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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百濟 建國]

마한 땅에 부여의 후손이 나라를 세우다

미상

백제 건국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온조 1년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백제는 부여에서 고구려를 거쳐 남하한 이주민 집단과 일찍부터 한강 하류 유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백제(伯濟)가 결합하여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하여 세운 국가이다. 백제의 건국 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가 많이 남아있다.

2 백제의 다양한 건국 설화와 부여(夫餘)

건국 설화는 신이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러한 이야기도 기본적으로는 사실을 기반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 속에 숨은 의미를 통해 당시의 실제 모습을 일부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 설화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르게 신화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상당히 현실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이야기 전체가 사실처럼 느껴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에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 시조왕 주몽(朱蒙)이 아들 유리(琉璃)를 후계자로 삼자, 유리의 배다른 동생인 온조(溫祚)와 비류(沸流)는 자신들의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시)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고, 동생 온조는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서울시)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온조는 이때 자신을 따라 내려온 신하 열 명이 건국을 도왔다 하여 나라의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가, 이후 비류가 죽고 그의 신하들을 거두면서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 설화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설화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정리되어 전해진 것이 아니라 비슷하지만 다른 요소를 담은 여러 설들이 함께 남아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할주(割註: 본문 밑에 두 줄로 잘게 단 주)에는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가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후손 우태(優台)라고 하고, 주몽은 의붓아버지라고 되어 있으며, 온조가 아닌 비류가 왕으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또 중국의 정사(正史)인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에는 부여왕(夫餘王)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를 백제의 건국 시조로 기록하였다.

이때 『북사』와 『수서』에 구태의 선조로 등장하는 부여왕 동명은 사실 부여뿐만 아니라 고구려 건국 설화와도 연결되는 인물이다. 먼저 부여 건국 설화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동명의 어머니가 하늘로부터 기운을 받아 그를 낳았고, 하늘신의 후손인 동명이 영험한 능력을 바탕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 설화인 주몽신화의 경우 위의 동명신화에서 거의 주인공만 주몽으로 바꾼 채로 설화가 구성되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주몽을 곧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고 있으며, 그 신화 속에는 부여왕 해부루가 등장한다. 이렇듯 역사서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만 이들 설화와 백제의 건국 설화 간에 공통점을 종합해보면, 부여에서 나온 주몽(동명성왕)이 고구려를 세웠으며, 그의 후손이 다시 한반도 중서부 일대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를 보면,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국가의 건국 설화는 왕실 일족이 일반 백성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의 건국 설화 역시 각 설화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도 기본적으로 백제를 건국한 왕실의 시조가 ‘하늘신의 자손’인 부여왕이나 고구려왕의 후손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고구려나 신라의 건국 설화와 다르게 백제의 건국 설화만 평범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백제의 건국 설화 또한 부여 및 고구려 건국 설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았을 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해지는 각 설화마다 그 계보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백제의 건국 설화 역시 어느 정도 각색된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적어도 백제의 건국 설화는 백제 건국의 주체가 부여, 고구려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건국 설화 외에도 백제가 건국하자마자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점,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 주변(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서 발견되는 백제 왕실의 무덤 양식이 고구려와 비슷한 적석총이라는 점, 한참 이후이지만 538년(성왕 16)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던 점 등에서도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한편 백제가 부여 혹은 고구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이들의 건국 설화를 차용했을 뿐이라거나, 백제의 건국시조가 남하한 부여족 계통인 것은 맞지만 양국의 왕족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백제가 부여의 건국 설화를 받아들인 어떤 정치적 의도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제의 건국시조가 어떤 계통이건 간에 적어도 백제가 부여라는 국가와 자신들을 어떻게든 연관시키려 하였음을 분명하다.

