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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

해동성국이 지다

926년(대인선 21)

1 발해, 신라, 당의 혼란과 거란의 성장

발해에서는 793년 문왕(文王)의 사망 이후 25년간 6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그것은 발해의 왕위 계승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문왕의 뒤를 이어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였는데 바로 피살되었고 이후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이 차례로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이 1년도 채 되지 않은 왕들이 있었던 것을 통해 왕위 계승이 파행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를 내분기로도 파악할 수 있다. 818년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할 때까지 왕위의 교체가 빈번하였고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발해는 선왕 때부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정도로 융성기가 되었다. 그러나 906년경 대인선(大諲譔)이 즉위한 이후 발해는 쇠퇴하면서 급격히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대인선의 재위 기간(906?~926)은 발해뿐만 아니라 신라, 당도 비슷하게 혼란을 겪고 있었다. 신라도 하대에 들어서면서 진골귀족 사이에서 빈번하게 쿠데타 시도, 왕의 시해 등이 일어나면서 불안이 가중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 농민층의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이 격화되고 있었다. 결국 태봉과 후백제가 건국되면서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당에서는 9세기 후반부터 중앙의 통제력이 붕괴하였고 지방의 번진(藩鎭)세력이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당은 결국 907년 멸망하였다. 당(唐) 멸망 이후 979년 송(宋)이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중국은 후량(後梁)을 시작으로 5대(代) 10국(國)의 분열기에 들어갔다. 이러한 중원과 발해의 혼란으로 인해 거란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거란 부족들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를 중심으로 규합하였고, 916년 왕조를 건국하고 요(遼)로 국호를 삼으면서, 부족 단위가 아닌 명실상부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발해와 거란의 전쟁, 그리고 발해의 멸망

9세기 해동성국의 번영을 구가하던 발해가 거란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지배층 사이의 내분이 주요한 멸망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이 또한 석연치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해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마지막 사건이 거란의 침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거란은 당의 멸망 이후 중원의 분열 속에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915년 10월에는 야율아보기가 직접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고, 신라는 거란에 방물을 바치고 태봉은 고려 보검을 바치는 등 발해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발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와의 결원(結援)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거란은 급속히 강해지고 있었고, 신라, 태봉 및 그 뒤를 이은 고려는 거란과의 교류를 행하고 있었던 까닭에, 발해 역시 918년 2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920년 발해인 4명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등 서서히 발해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발해의 영향 아래 있던 여진이나 흑수, 달고 등이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신라나 고려, 중원과 접촉하는 등 발해의 주변 민족에 대한 통제력도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다.

거란이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발해는 924년 5월 요주(遼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그곳의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당시 거란은 서방 원정에 집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924년 7월 거란은 발해를 공격했으며, 발해는 여진(女眞)과 회골(廻鶻), 황두실위(黃頭室韋) 등을 동원하여 거란을 공격하였다. 다시 9월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양국간의 공방은 발해가 926년 거란의 일격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925년 9월 서방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야율아보기는 12월에 ‘두 가지 일 중 하나(서방 원정)는 이미 완수하였고, 발해는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갚지 못했다.’는 조서를 내리며 서방 원정을 성공으로 이끈 자신감 속에 발해와의 전쟁에 나섰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야율아보기는 12월 자신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인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지냈고, 다시 오산(烏山)에서 청우(靑牛)와 백마(白馬)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산갈산(撒葛山)에서 귀전(鬼箭)을 쏘며 출정을 알렸으며, 상령(商嶺)을 거쳐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를 포위하여 부여성(扶餘城)을 빼앗았다. 발해의 노상(老相)이 이끄는 3만 명의 군사는 거란의 1만 기병과 맞닥뜨렸으나 패배하였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거란군은 바로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으로 진격하였고, 결국 대인선(大諲譔)은 항복하였다. 항복 후에 대인선은 흰 옷을 입고 300명의 신하들과 함께 항복 의식을 치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야율아보기와 거란의 군사들은 9일 간 1,000리를 이동하여 부여부에 이르러 포위하고 3일 만에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6일 만에 발해의 수도 홀한성에서 대인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다. 너무 쉽게 무너진 현실을 믿기 어려웠던 것인지 대인선은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 발해 유민의 행방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의 고려로의 이주 기록들이 고려 태조 대의 기록에 확인된다. 925년(대인선 20) 9월 발해의 장군 신덕(申德) 등 5백 명이 귀순하였고, 이어서 발해의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균로사정(均老司政) 대원균(大元鈞),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左右衛) 장군 대심리(大審理) 등이 백성 100호와 함께 귀순하였다. 12월에는 발해의 좌수위(左首衛) 소장(小將) 모두간(冒豆干)과 검교 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000호와 함께 귀순하였다. 이들은 발해가 멸망하기 전에 고려로 들어간 사람들로 추정된다. 발해 멸망 전 이탈하는 발해인의 숫자가 500명, 100호, 1,000호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929년(대인선 21) 6월에는 발해인 홍견(洪見) 등이 배 20척에 사람과 재물을 싣고 고려에 귀순하였고, 9월에도 발해인 정근(正近) 등 300여명이 귀순하였다.

