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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암 회의[政事巖 會議]

나랏일을 논하는 백제 최고의 귀족 회의

미상

정사암 회의 대표 이미지

천정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백제의 귀족회의.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백제에서 귀족의 대표인 재상을 선출할 때, 정사암(政事嵓)이라는 바위에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써서 선택된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고사는 백제가 재상 선출 등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일정한 장소에서 논의하였으며, 귀족이 백제 정치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정사암 회의는 신라의 화백회의나 고구려의 제가회의와 비교되고는 한다.

2 정사암(政事嵓) 고사를 통해 본 백제의 정치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 제2의 남부여(南扶餘)·전백제(前百濟)·북부여(北扶餘)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또 호암사(虎嵓寺)에는 정사암(政事嵓)이 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宰相)을 의논할 때에 마땅히 뽑을 만한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국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정사암이 있던 호암사는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에 위치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8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조 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검토하였을 때, 현재 부여 북쪽의 금강과 지천(之川)이 합류하는 규암면 동쪽의 천정대(天政臺 : 시도기념물 제49호)가 정사암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곳은 당시 백제 사비 도성 북쪽에 위치하는 곳이다. 즉 위의 기록에서 말하는 회의가 사비 도성 근처의 정사암에서 진행되었다면, 이는 백제가 사비에 도읍을 두고 있던 때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기록과 같은 회의 자체는 연구자에 따라 백제가 한성(지금의 서울)에 도읍하던 시기 말까지 소급해서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정사암에서 진행된 논의에 대해 재상 선출에 관한 내용만을 전하고 있지만, ‘정사암’이라는 명칭에 비추어 볼 때 이곳에서는 재상 선출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사도 함께 논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사암이라는 이름 자체가 정사(政事)를 하는 바위라는 의미인데, 정사는 보통 정치에 관한 일, 관리의 임명 또는 해임에 관한 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 지리지에 백제 때 임금과 신하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는 없으나, 정사(政事)·재상 선출·재계 등 모두 국가의 중대사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당시 정사암에서 진행된 회의는 백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이처럼 국가 중대사가 논의된 장소로서 정사암 역시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신라에서도 나라의 큰일을 모여 논의하는 신성한 땅[四靈地]을 두고 있었다는 기록도 참고가 된다.

이처럼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는 회의가 특정한 장소, 즉 ‘신성한 땅’에서 이루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신성한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권위와 신성성을 그곳에서 결정한 사항과 연결하여 이곳에서 결정된 사안 자체에도 그와 같은 권위와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곧 국왕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함부로 바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 정사암에서 진행된 절차와 관련하여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상자에 넣어 도장이 찍힌 자가 재상이 된다는 부분은 마치 현대의 투표제도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위의 기록만을 통해 당시 백제에서 재상을 선출하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 과정에 왕의 역할은 크게 드러나지 않고 마치 후보자 서너 명을 대상으로 하여 이 중 한 명을 뽑는 귀족들만의 특정한 절차가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백제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은 국가 최고 지배자인 왕의 의지와 함께 귀족들의 합의 또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백제의 정치 운영에 귀족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고구려 제가회의, 신라 화백회의에 비춰본 정사암 회의

정사암에 대해 전하는 『삼국유사』 기록을 통해 당시 백제에서 귀족들의 영향력이 상당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결정된 사안은 왕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록이 매우 희소한 탓에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시기와 회의 성격이 반드시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고구려와 신라에도 귀족들이 주도한 회의가 존재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동시기 고구려와 신라의 귀족 회의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살펴본다면 백제 정사암 회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에 모두 존재하였던 귀족회의의 기원은 백제·고구려·신라가 부족연맹체(부족국가)였던 시기까지 올라간다. 고대 국가는 처음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연맹체를 이룬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두각을 나타낸 유력한 부족에서 왕을 배출하고, 다른 부족들은 자연히 그 아래에 자리하며 점차 왕권 중심의 국가 형태로 나아간다. 다만, 처음부터 왕의 권력이 주변을 강력히 통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권이 성립한 이후로도 여전히 유력 부족 출신 귀족들의 힘을 무시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왕실을 중심으로 연맹을 형성하였던 부족의 대표자들과 연맹체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이른바 ‘수장 회의’가 구성되었다. 각 부족이 하나의 국가 아래 흡수된 이후에도 위와 같은 회의의 형식은 남게 되었고, 그 구성원은 권력을 가진 귀족들로 대체되어 곧 귀족회의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고구려의 ‘제가회의[諸加評議]’ , 신라의 ‘화백회의’ 가 대표적이다.