3 미궁 속, 백제의 건국 시기: 문헌기록과 고고학 유물의 모순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건국 설화와 함께 건국시점을 전한 성제(前漢 成帝) 홍가(鴻嘉) 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서기전 18년이다. 그런데 이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정사인 『후한서(後漢書)』나 이후 서기 3세기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지(三國志)』에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상황과 관련하여서는 마한에 대한 기록만 있다.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는 백제 건국 전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는데, 이들 집단을 소국이라 불렀으며, 이 54개의 소국들이 모여 마한이라고 부르는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에 마한의 소국 중 하나로 백제(百濟)가 아닌 백제국(伯濟國)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의 모순 때문에 과거에는 백제의 건국 시점이나 초기 상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삼국사기』를 그대로 신뢰하는 입장, 반대로 『삼국지』의 기록을 신뢰하는 입장, 둘을 비교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 등 여러 방향에서 초기 백제의 미스터리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고고학 분야에서 미궁에 빠진 초기 백제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성과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서울 송파구의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 초기 성곽과 무덤 등이 발견되며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유적들을 면밀히 연구한 결과, 현재로서 고대국가 백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의 연대는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이전으로 내려가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결론이다. 또 3세기 이전에 백제 이전의 다른 집단이 이곳에 세를 이루고 살았음도 확인되는데, 기록들에 비춰볼 때 마한의 소국 중 하나였으리라 여겨진다.

다만 이 지역의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은 당시까지 아직 고고학 발굴 기술이 서툴었던 시기에 수습된 것들이라 정확한 연대를 밝히는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때문에 초기 백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고고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백제의 건국시점에 대한 여러 이견이 공존하고 있다.

최근에는 문헌기록과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를 융합하여, 본래 마한의 한 소국이었던 백제국(伯濟國)과 북쪽에서 내려온 앞선 기술을 가진 이주민 집단이 3~4세기경 결합하여 주변을 정복하고 성장하여 백제(百濟)가 되었다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중국 정사인 『주서(周書)』에는 백제왕은 부여씨(夫餘氏)이며 ‘어라하(於羅瑕)’라 부르고,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어, 이 역시 백제가 부여족과 한족(韓族), 두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4 문헌기록과 고고학 유물의 앙상블로 밝혀진 초기 백제의 모습

백제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고학적 성과는 『삼국사기』기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해 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해주어 그 실체를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초기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처음 마한 연맹체의 수장인 목지국과의 우호관계 속에서 동북방의 말갈(靺鞨)이나 백제 주변의 소국(小國)들을 통합하며 차츰차츰 영토를 넓히고 있음이 확인된다. 서기전 6년(온조왕 13)에는 그 영역이 북으로는 패하(浿河: 지금의 경기도 임진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지금의 경기도 안성천, 혹은 충청지역 금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쪽으로는 황해에, 동쪽으로는 주양(走壤: 지금의 춘천, 혹은 평강)에 이르렀고, 이후 서기 9년(온조왕 27)이 되면 마침내 마한을 병합하여 한반도 중서부지역을 통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이 가리키는 시기와 달리 실제 해당 지역에서 발견되는 백제 관련 유물의 연대는 대체로 3~4세기로 추정되고 있어 기록과 시기가 어긋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연대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상대적인 순서만을 살펴본다면 사료상의 흐름과 고고학 성과의 흐름이 대개 일치하고 있다.

고대의 권력자들은 귀한 물품을 통해 위세나 권력을 드러내곤 하였는데, 발굴 성과에 의하면 초기 백제 역시 중원 왕조로부터 청자나 금·옥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관, 허리띠, 신발 등 한반도 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을 교섭의 산물로 받아왔고, 이것을 주변의 지역 수장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그들 위에 군림하며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물품을 ‘위세품(威勢品)’이라고 부른다. 사료에서 초기 백제의 영역이라 추정되는 각 지역 지배층의 무덤에서 이러한 위세품을 다수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시기도 서울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게다가 그 범위는 서기 6년인 『삼국사기』온조왕 13년조 강역기사와 그 범위가 일치하고 있어,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즉, 백제가 정확히 어느 시점에 성립하였는지 단언하기 어려우나 마한의 한 소국이었던 백제국(伯濟國)을 고려하면, 적어도 『삼국지』가 서술하는 3세기 무렵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초기 백제는 북방으로부터 남하해 온 부여계 유이민 집단과 한강 하류 유역의 토착 집단이 결합하여 성립하였고, 이후 중원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확보한 위세품과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주변 세력을 복속시켜나가며 삼국의 하나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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