王)-혜왕(惠王)-법왕(法王) 시대를 거치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 백제는 국제적으로는 고립된 형세를 면치 못했고, 내부적으로 귀족 간의 권력다툼이 벌어지며 왕실 권위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특히 위덕왕에 이어 즉위한 혜왕과 법왕이 모두 재위 1년 만에 사망하면서 이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하지만 무왕(武王, 재위: 600~641)의 즉위 이후 백제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며 국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무왕은 4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을 안정시켰고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나가면서 낙동강 유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대외 전쟁의 수행은 오히려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왔으며, 이를 통해 백제는 신라에 대한 강경일변도의 군사적 압박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무왕에 이어 백제 31대 왕으로 즉위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치세에 이르러 백제는 신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게 된다.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대한 공세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642년(의자왕 2) 7월에는 의자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중국으로 가는 신라의 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의해 양면으로 공격을 받으며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으며 어려운 상황이 놓여 있던 당항성은 신라에게 있어 만약 빼앗긴다면 대외적으로 완벽한 고립을 초래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과도 같았다. 554년 관산성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 장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후 8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백제는 신라를 향해 처절한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5 의자왕, 대야성에서 복수에 성공하다

대야성에서 벌어진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옛 가야 지역 진출을 위한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달하였던 사건이었다. 642년 7월, 즉위한 지 2년 만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 서쪽 40여 성을 단번에 함락시키며 군주로서 능력을 보여줬던 의자왕은 전투가 끝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신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길 준비를 했다.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명하였다.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당시까지 백제가 장악하지 못한 낙동강 서안 일대에 남아 있던 신라군의 마지막 보루이었다. 이곳 대야성이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통치거점으로 삼은 이후였다. 대야성은 육십령과 팔령치를 통과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진입하는 백제군을 방어하면서 경상남도 서부지역을 통괄하는 신라의 군사 요충지였다.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이 대야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개시하자 대야성은 금방 혼란에 빠지고 만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는 바로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성 도독(都督)이었던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런데 평소 품석의 행실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 이것이 화가 되어 대야성 전투의 향방을 가르게 되었다. 전투가 있기 전 품석은 대야성의 재지 세력이자 부하 무장이었던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았다. 이 사건으로 검일을 비롯한 대야성 일대의 재지 세력 상당수가 신라로부터 등을 돌렸는데, 특히 품석을 원망하던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그들과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질러 성안을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성안이 혼란에 빠지고 전세가 기우는 것처럼 보이자 품석을 보좌하던 아찬(阿湌) 서천(西川)은 백제군을 지휘하던 윤충에게 항복의 뜻을 전하였고, 품석 또한 서천의 설득에 넘어가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신라군은 백제군에 대항해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있던 것이다. 품석의 부하 장수 죽죽(竹竹)은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는 것은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항복을 반대했지만, 품석은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병졸을 내보냈다.

그러자 매복해 있던 백제 병력이 항복한 신라 병사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제야 백제의 계략에 빠졌음을 알아차린 품석은 결국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성안에 남아 있던 죽죽과 사지(舍知) 용석(龍石)이 남은 병사를 모아 성문을 닫고 백제군에 대항하였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대야성은 결국 백제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죽죽과 용석은 전사하고 말았다. 대야성을 장악한 백제군은 신라인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쪽 지방으로 천사(遷徙)시키고 병력을 주둔시켜 성을 지키게 하였다.

6 김춘추, 의자왕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다

이로써 백제는 낙동강 서쪽 지역을 석권하고 옛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반면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서부 국경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백제에 대한 방어선도 압량(押梁,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지방까지 후퇴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야성 전투의 패전으로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에 대한 반대파의 정치공세가 거세지게 되었다. 대야성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품석은 여왕의 세력기반이었던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선덕왕에 대한 반대파의 정치공세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김춘추는 대야성 패전과 딸과 사위의 죽음 소식을 듣고 백제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때 비보를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더니,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랴?’라 하고 곧 왕을 찾아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김춘추의 심정이 어떠하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김춘추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고구려였다. 아마도 김춘추는 당시 고구려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나 백제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고구려와 일종의 휴전 협정을 맺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마목현(麻木峴, 충주 하늘재)과 죽령(竹嶺, 충북 단양-경북 영주) 이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신라를 돕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하면서 오히려 그를 억류하였다. 기지를 발휘하여 간신히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이번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당 태종을 접견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당에게서 김춘추는 끝내 군사적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다. 바야흐로 삼국의 전쟁이 당과 왜(倭)까지 휘말리는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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