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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

천년 왕국 신라 일어서다

미상

신라 건국 대표 이미지

황남대총 북분 금관(98호북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주에서 발흥한 사로국(斯盧國)은 진한(辰韓)의 맹주 국가로서 정복 전쟁과 교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키며 진한 제국(諸國)을 점진적으로 통합해 나갔다. 진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을 마무리한 후 4세기 무렵부터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바꾸고 왕호도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 신라 왕경이 있던 경주에서는 월성(月城)이 건설되고 대형적석목곽묘가 축조되는 등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2 사로국의 성장

신라의 전신이 되는 사로국의 성립 과정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초기 기록에 전하는 여러 설화적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서기전 1세기 전반 경주 일원에는 여섯 촌(村)의 주민집단이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이어서 박씨·석씨·김씨 집단이 경주 일대로 연달아 이주해 오면서 서로 우위를 다투었고, 각기 초창기 사로국을 구성하는 읍락이 되었다.

한편,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초기 사로국을 구성하였던 주민집단에 대해 살펴보면 대체로 이들은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무렵 경주 분지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초기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연이어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른 집단이 대체로 경주 동남쪽 방면 울산으로부터 경주로 진입하는 길목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목관묘 유적이 입실리·구정동·조양동과 경주 분지의 탑동·황성동·덕천리 등에 분포해 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육로를 통해 내려온 집단과 울산 지역으로부터 해상을 거쳐 올라온 집단의 서로 다른 두 계통의 문화가 경주에서 만나는 양상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사로국이 진한의 중심세력이 부상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사로국은 초기국가를 성립시킨 이후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여 진한(辰韓)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해 갔다. 진한 사회가 성립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세기까지 소급되는데, 사로국은 이러한 진한의 12개 나라를 점차적으로 아우르며 맹주로 성장하였다. 한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는 대략 2세기 무렵이 되면 한(韓)과 예(穢)가 성장하여 군현(郡縣)에게 위협이 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 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해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진한 사회 또한 한(漢)의 군현에 위협이 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3 사로국에서 신라로

