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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의 난

가야의 패권을 차지하라!

미상

포상팔국의 난 대표 이미지

함안 말산리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3세기 전반 후한(後漢)이 멸망하면서 동아시아 전역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군현(한사군)과 활발히 교역하던 변한 지역 정치체들이 받은 영향은 매우 컸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경남 해안에 자리 잡은 8개의 국가가 모의하여 일으킨 전쟁이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이다. 이들 8개국은 연합하여 가라(혹은 안라)를 공격하였는데, 가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신라가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포상팔국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들 8개국은 대부분 주변국에 흡수되거나 멸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은 전기가야연맹의 중심이었던 가라(금관가야)가 쇠퇴하고 안라 등 내륙 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가야 사회가 전기가야연맹에서 후기가야연맹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이 되었다.

2 포상팔국의 명칭과 위치

포상팔국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보인다. 그러나 8개국 중 국명을 알 수 있는 것은 5개국으로 골포국(骨浦國)·칠포국(漆浦國)·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自國)·사물국(史勿國)·보라국(保羅國)이다. 이들은 대체로 경상남도 해안에 위치하여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보통 골포국은 창원 마산합포구로, 칠포국은 함안 칠원면으로, 고사포국은 고성 지역으로, 사물국은 사천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라국의 경우에는 전라남도 나주의 발라(發羅)로 보는 견해 또는 섬진강 하구 부근에 위치한 문모라(汶慕羅) 섬으로 비정하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지만 확실치 않다. 한편 함안에 위치한 안라국이 8국 중 하나로서 가라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는 견해도 있다.

3 전쟁의 배경

변한 12국은 중국 군현(낙랑군·대방군)과의 교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3세기 전반 후한이 붕괴하고 중원 세력이 분열하면서 동아시아 전역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변한의 여러 국가도 정치적 성장 방향의 전환을 도모하게 되었다. 당시 진한(辰韓) 지역에서 사로국(斯盧國)이 진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처럼 변한 지역에서도 각 소국들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급기야 변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상남도 해안에 위치한 8개국이 모의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흔히 ‘포상팔국의 난’이라고 부른다.

4 공격을 받은 나라는 가라인가, 안라인가 : 1차 전쟁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조에는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팔국이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안라가야, 지금의 함안)을 치니, 아라에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내음(奈音)을 시켜 부근의 군과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하여 8국의 병사들을 패퇴시켰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조에는 포상팔국이 가라(금관가야, 지금의 김해)를 공격할 것을 모의했다고 되어있어 포상팔국의 공격 대상이 아라인지 가라인지 불명확하다. 이에 대하여 정약용은 『강역고(彊域考)』에서 ‘아라(阿羅)’를 ‘가라(柯羅)’로 고쳐 읽고 물계자전의 기사가 잘못되었다고 보았는데, 이후 다수 연구자가 ‘가라설’을 지지하고 있다.

신라본기 기록을 신뢰하는 연구자들은 물계자전의 ‘아라’를 ‘가라’의 오기로 본다. 이러한 견해를 따르자면, 포상팔국 전쟁에서 연합한 8개국의 공격을 받은 국가는 가라가 된다. 당시 가라(금관가야)는 낙동강 수계와 경남 해안의 교역권을 장악하며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국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중원 지역의 정세 변동의 여파가 낙랑·대방군에까지 미치면서 해상 교역을 통한 이득이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가야 지역에 대한 가라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상팔국은 이 기회를 틈타 연맹의 주도권과 교역권을 빼앗아 오기 위하여 금관가야를 공격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내해이사금 6년(201) 2월에 가야가 신라에 화친을 청해왔다는 기록도 전하는데, 이것은 가야가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할 목적에서 신라에 화친을 청했던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포상팔국의 침공을 막아낸 이후인 내해이사금 17년(212)에는 가야가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고 전하는데, 이 사건도 포상팔국 전쟁에 신라가 개입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의 ‘아라’를 ‘안라(安羅)’로 파악하여,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은 국가가 안라라고 이해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전쟁의 시점을 3세기 후반으로 비정하며 발발 배경은 해상교역권이 아닌 내륙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전쟁을 일으킨 포상팔국이 해안가에 위치하면서 해상 교역을 통해 성장하였던 나라들로 추정되는 만큼, 다시 해상교역권 확보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해상 교역이 축소되어 가는 당시의 정세 변화에 발맞춰 8개국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농경을 중심으로 한 국가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를 위한 내륙으로의 영토 확대를 위한 진출로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포상팔국이 내륙으로 가는 교통로에 있던 안라를 공격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5 전쟁의 전개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포상팔국이 일으킨 전쟁은 3차에 걸쳐 확인된다. 첫 번째는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팔국이 가라를 공격하였다는 신라본기의 기록이며, 두 번째는 『삼국유사』 물계자조에서 212년(내해이사금 17) 보라국·고자국·사물국 등 8국이 신라 변경을 공략한 기록이다. 세 번째는 215년(내해이사금 20)에 골포국 등 3국이 지금의 울산 지역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먼저 1차 전쟁은 포상팔국이 공모하여 가라 혹은 안라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공격을 받은 가라(혹은 안라)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파견된 신라군은 8국의 장병(將兵)을 격살하고 포로 6천 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 전한다. 즉 신라는 포상팔국과 가라(혹은 안라)의 전쟁에 개입하여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번째 기록인 『삼국유사』 물계자조의 신라 변경 공략 기사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8국이 가라(혹은 안라)를 공격한 기사와 동일 기사로 보는 연구자가 많다. 일단 전하는 시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면 포상팔국이 공격 주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신라의 태자와 장군이 구원하였다는 점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3년여 후 포상팔국 중 3국이 현재 울산 지역인 신라 갈화성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물계자전에 기재되어있는데, 『삼국유사』 물계자조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으로부터 3년 후 포상팔국 중 3국이 갈화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전한다.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았을 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기록은 동일한 전쟁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포상팔국이 가라(혹은 안라)를 침공하였다가 패배하고 3년 후 다시 침공한 지역은 신라의 갈화 지역으로 현재의 울산 일대로 비정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전투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같은 내용이 전하고 있다. 즉 3국이 연합하여 지금의 울산 지역을 침공해 오니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를 격퇴하였다는 것이다.

6 전쟁의 결과

전쟁을 일으킨 포상팔국은 가라(혹은 안라)와 신라를 연이어 침공하였지만 모두 격퇴당하였다. 그 결과 포상팔국은 몰락하거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전쟁 이후로 창원의 골포국은 탁순국으로 바뀌게 되고 고사포국은 고자국(古嵯國)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칠포국은 인근의 아라가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격을 받은 국가를 가라로 간주하는 연구자들은 전쟁에서 가라(금관가야)가 승리하였지만, 연맹 내에서 가라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을 것으로 본다. 즉 전쟁 과정에서 신라의 구원을 받았던 가야는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국가의 위상도 크게 실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가야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연맹 내에서의 위상은 점차 추락하여 마침내 전기가야연맹이 분열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반면, 공격을 받은 국가를 안라로 추정하는 연구자들은 안라가 포상팔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내륙의 농경지대를 사수하였고, 이를 기회로 주변 소국을 흡수하여 세력 확장에 성공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안라국이 가야 지역의 여러 소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후기가야연맹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본다. 결국 포상팔국의 난을 극복한 안라가 이를 기회로 국가 성장의 큰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포상팔국 전쟁은 가야연맹 내부의 주도권이 해상 세력으로부터 내륙 농경 세력으로 전환되는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기가야연맹에서 후기가야연맹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된 가야사에서 중요한 획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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