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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당 전쟁

흑수말갈을 둘러싼 양국의 대립

732년(발해 무왕 14)

발해·당 전쟁 대표 이미지

대조영의 발해 건국지, 동모산 전경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발해·당 전쟁은 732년 발해가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발해의 동북 방면에 위치하고 있던 흑수말갈을 둘러싼 문제로 인해 촉발되었다. 발해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흑수말갈이 당에 입조하자, 당 역시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당의 등주를 공격함으로써 양쪽에서 압박당할 수 있는 대외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고자 하였다. 당 역시 발해의 공격에 대응을 준비하였으나, 734년 발해와 협조관계에 있던 거란이 당에 격파되고, 돌궐 역시 혼란에 빠지면서 두 나라는 전쟁을 그만두고 화친하게 되었다.

2 발해와 당의 외교관계 수립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당(唐)의 영주(營州)로 이주되었다. 당시 영주 지역은 당의 동북쪽 변경으로서 고구려 유민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민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696년 거란 추장 이진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영주 지역이 혼란에 빠지자, 당시 고구려 유민집단을 이끌던 대조영은 영주를 탈출하여 당의 추격을 뿌리치고 동쪽으로 가 699년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 건국 집단의 지도자였던 대조영(大祚榮)은 주변 여러 나라에 건국 사실을 알리고 외교 관계 수립을 도모하였는데, 당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705년 당은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와 국교를 맺고자 하였지만 거란과 돌궐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713년에 이르러서야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 발해군왕(左驍衛大將軍 忽汗州都督 渤海郡王)으로 임명하면서 국교를 수립할 수 있었다.

당이 대조영에게 내린 책봉호는 발해에 대한 당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먼저 발해군왕은 ‘발해 지역을 다스리는 군왕’이라는 의미로서, 지금의 발해만을 끼고 있던 발해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따라서 당이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을 제수한 것은 발해만 너머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음으로 홀한주도독은 발해가 건국한 지역에 대하여 기미주와 같은 형태로 편제한 뒤 내린 칭호로 인식할 수 있어, 발해 지역에 대한 당의 인식이 기미주를 통한 간접지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좌효위대장군은 평시에는 당의 궁성을 숙위하고, 전시에는 출정하는 중앙군사조직의 직책이다. 이 역시 주변국이 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궁성을 숙위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길 기대했던 것의 반영으로 보인다.

이러한 당의 책봉 방식은 주변국에 대한 지배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지만, 이것은 당이 설정한 국제 질서의 이념일 뿐이었음을 감안하고 이해해야 한다. 또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발해라는 국명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대외무대 등장

719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왕 대무예(武王 大武藝)가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 발해는 주변 지역으로 활발한 영역 확장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발해의 활동은 721년에 신라가 북쪽 경계였던 하슬라에 장성을 쌓아 방비하게끔 만들었다. 이처럼 발해의 성장은 주변국들을 긴장시켰는데, 당시 발해의 동북방에 위치한 흑수말갈 역시 발해의 세력 확장을 주시하던 세력이었다.

말갈은 고대 만주 지역에 존재하였던 종족이다. 당시 여러 말갈 세력 중에서도 7개의 큰 세력을 일컬어 ‘말갈7부’라고 하였는데, 흑수말갈은 그 중에서도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었다. 고대 말갈의 주 거주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흑룡강성 동부와 러시아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 해당한다. 이곳의 기후는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갈은 반농반렵 생활을 영위하면서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부족한 물자를 보충해야만 했다. 일찍이 발해에 앞서 만주를 호령하였던 고구려는 이러한 점을 잘 파악하여 말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당에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협조했던 말갈은 세력이 크게 약해지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며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던 말갈 세력들의 피해가 컸다. 그러나 이처럼 고구려 주변에 거주하던 말갈 부락과는 달리 흑수말갈은 고구려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멸망의 여파를 상대적으로 덜 받을 수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고지(故地)에 자리 잡은 발해가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팽창하자 흑수말갈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당과의 접촉을 도모하였다. 흑수말갈은 722년 처음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725년과 726년 및 728년에 걸쳐 당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은 흑수말갈 지역을 흑수부(黑水府)로 삼아 기미지배를 시도하였다. 이것은 당이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식 중의 하나로서, 현지에 도독부·주·현 등 당의 지방통치단위를 설치하는 한편, 그 지역의 유력자를 그 장관으로 삼아 다스리는 것이었다. 당의 이러한 조치는 발해를 사이에 두고 당과 흑수말갈이 함께 발해를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흑수말갈과 당의 교섭은 발해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당시 흑수말갈이 당으로 사신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발해의 국경을 반드시 거쳐야했는데, 이때 흑수말갈은 발해에 사행을 알리지 않은 채 당과 접촉했던 것이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발해와 흑수말갈은 동일한 시기에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다. 말갈은 당 뿐만 아니라 돌궐로 향하는 길 역시 발해에게 먼저 알리고는 했다. 양국의 위치나 당으로 가는 경로 등을 고려하면, 당에 대한 발해와 흑수말갈의 사신 파견은 보통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그러나 흑수말갈이 이 무렵부터 발해 몰래 당에 사절을 보내 교섭을 진행하는 등 당과의 연결을 위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당 역시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발해는 양국의 이러한 관계가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흑수말갈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4 형제의 갈등