고려로 들어온 발해인 중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발해 세자를 자칭한 대광현(大光顯)이다. 대광현이 관료와 군사, 백성 수 만 호를 이끌고 고려로 들어오자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姓名)을 내리고 고려 왕실에 적(籍)을 두게 하였으며, 원보(元甫)의 벼슬을 주고 배주(白州)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대광현은 배주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대광현이 데려온 문무 참좌(參佐) 이하의 관료들도 관직에 임명받는 등 고려 태조의 발해 유민에 대한 포용 정책은 상당히 두터웠다. 발해 태자를 위시한 지배 계층들이 고려로의 망명을 결정한 것은 부여의 유속(遺俗)을 잇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려 역시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국명을 고려라고 지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하여 ‘고구려’를 매개로 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멸망 후에 발해의 백성들은 상당 부분 거란에 흡수되어 거란인이 되었으며, 혹은 여진인으로서 살아가거나 중원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유민의 일부는 발해의 터전에서 거란에 대항하며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발해 멸망 직후 발해의 영역에 세워졌던 동란국(東丹國)은 유민들이 아닌 거란이 세운 것으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홀한성(忽汗城) 수도를 두고 홀한성을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꿔 불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요양(遼陽)으로 옮겼다.

동란국이 요양으로 옮긴 후 옛 발해의 영역에는 발해 유민들이 다시 국가를 세웠는데, 이때 세워진 국가를 보통후발해라고 한다. 후발해는 929년 고정사(高正詞)의 파견을 시작으로 936년까지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다. 압록강 유역에도 발해의 유민에 의해서 국가가 세워졌는데, 바로 정안국(定安國)이다. 이 정안국은 열씨(列氏)가 주축이 되어 다스려졌으며, 970년 정안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송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발해가 멸망한 지 100년이 넘은 1029년에는 발해의 왕손 대연림(大延琳)이 흥요국(興遼國)을 세웠다. 대연림은 거란과의 전투를 수행하면서 다섯 차례나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그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흥요국은 양상세(楊祥世)의 배신으로 1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 이미 거란의 영역으로 공고화 된 곳에서 일어난 흥요국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1116년에는 발해 유민 고영창(高永昌)이 대발해국(大渤海國)을 세웠으나 이 역시 5개월 만에 무너졌다.

발해 유민들은 926년 발해 멸망 이후 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을 세우며 계속해서 발해의 부흥을 기도하였다. 흥요국의 경우 발해가 멸망한지 100년이 지난 시점, 대발해국은 20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세워졌다. 비록 그들의 국가 수립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멸망한 지 200년이 거의 다 된 국가의 부흥을 시도하고 ‘대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발해의 유민들이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발해의 부활을 꿈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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