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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당 전쟁

‘약소국’ 신라(新羅), ‘강대국’ 당(唐)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다

미상

신라·당 전쟁 대표 이미지

매소성 전투

전쟁기념관

1 개요

신라·당 전쟁은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한 이후, 신라(新羅)와 당(唐) 사이에 영토 문제가 원인이 되어 발발한 전쟁이다. 신라는 오골성(烏骨城) 전투를 통해 전쟁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당의 적극적인 반격에 의해 석문(石門) 전투와 칠중성(七重城)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나당전쟁의 전환점이 되는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왔다. 676년(문무왕 16) 11월에 이르러 기벌포(伎伐浦)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며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

2 당(唐),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648년(진덕왕 2) 당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이후 신라와 당은 연합하여 660년(태종무열왕 7)에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는 멸망시켰다. 이로써 삼국 가운데 유일한 승자가 된 신라는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랐지만, 당이 고구려·백제를 이어 신라마저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보이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신라와 당이 처음 군사동맹을 체결할 당시, 당태종(唐太宗)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고 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당은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약속과 달리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고구려·백제 땅을 직접 통치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은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고, 의자왕(義慈王)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하여,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을 주도함으로써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신라와 당 사이의 영토문제는 나당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나아가 나당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 중에는 영토 문제뿐만 아니라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군령권이 당에 의해 침해당하면서 신라왕과 신라 군부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던 점, 그리고 당시 전략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비열홀(比列忽)을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으로 신라 군부에 불만이 쌓였던 점 등도 나당전쟁이 시작되는 데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외에도 토번(吐蕃)이 성장하여 실크로드를 공격하자 당의 대외정책의 우선순위가 한반도에서 서역으로 변경되었고, 이 기회를 틈타 영토문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신라가 당을 공격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3 나당전쟁의 시작과 전투 양상

670년(문무왕 10) 3월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세력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2만의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을 오골성 전투라고 한다. 신라는 오골성 전투로 나당전쟁 초기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670년(문무왕 10)에 발생한 오골성 전투를 나당전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신라가 오골성에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최소 2달간의 행군과 그 이전부터 준비기간이 필요하므로, 나당전쟁의 시작을 669년(문무왕 9)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나당전쟁의 시작을 669년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오골성 전투를 나당전쟁이 본격화된 시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라는 나당전쟁을 시작하기 전,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였다. 668년(문무왕 8) 급찬(級湌) 김동엄(金東嚴)을 왜(倭)에 보내 왜와 국교 재개를 모색하였으며, 669년(문무왕 9) 2월에는 신하들에게 교서를 내려 중죄를 범한 범죄자를 제외한 죄수를 사면하고, 백성 가운데 부유층에 곡식을 빌려 이자부담으로 인해 사노비로 전락할 자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나당전쟁을 앞두고 대외적으로는 왜와 외교창구를 열어 혹시 모를 왜의 침입을 대비하고, 대내적으로는 사면과 진휼(賑恤)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고연무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 같은 해 7월부터 백제의 옛 땅을 전격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신라가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당은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설인귀(薛仁貴)를 대장으로 삼아 병력을 투입하였다. 당의 구원군은 671년(문무왕 11) 6월 백제의 옛 땅인 석성(石城)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석성 전투에서 신라는 당의 구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점령 계획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같은 해 7월 신라는 백제의 옛 땅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진왕(眞王)을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였다. 설오유·고연무 부대가 요동으로 진출하여 주의를 끌고 있는 사이에 신라의 주력부대는 백제의 옛 땅에 전면공격을 감행하여 영역화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고구려의 옛 땅에서는 670년(문무왕 10) 3월에 설오유·고연무 부대가 요동으로 선제공격을 가하였고, 같은 해 4월에는 검모잠(劍牟岑)에 의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당은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東州道行軍)으로,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燕山道行軍)으로 삼고 4만의 병력을 편성하여 요동과 한반도로 진군시켰다. 이들은 671년(문무왕 11) 7월 안시성(安市城)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하고 평양에 이르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후 신라와 당은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공방전을 이어갔다.