3세기에 이르러서도 사로국은 여전히 진한 12개 나라 중 하나인 ‘사로국’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313년·314년에 걸쳐 고구려가 그 남쪽의 낙랑군·대방군을 차례로 붕괴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정세 변동은 한반도 남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군현의 붕괴와 함께 발생한 대규모 유민이 한반도 남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변동에 대응하여 진한 사회 내부에서도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통합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과정을 통해 진한 사회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고, 이것은 곧 신라의 성립으로 전개되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등의 중국 측 사서에서는 382년 신라 사신 위두(衛頭)가 전진(前秦)을 방문하여 전진의 3대 황제 부견(符堅)을 만났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부견은 위두에게 “해동의 사정이 이전과 다르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이냐?”라고 물었는데, 이에 위두는 “중국에서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곧 진한 12개국 중 한 소국으로 존재하였던 사로국과는 확연히 달라진 신라의 위상과 자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이 무렵 사로국이 진한 사회에 대한 통합을 상당 부분을 진척시켰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늦어도 4세기 후엽에는 ‘광역의 신라국’이 성립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면 사로국이라는 기존의 이름 대신 ‘신라’라는 새로운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즉 진한 12개 나라 중 하나였던 사로국이 진한 사회를 통합해 나가며 새롭게 신라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신라에서는 군주에 대한 칭호도 단순히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에서 정치적 수장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띄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신라’라는 새로운 정치체에 걸맞은 군주호가 등장한 셈이다. 이러한 변화 또한 당시 신라 사회 내에서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4 사로국의 진한 통합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는 주변 소국에 대한 신라의 통합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탈해왕(脫解王: 57~80) 시대에 우시산국(于尸山國: 지금의 울산시)과 거칠산국(居漆山國: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 일대)을 정복하였다. 이후 파사왕(婆娑王: 80~112) 시대에는 굴아화촌(屈阿火村: 지금의 울산시)·음즙벌국(音汁伐國: 지금의 경주시 안강읍 혹은 포항시 흥해읍)·다벌국(多伐國)을 정복하는 한편, 실직곡국(悉直谷國: 지금의 강원도 삼척)과 압독국(押督國: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 항복해왔다. 다음으로 지마왕(祇摩王: 112~134) 시대에는 압독국을 재정복하였고, 벌휴왕(伐休王: 184~196) 2년(185)에는 소문국(召文國: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을 정복하였다. 조분왕(助賁王: 230년~247) 2년(231)에는 감문국(甘文國: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을 정복하였고 7년(236)에 골벌국(骨伐國: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이 항복해왔다. 이후로 첨해왕(沾解王: 247~261) 시대에는 사량벌국(沙梁伐國: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을 정복하였고, 유례왕(儒禮王: 284년~298) 14년(297)에는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을 정복하였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이상의 사실들은 사로국의 영토 확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 한편, 신라의 성립·성장의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들 기록에 나타나는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들 정복·복속 기사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기사의 연대를 그대로 신뢰하지만, 수정론의 입장에서는 연대를 수정하여 실제 정복·복속이 진행된 시기를 기원후 3~4세기로 파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수정론을 따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로국’에서 ‘신라’로 변화·발전해가는 시점을 대략 4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위에서 정리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은 신라가 진한의 여러 소국을 통합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료 상에 나타나는 통합의 순서를 그대로 존중하여 따른다면 신라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한 사회를 통합해 갔다. 먼저 신라는 동해안 연안에 위치한 세력을 가장 먼저 정복·복속하였다. 이후 낙동강을 향해 흐르는 금호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여 낙동강 중류 연안의 동쪽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런 다음 서북쪽으로 진출하여 낙동강 서쪽의 가야 지역을 제외한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을 세력권 내에 편입시키며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전개된 신라의 영토 확장 과정은 고고학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3세기 말 또는 4세기 초 무렵이면 경주 주변 인접지역에서 고대 경주 지역 특유의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덧널무덤)인 ‘세장방형(細長方形: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동혈주부곽식(同穴主副槨式) 목곽묘’, 즉 소위 ‘신라식 목곽묘’라고 불리는 무덤 양식이 출현하여 유행하였다. 무덤 내부에는 대체로 곡옥(曲玉)을 중심으로 한 위세품(威勢品)과 조기(早期) 신라 토기 및 철제갑주 등의 중장무기가 부장되어 있다.

이후 4세기 전반으로 가면서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가 출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총(高塚, 흙을 높게 쌓아올린 옛무덤)’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무덤이 출현한다. 여기에는 금으로 만든 공예품을 위주로 한 부장품과 초기 신라양식 토기가 부장되었는데, 이러한 부장품은 곧 낙동강 동쪽 지역 전반에 걸쳐 각지 고총들 안에 부장되었다. 이러한 토기와 위세품이 출토되는 무덤들은 대체로 금호강 이남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금호강 이북의 낙동강 동쪽 및 서쪽 지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흔적을 통해서도 대략 4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면 신라가 이들 지역을 장악하고 영역 지배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5 교역로를 통한 경제적 성장

신라의 주체가 된 사로국의 초기 영역은 오늘날 경주시 일대의 명활산·남산·소금강산·선도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해당되며, 서천·남천·북천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중심 권역을 이룬다. 이 중심 권역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형산강을 따라 포항으로 연결되고, 동남쪽으로는 남천의 상류를 따라 올라가면 울산으로 흐르는 태화강 지류와 만나 동남 해안으로 연결된다. 서남쪽으로 서천을 따라가면 지금의 양산시 일대를 지나 낙동강 하구로 연결된다. 서쪽으로는 형산강 지류인 대천을 따라 나아가면 금호강의 상류인 영천시에 도달하며, 여기서 다시 금호강을 따라가면 경산과 대구를 지나 낙동강으로 연결된다. 또한 영천에서 북쪽으로는 의성 지역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상주와, 북쪽으로는 예천·안동·영주 지역으로 연결된다. 이렇듯 사로국이 자리 잡은 경주 일대는 다방면으로 외부와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고, 울산·양산에 위치한 철 생산지와도 가까워 철 유통에 있어서 큰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3세기 이전까지 경주의 사로국은 구야국(狗倻國, 금관가야)과 영남 지역의 교역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야국은 낙동강 하류 수운 교통의 요충지인 김해 일대에 위치하고 있어 사로국만큼 교역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3세기 말 이후로 사로국은 낙동강 동쪽 지역에서 점차 구야국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양상은 곧 ‘광역 정치체’로서의 신라의 출현을 의미한다.