고구려 제가회의의 경우, 처음에는 왕 또한 계루부(桂婁部)라는 부(족)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왕권이 강화되고 왕의 위상이 초월적인 존재로 부상함에 따라 왕은 제가회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고, 회의는 왕의 신하가 된 유력 귀족들이 모여 재판 등 국정을 논의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자연히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이더라도 국왕의 최종 승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제가회의는 여전히 고구려 국정운영의 중요 기구였으며, 제가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에 대해서는 국왕은 또한 이를 존중하여 함부로 거부할 수 없었다. 곧 제가회의는 왕권을 제약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귀족 집단의 대표를 선정하는 일은 왕권이 강할 때는 왕권의 의지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는 왕의 의사보다는 귀족들의 합의가 중요하였던 것 같다. 고구려 후기에는 귀족의 대표를 대대로(大對盧)라고 불렀는데, 귀족들 가운데 힘 있는 자가 스스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왕의 임명을 거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후기에도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이 지속되었으며 그만큼 귀족의 권한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신라 역시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귀족들이 모여 논의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 화백회의의 특징은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논의가 중지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만장일치제’였다. 이때 최고 관등이자 화백(귀족)회의 의장이었던 상대등(上大等)의 성격 및 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중요하게 검토되어 온 주제이다. 신라에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왕이 의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상대등이 설치되면서 왕은 더 이상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상대등이 귀족들의 대표로서 의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상대등의 정치권력이 왕권의 추이와 반비례한다고 이해되어 이를 전제왕권과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상대등도 새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왕권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석이 갈리는 이유는 고구려와 달리 신라의 상대등이 왕의 가까운 친척이자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고구려·신라의 귀족회의와 비교해 볼 때, 물론 차이는 있었겠지만 백제의 정사암 회의도 비슷한 양상으로 역사가 전개되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정사암 회의 역시 처음에는 부족장들이 모인 수장회의로 시작하여 왕권의 성립 이후 귀족회의로 변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왕의 의사가 일정 부분 배제된 채 진행되는 모습을 볼 때, 당시 백제에서도 귀족 집단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백제 역시 회의 의장이 당시 최고위 관등 소지자였으며, 그와 왕권의 관계가 정치구조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정사암 회의와 백제 최고의 관등 ‘좌평’

백제의 최고 관등은 좌평(佐平)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전지왕 조의 상좌평(上佐平) 임명 기사에서 상좌평을 고려의 총재(冢宰), 즉 재상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상=좌평’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기록에서처럼 논의하여 결정하였다는 재상은 결국 ‘좌평 임명’에 관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다만 좌평은 여러 기록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확인된다. 단순히 좌평이라 언급되기도 하지만, 상·중·하좌평 , 직무를 명시한 내신좌평·내두좌평·내법좌평·위사좌평조정좌평·병관좌평 6인 , 좌평 5인 으로 형태와 정원(定員)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해당 기록들이 반영하는 각각의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보통은 좌평이 상·중·하좌평으로 분화하고, 사비기에 5인으로 증가한 뒤, 다시 사비기 후반에 6좌평으로 분화했다고 이해된다.

이때 좌평(재상)이 3~5인 정도의 복수로 나타나므로, 이들이 정사암 회의의 대표적인 구성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좌평이 5인으로 분화하는 시점까지는 귀족회의인 정사암 회의의 구성원으로서 귀족의 대표이자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에 가까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제의 정치구조는 좌평을 특정 직무에 종사하게 하여 관료화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적 특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6인의 좌평에게 맡긴 직무는 당(唐)의 3성 6부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보다는 『주례(周禮)』 6관(六官 : 天官, 地官, 春官, 夏官, 秋官, 冬官)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즉 좌평의 변화상을 통해 백제의 정치권력이 점차 귀족 중심에서 왕 중심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귀족은 나라의 재상을 스스로 선출할 정도로 힘이 있었지만, 점차 왕권에 종속된 관료로서 변화해 나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정사암 회의의 기능과 위상도 축소되어 갔을 것이다.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시대에 좌평을 41명이나 임명하였던 것도 이러한 과정의 흐름에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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