672년(문무왕 12) 신라와 당은 석문(石門)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장창당이 병영을 따로 하고 있다가 당군 3,000명을 사로잡는 공을 세우자, 신라의 다른 부대들도 분산하여 주둔하려 하였다. 신라군의 진영이 미쳐 완성되지 않은 틈을 타 당군이 공격하였고, 신라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석문 전투에서의 패배로 신라는 당에 사죄사(謝罪使)를 파견하는 한편, 당에 대한 전략을 공세에서 방어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석문 전투 패한 이후부터 673년까지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진행하여 당군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임진강을 경계로 전선이 고착되며 전쟁이 장기화되자, 이를 타계하기 위해 당은 674년(문무왕 14)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행군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유인궤는 675년(문무왕 15) 2월 칠중성(七重城)에서 신라군을 격파하고 귀국하였으며, 신라는 칠중성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당에 다시 사죄사를 파견하였다. 유인궤가 귀국하자 이근행이 유인궤를 대신하여 매소성 일대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이어나갔다.

4 신라의 반격과 매소성·기벌포 전투

675년(문무왕 15) 무렵 신라와 당 사이의 전선은 주로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되었다. 신라는 경제적·전술적으로 중요한 한강 유역을 지키는데 주력하였고, 반대로 당은 이곳을 점령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설인귀의 수군이 675년 9월 함대를 이끌고 한강 하구의 거점인 천성(泉城)을 공격하였다. 설인귀 함대는 신라 사람으로 당에서 숙위학생(宿衛學生)을 하던 풍훈(風訓)을 길잡이로 삼아 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에 의해 격퇴되었다.

천성을 공격한 설인귀의 함대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계에 견해가 나뉘는데, 크게 보급함대로 보는 견해와 전투함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설인귀 함대를 보급함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설인귀 함대가 한강 하구의 천성을 장악하여 임진강 수계를 통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의 보급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이에 반해 전투함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천성을 공격하여 한강 하류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된 전선을 한강으로 재조정하기 위한 의도로 보고 있다.

천성 전투에 이어 같은 해 9월 29일 매소성 전투가 전개되었다. 매소성은 성 부근에 대군을 수용할 만큼의 넓은 들판이 있고, 한탄강을 면하고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 또 한탄강 하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임진강 유역 최대 요충지 중 하나인 칠중성으로의 접근할 수 있으며, 육로를 따라 남하하면 한강 이북의 주요 거점인 양주(楊州)와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매소성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당군의 수는 무려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20만이라는 숫자를 신라 측의 과장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매소성 전투는 당군의 규모나 전술적 위치로 보나 나당전쟁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전투였다. 신라는 이러한 매소성 전투에서 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전쟁에서 쓰는 말 3만여 필과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를 획득하였다. 또한 이후 전투에서 18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6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신라에게 있어 매소성 전투의 승리는 나당전쟁 전체 국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한 당에게 새로운 악재가 닥쳐왔다. 676년(문무왕 16) 윤3월 토번의 공격으로 당 내지(內地)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은 교통로의 단절과 군사력의 약화 등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결국 전략을 전환하여 고착상태에 빠진 신라 전선을 포기하고 토번 전선에 주력하게 되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한 당은 676년(문무왕 16) 11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리고 당으로 안전한 철수를 도모하기 위해 기벌포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처음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 수군이 설인귀가 이끄는 당 수군에게 연이어 패배하였으나,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당군을 격퇴하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당은 기벌포 전투의 패배로 서해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위치를 잃어버렸다. 이에 반해 신라는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승리로 종결하게 된 것이다.

당은 676년(문무왕 16)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에 패하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670년부터 본격화한 나당전쟁은 675년 매소성 전투를 거쳐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마침내 종결되었다.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는 당의 야욕을 분쇄하였으며, 고구려의 일부 영역과 백제 땅을 확보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흡수·포용하면서 ‘삼한일통’의 역사적 위업을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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