김해 구야국의 경우 사로국에 비하여 보다 안정된 교역로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안정적으로 부의 축적이 가능했던 탓에 세력 확장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 사로국은 다양한 교역로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들 교통로를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공세를 통해 주변의 경쟁세력에 대해 우위에 서야만 했다. 초창기 사로국이 세력 팽창과정에서 가장 먼저 진출한 지역이 동남해안 일대 및 낙동강 중류 유역으로 통하는 금호강 유역이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교역로의 확보를 의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전 전략을 통해 주변 정치 세력체를 복속시키면서 사로국은 점차 ‘신라’라는 광역의 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월성의 축조와 고총의 등장

사로국이 성장하여 ‘신라’가 된 이후 광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우뚝 선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고고학적 현상은 월성의 축조와 적석목곽묘 무덤 양식이 발전을 거듭한 결과 나타난 고총 무덤 양식이다. 특히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 고총 단계로의 전환되는 현상은 ‘마립간 체제’의 성립과 흐름을 같이 한다.

신라 성립 이후로 중심지인 경주 일대와 지방사회 각 요충지에는 토성이 축조됨으로써 지배집단과 일반민의 거주 공간이 구분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경주 월성(慶州 月城) 축조와 관련하여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22년(101년) 조에는 “2월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이름 하였다.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이거하였다”는 기록 이 보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고고학 조사 결과 월성의 축조는 기록보다는 늦은 3세기 이후로 파악되었으며, 이를 통해 늦어도 3세기 말에는 월성의 축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사로국이 주변을 복속해나가던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 때문에 월성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거처이자 방어 시설로서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월성 주변에서는 사로국 시기의 주거지와 초기 고분부터 후대 마립간 시기 고분에 이르기까지, 즉 사로국과 신라 성립기를 아우르는 생활 유적이 널리 분포해 있다. 하지만 이 일대에 월성이 축조되면서 사로국 시기 주거 공간은 점차 사라지고 고분 구역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월성에 거주하는 지배층이 그 일대를 일반 백성과 격리된 자신들만의 생활 구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지배 집단의 독점적 우월성을 확보하려 했음을 말해준다.

한편 월성의 배후 지역을 비롯한 주변에는 도당산 토성·남산 토성·명활산 토성 등이 연이어 축조되었다. 이들 토성은 왕성인 월성에 대한 보조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남당회의(南堂會議)를 열거나 또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활용되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월성 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은 신라의 성립을 말해주는 징표이다. 이것은 곧 이 무렵 신라 왕권이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조직하고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었고, 또한 이러한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운영시킬 수 있는 집권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적 조직체로서의 신라’ 성립을 상정할 수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적석목곽묘가 출현하게 되면서 대형 고분이 월성 북편에 밀집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대형목곽묘들이 경주 전역에 걸쳐 분포했던 이전 시기와 달리 월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한편에서만 지배층의 무덤이 집중하여 나타난다는 것은 곧 신라의 지배집단이 월성을 중심으로 결집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진한을 구성하던 여러 소국은 나라 이름과 주권을 상실하며 점차 신라의 지방으로 편제되어 갔고, 사로국과 지방 소국의 관계는 왕경(서울)과 지방의 관계로 재편되었다. 그에 따라 영남 지역 일대의 정치력과 경제력은 차츰 왕경으로 집중되어 갔지만, 아직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탓에 지방의 토착지배층 또한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대신 신라의 중앙 권력은 지방 세력에게 일정량의 공납을 부담시키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간접 지배’를 통해 지방을 다스려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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