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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 운동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백제인의 저항

660년(의자왕 20) ~ 663년(풍왕 4)

백제 부흥 운동 대표 이미지

예산 임존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그 뒤 백제 유민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약 4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갔다. 한때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을 고립시키고 백제 왕자 풍(豊)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기사회생하는 듯하였으나 지도층의 내분으로 인해 결국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2 의자왕의 항복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백제인의 저항

백제는 660년 동서 양 방면으로 침공해오는 신라와 당(唐)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백제의 멸망과정에 대해서는 각 기록마다 약간의 편차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갑작스런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당황한 의자왕이 도성인 사비(泗沘 : 지금의 부여)를 벗어나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으로 피신하였다가 당시 웅진을 지키고 있던 웅진방령(熊津方領) 예식(禰植)의 배반으로 사비도성으로 잡혀와 항복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는 당의 군대가 백제를 향해 출병한 지 약 한 달 여 만의 일로, 백제의 지배층은 이렇다 할 저항조차 못해보고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당은 멸망한 백제 땅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백제를 직접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때 백제 고위 지배층과는 대조적으로 지방의 귀족과 유민(遺民)들은 신라와 당으로부터 백제를 되찾기 위해 거센 저항을 한 사실이 확인된다. 대개 전근대국가의 경우 그 멸망 시점을 도성이 함락되고 왕실의 지배력이 붕괴한 때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한 660년을 백제의 멸망 시점으로 보고 있지만, 한 나라의 멸망과 그 영역 전체에 대한 완전한 점령은 또 다른 문제이다. 백제 멸망 이후로도 백제 전역을 장악하고자 하는 나당연합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백제부흥군 간의 싸움이 장장 4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제 유민의 길고도 끈질긴 저항의 과정이었다.

왕이 사로잡혔음에도 백제의 유민들은 지방 각지의 성을 차지하고 버티며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였다.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을 비롯하여, 좌평(佐平) 정무(正武)는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 달솔(達率) 여자진(餘自進)은 중부 구마노리성(中部久麻怒利城)에서,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임존산(任存山)에서,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세력을 모아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이렇게 백제 유민이 부흥 운동을 전개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구당서(舊唐書)』 백제열전과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의자왕조에 의하면, “당과 신라가 약조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 뒤 신라에게 그 땅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자.”라고 기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앞 시기에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 파기되고 양국은 싸움을 거듭하다 결국 김춘추(金春秋 : 신라 태종무열왕)의 딸이 백제군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건 등을 생각해보면, 두 나라 사이에는 깊은 원한이 노정되어 왔다. 따라서 백제 유민이 이토록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했던 것도 사료에 보이는 대로 ‘백제인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흉흉한 소문이 기존 양국의 원한 관계와 결부되어 그저 풍문으로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백제인의 저항은 어떤 이유에서든 결과적으로 나당연합군의 백제 영역 장악과 고구려 정복을 지연시키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3 부흥군의 강렬한 저항과 나당연합군의 대응

사료에서 나당연합군에 맞선 것으로 기록된 백제 유민 중 두시원악의 좌평 정무와 구마노리성의 달솔 여자진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이들의 구체적인 행적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백제 유민의 부흥 운동 과정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백제 유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자, 소정방(蘇定方)은 먼저 600년 8월 26일 임존성을 공격하여 이들의 기세를 꺾어 놓고자 하였지만 당군의 공격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자 당은 백제 유민의 지배 구심점을 제거하고자 사비에서 의자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 백성 12,000여 명을 포로로 삼아 당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 사비성에 잡혀 있는 백제 유민을 되찾고자 나당연합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여기에 주변의 20여 성이 호응하였다. 이처럼 사비성이 포위되자 무열왕은 친히 태자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서 백제부흥군에 호응하던 20여 성을 항복시켰다. 또 사비 남쪽을 포위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을 공격하여 성내의 신라군을 위기로부터 구하는 등 아직 항복하지 않은 백제 지역을 조금씩 장악해 나갔다. 이를 보면 당시까지 나당연합군은 사비성만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지배력을 강하게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복신과 도침은 백제 왕족 대부분이 당으로 끌려가자 부흥군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풍(『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풍장(豐璋))을 귀국시키는 한편, 왜(倭 : 일본을 부르는 옛 이름) 조정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약속받는다. 고구려 역시 백제 부흥 운동에 호응하였는데, 이 사실은 660년 10월 고구려가 백제 멸망을 이유로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 현재 파주)을 공격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백제의 부흥 운동은 단지 백제 유민들만의 싸움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신라와 당의 연합은 주변 국가에게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고, 여기에 고구려와 왜가 뛰어들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후 양측의 싸움은 서로 승패를 반복하며 복잡하게 전개되게 된다.

