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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와 공인

외래 종교인 불교, 삼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다

미상

불교의 전래와 공인 대표 이미지

이차돈 순교비

e뮤지엄(국립경주박물관)

1 개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삼국에 전래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 시대와 침류왕(枕流王, 384~385) 시대에 불교가 공인되었고, 신라는 이보다 150여 년 늦은 법흥왕(法興王, 514~540) 시대에 불교 공인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삼국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에 불교 공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불교의 공인은 공식적으로 전래된 불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가 삼국에 처음 전래된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전하는 여러 기록을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2 4세기 후반 삼국에 전래된 불교와 고구려·백제의 공인

고구려는 삼국 중에 가장 이른 시기인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가 공인되었다.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에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냈는데, 이때 불상과 경문을 함께 보냈다. 2년 뒤인 374년(소수림왕 4)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왔고, 이듬해 왕은 최초의 고구려 사찰이라고 알려져 있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각각 머물게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에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동진(東晋)의 고승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구려의 도인[高麗道人]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 주목된다. 편지는 지둔 이전에 활동한 중국의 고승인 축법심(竺法深, 286~374)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둔의 생몰년을 고려하면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이전에 중국과 고구려의 고승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소수림왕대 공인 이전에 불교가 이미 고구려에 전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 공인 이후 고구려에서는 393년(광개토왕 2)에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불교가 발전하면서 주요 지역에 다수의 사찰들이 건립되었다고 생각되지만, 관련 기록과 확인되는 유적이 많지 않아 사찰의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고구려의 사찰 유적들은 대부분 평양과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의 경우는 384년(침류왕 1)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이때 동진에서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왔고,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에 들이고 예를 갖추어 경배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한산(漢山)에 사찰이 세워지고 9월에는 열 명의 승려가 배출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백제가 불교 공인 이전인 372년(근초고왕 27)과 373년(근초고왕 28), 397년(근구수왕 5)에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동진의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백제가 동진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침류왕이 적극적으로 동진의 고승을 맞이하고, 이듬해 바로 사찰을 짓고 승려까지 배출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불교가 공인된 한성기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지어진 사찰 유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없다. 527년(성왕 5)에 이르러서야 창건된 대통사(大通寺)가 불교 공인 이후 사료에서 확인되는 백제 최초의 사찰이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은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異次頓)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었다. 하지만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눌지왕대(417∼458)에 고구려로부터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와서 신라에 불교를 전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묵호자는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때 중국 양에서 받은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 수소문하고 있었던 신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또한 왕녀가 병이 나서 위중할 때 묵호자가 향을 피우고 축원해주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한 미추왕 2년(263)에 고구려로부터 계림에 온 아도(阿道)가 궁에 들어가 불법을 행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시 보지 못한 것이라는 이유로 불법을 꺼려하였다. 심지어 사람들이 아도를 죽이려고 하자 아도는 모례의 집으로 도망해 숨어 살았다. 이후 무의(巫醫)가 공주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자 아도가 궁에 들어가 병을 고쳐주었다. 이에 왕이 아도에게 소원을 묻자 그는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세워서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의 복을 빌고자한다고 하였다. 또한 소지왕대(479~500)에 아도가 시자(侍者)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아도가 죽은 뒤에 시자 3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은 경장과 승단의 규율을 모은 율장[經律]을 강독하니, 이에 종종 신봉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한다.

소지왕대(479~500)에도 신라에 불교가 이미 전래된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소지왕은 488년(동왕 10)에 어떤 노인으로부터 겉면에 “글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적혀 있는 편지를 받았다. 왕과 신하는 죽는 한 사람이 왕을 의미한다고 판단하여 글을 열어보니 거문고갑[琴匣]을 활로 쏘라고 적혀 있었다. 궁에 돌아온 왕은 거문고갑에 화살을 쏜 뒤에 그것을 열어보았다. 이로 인해 왕실 내전(內殿)의 향을 피워 불법을 닦는 승려[焚修僧]와 궁주(宮主) 사이의 간통이 발각되었고, 이에 왕은 그들을 사형시켰다. 이 기록을 통해서도 불교 공인 이전 신라 왕실에 승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이차돈의 죽음으로 이룩된 신라의 불교 공인

신라에서 불교는 고구려, 백제와 다르게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공인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법의 확산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이차돈의 죽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법흥왕은 백성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애는 사찰을 만들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527년 천경림에 흥륜사를 짓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흉년과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을 이유로 사찰을 짓는 대규모의 공사를 반대했다. 이차돈은 법흥왕에게 불법의 확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자청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처형당했다. 이때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아나고 그의 머리는 날아서 금강산에 떨어지는 신이한 일이 발생했다. 이 결과 흥륜사는 535년(법흥왕 21)에 공사가 재개되어 544년(진흥왕 5)에 완성될 수 있었다.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서 이러한 갈등이 있었던 이유는 토착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삼국에서는 무교(巫敎)신앙이 행해지고 있었고, 왕과 귀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이후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가 갖춰지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질서가 형성되었고, 기존의 사상과 다른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왕실은 외래사상인 불교를 활용하였고, 귀족들은 왕에게 복속되는 것에 반대하며 종래의 무교신앙을 고수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아도 설화에서 무의가 고치지 못한 공주의 병을 아도가 치료한 것에도 드러난다. 즉 신라의 불교는 기존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귀족 세력과 새로운 사상을 통해 왕권을 중심으로 집권체제를 정비하려 하였던 법흥왕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공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법흥왕의 의도는 흥륜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을 창건한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나제동맹 이후 교류가 활발해진 백제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공인 이전 신라에 전래된 불교는 묵호자와 아도 설화를 근거로 고구려 불교의 영향이 강하였다고 이해된다. 이는 신라 실성왕이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내물왕 46)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521년(법흥왕 8)에 백제의 사신을 따라 처음으로 양에 조공하고, 흥륜사 창건에 미친 백제의 영향을 바탕으로 백제 불교가 신라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백제 성왕은 불교를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불교치국책을 통해 왕권의 안정과 정치·문화적 발전을 도모하였고, 중국 양(梁)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527년 대규모 사찰 대통사를 창건하였다. 이때 대통사의 창건주체가 법흥왕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후대에 와전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대통사 건립에 적어도 협력자로서 관여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신라는 불교치국책을 기초한 백제의 국가 체제 정비와 그 성과 중에 하나로 선진기술 도입을 통해 이루어진 대통사의 창건을 목격하여불교를 활용한 정국 운영의 의지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불교 공인 이후 법흥왕은 529년(동왕 16)에 살생(殺生)을 금지했고, 말년에는 왕비와 함께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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