726년 발해의 왕이었던 무왕(武王)은 동생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문예는 일찍이 당에 인질로 머물다 돌아온 인물로,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이 당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그는 이전에 고구려가 당에 대항하다 멸망했음을 들면서 발해의 국력이 고구려보다 못하므로 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 하며 흑수말갈 공격 중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형이었던 무왕의 강력한 의지로 발해 병력은 흑수말갈을 향해 출병하게 되었다. 대문예는 흑수말갈과의 국경에 이르러 다시 무왕에게 상소를 올려 전쟁을 그쳐 달라 청하였는데, 여기에 노한 무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당으로 도망쳤다. 이후 무왕은 도망친 대문예 대신 사촌 형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 흑수말갈 공격을 진행하게 하였다. 726년부터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게 되는 732년 사이에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 부락과 당의 교섭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이 때 발해의 흑수말갈 공격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자 당은 그를 보호하였고, 대문예의 망명 사실을 파악한 발해 무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문예를 죽여 달라 요청하였다. 당의 황제였던 현종은 몰래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역으로 보내놓고 발해에 그가 영남(嶺南) 지역으로 유배되었다고 거짓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얼마 가지 않아 발해 측에 알려지게 되었고, 무왕은 다시금 당에게 문예를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당은 이번에는 진짜로 문예를 영남 지역으로 보낸 뒤 발해에 거절의 뜻을 알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은 발해 측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뜻을 내비치며 발해를 압박하였고, 발해는 결국 당을 선제공격하는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된다.

5 발해의 등주공격과 당의 반격

732년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 공격으로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당은 등주의 발해군을 공격하고자 군대를 보냈으나, 군대가 도착했을 때 발해의 병력은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또 다음 해 발해는 돌궐의 지원을 받아 당을 공격하던 거란을 도와 요서 지역에 있던 마도산(馬都山)에서 당과 전투를 치렀다. 이에 당은 733년 1월 대문예를 유주(幽州)로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토벌하게 하였다. 또한 신라로 사신을 보내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는 이 해 겨울에 출정하였지만 험한 경로와 추운 날씨로 인하여 전공을 거두지 못한 채 철군하였다. 당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당에 대한 선제공격에 성공한 발해 무왕은 여전히 대문예가 살아있음에 불만을 느꼈다. 이에 다시 자객을 보내 대문예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6 발해와 당을 둘러싼 국제적 배경

이처럼 발해와 당의 충돌은 그리 긴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발해가 당을 선제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양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발해는 자신들과 당 사이에 위치해 있던 거란과 당의 북쪽에 있었던 돌궐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이 무렵 거란은 돌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696년에 일어난 이진충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반란 진압 과정에서 당은 돌궐에 힘을 빌리게 되었다. 돌궐은 이 기회를 틈 타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거란 역시 돌궐을 껄끄러워하는 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거란은 730년 영주를 시작으로 732년에는 유주에서, 733년에는 마도산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732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한 사실은 같은 시기 거란이 당의 동북 방면을 공격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733년의 마도산 전투 역시 732년의 연장선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또 당 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거란은 돌궐·발해와 협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한 사건의 배경에는 당의 대외정책에 대응하여 주변 세력들이 연합한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에 대항하였던 발해, 거란, 돌궐은 일찍이 당에 의해 멸망하여 기미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집단이었고, 당의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이 무측천의 즉위와 그 세력들의 전횡으로 인하여 잠시 주춤한 사이에 이들은 모두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고, 이 무렵 당에 대한 공세로 전환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734년 돌궐의 군주였던 비가가한(毗伽可汗)이 사망하면서 돌궐 내부는 가한의 자리를 두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돌궐은 더 이상 외부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었고, 돌궐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거란 역시 734년 4월에 당군에 격파되어 그 해 12월에 다시 당에 복속되었다. 또한 당의 편에 서있었던 신라 역시 734년에 단독으로 발해 공격을 시도하자, 국제 정세는 발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무왕은 고립무원의 형세를 막기 위해 당과의 화친을 추진하게 되었다. 736년 전쟁에서 사로잡은 당의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당에 화친을 요청했고, 당 역시 억류하고 있었던 발해 사신을 풀어주면서 양국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737년, 당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주도했던 무왕이 사망하면서 발해의 대당 강경외교는 철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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