661년 초에 도침 등이 이끄는 백제부흥군은 풍의 귀국을 기다리며 사비성을 포위하고 금강 입구를 막았다. 부흥군은 성의 탈환을 노리는 한편 유인궤(劉仁軌)를 위시한 당의 원군이 사비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부흥군은 임존성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라군이 부흥군이 지키고 있던 두량윤성(豆良尹城)을 공격하였다. 부흥군은 신라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철군하는 신라군에게 역습을 가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후로도 백제부흥군은 웅진성에서 출격한 1천명의 당군을 대패시켜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하는 틈을 노려 신라에서 웅진으로 향하는 식량보급선을 끊음으로써 웅진을 고립시켰다. 당은 이를 해결하고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승세를 탄 백제부흥군이 웅진 남쪽 지역의 성들을 되찾아 세력을 확장시키는 등 부흥 운동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물론 신라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당의 지원 요청을 받은 문무왕(文武王 : 태종무열왕의 아들)은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 옹산성(甕山城) 정벌에 직접 나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장군 품일(品日)을 보내어 우술성(雨述城)을 함락하고 끊겼던 식량보급선을 회복시켰다. 이처럼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은 서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며 2년 여 동안 백중지세의 형세를 지속하였다.

4 지도층의 내분으로 무너지는 부흥 운동

한편, 나당연합군을 여러 차례 무찌른 백제부흥군은 이 무렵 외부의 적을 두고도 오히려 내부에서 지도층 간에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기록에는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그의 군사를 합쳤으며 왜에서 귀국하여 왕이 된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어, 당시 부흥세력 지도층 내부에 모종의 갈등이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은 이러한 백제부흥군 지도층의 내분을 틈타 부흥군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662년 7월 유인원(劉仁願)과 유인궤는 복신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고 지라성(支羅城)·윤성(尹城)·대산(大山)·사정(沙井) 등의 성책을 빼앗았는데, 이때 죽거나 사로잡힌 백제 유민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신라가 백제부흥군이 장악하고 있는 내사지성(內斯只城)을 공격하며 열아홉 명의 장군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당시 내사지성에 주둔하던 부흥군 세력이 상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백제부흥군은 점차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하였지만 부흥군의 지도층은 여전히 내부의 권력 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부흥군 내부에서는 병권을 장악한 복신과 백제왕 풍이 서로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고, 결국 풍이 복신을 죽이는 것으로 지도층의 내분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무렵 백제부흥군의 군세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때마침 아버지와 함께 당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夫餘隆)이 당군의 일원(別帥)이 되어 백제로 돌아오면서, 임존성에서 부흥군을 이끌던 흑치상지가 당에 항복한다. 연이은 패배와 일련의 내부 투쟁으로 당시 백제부흥군의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이를 간파한 나당연합군은 663년 주류성을 향해 마지막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나당연합군은 부흥운동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주류성을 백강(白江)과 육로를 통해 수륙 양면으로 포위하였다. 이 무렵 참전한 왜병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주류성은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공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지수신(遲受信) 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으나, 임존성 지리를 잘 아는 흑치상지에게 패하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렇게 장장 4년에 걸친 백제의 부흥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백제 부흥 운동의 실패 요인으로는 고구려와 왜의 군사 지원 실패, 식량보급 싸움에서의 패배 등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지배층의 분열로 인한 세력 약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기세를 올리던 백제부흥군이 지배층의 내분과 함께 급속히 무너져갔던 정황을 되새겨 본다면, 만약 부흥군 지도층 내부로부터 분열 없이 합심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면 어떠하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게 된다. 이후 전개되는 당의 국외 정세로 보아 부흥운동이 조금만 더 오래 전개되었다면 전쟁의 흐름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백제부흥군의 저항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남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여 멸망시키려던 당의 전략을 수년간 지연시키고 당이 백제 땅에 설치한 도독부의 활동을 저지하며 결국 당 세력이 한반도로부터 물러나는 데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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