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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구려의 건국

궁예,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를 세우다

901년(효공왕 5)

후고구려의 건국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궁예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후고구려(後高句麗)는 901년(효공왕 5) ‘고려(高麗)’라는 국호(國號) 아래 궁예(弓裔, ?~918)에 의해 건국되었다. 한반도 북쪽에 위치하며 발해 및 후백제, 신라와 접하였던 나라였다. 후고구려가 건국된 시기는 신라 말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며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하던 때였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궁예는 후고구려를 건국하며 900년(효공왕 4) 견훤(甄萱, 867~936)이 세운 후백제(後百濟)와 더불어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를 열었다. 궁예는 황해도 일대의 패서(浿西)지역뿐만 아니라 한산주 일대, 충청도 등을 장악하며 후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포악한 정치를 펼친 궁예가 918년 왕건(王建, 877~943)에 의해 축출되면서 후고구려는 몰락하였다.

2 궁예, 독립적 세력을 구축해가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신라의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혹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10여 세에 세달사(世達寺)로 가서 출가하였고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법호를 지었다. 이후 궁예는 뜻을 성취하기 위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고 891년(진성왕 5)에 현재 경기도 안성시 일대인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을 찾아가 부하가 되었다. 하지만 기훤이 제대로 예우해주지 않자 892년(진성왕 6) 현재 강원도 원주시 일대인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은 궁예는 양길에게 받은 군대를 이끌고 주변의 여러 지역을 정벌하였다. 이후 894년(진성왕 8) 10월에는 6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현재 강릉 지역인 명주(溟州)에 들어가 점차 병력을 모아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때 그가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칭하였다는 기록은 그가 당시 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으로 해석된다.

궁예는 895년(진성왕 9) 3,500명을 거느리고 명주를 떠나 철원(鐵圓)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에 패서(浿西) 지역의 많은 세력가들이 궁예에게 귀부하였고, 896년(진성왕 10)에 처음으로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후 왕건(王建)의 아버지인 송악(松嶽)의 왕륭(王隆)이 귀부하였고 898년(효공왕 2) 7월에는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의 성을 장악하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899년(효공왕 3) 궁예는 양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다음해 충주(忠州)·청주(靑州)·괴산(槐山) 등을 평정하였다. 901년(효공왕 5)에는 드디어 국호를 ‘고려(高麗)’로 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왕을 칭하였다.

이러한 후고구려의 건국 과정에서 궁예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여러 지역의 호족들과 결합하였다. 이는 후고구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궁예가 집권기 말에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며 행한 신정적 전제정치(神政的 專制政治)를 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신의 견고하지 않은 세력 기반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궁예가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불교의 권위를 극단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후대에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우며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반대 세력을 다수 숙청한 궁예의 악행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과는 다르게 궁예가 미륵불을 표방하며 포악한 정치를 펼치기 이전에는 군사들과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하고 상벌에 있어서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 여러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자료가 있어 주목된다. 이는 집권 초기에 지배 영역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국가 운영을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한 궁예의 행적과 관련된 자료이다. 이러한 건국 과정 속에서 궁예는 악행을 일삼던 집권 말기와는 다르게 호족세력과 협력하며 국가운영체계의 기틀을 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3 후고구려의 건국과 국가운영체계의 정비

후고구려는 건국된 이후 국호(國號)와 연호(年號)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904년(효공왕 8)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고, 905년(효공왕 9)에는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궁예는 909년(효공왕 13) 이후 남부 일대를 장악하고 911년(효공왕 15)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신덕왕 3)에는 연호를 ‘정개(政開)’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후고구려가 천도를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궁예는 896년(진성왕 10)에 처음 철원을 도읍으로 삼은 이후 898년(효공왕 2)에는 송악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903년(효공왕 7) 도읍을 옮기기 위해 철원과 현재 강원도 평강군인 부양(斧壤)을 둘러본 뒤에 904년 청주(淸州) 사람 1천호(戶)를 사민(徙民)하여 이들을 철원성(鐡圎城)으로 옮겼다. 이어서 905년(효공왕 9)에는 철원을 수도로 삼았다. 이후 철원은 후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기능하였다. 일반적으로 국호와 연호를 고치고 수도를 옮기는 것에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다고 이해된다. 후고구려의 경우에도 앞서 언급한 일련의 개정(改定) 행위는 국가 운영에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철원에 ‘궁예도성(弓裔都城)’이라 불리는 후고구려 철원 도성터가 남아있어 주목된다. 철원군 홍원리에 축조된 이 도성은 현재 비무장지대에 위치하고 남북군사경계선으로 양분되어 있어 발굴조사를 실시하기가 어렵다. 이 도성은 외성(外城)이 12.5km, 내성(內城)이 7.7km, 궁성(宮城)이 1.8km 정도로, 송악에 있었던 발어참성(勃禦塹城)과 규모와 비례가 비슷하다. 이 성은 궁예가 왕륭의 건의에 따라 왕건에게 쌓게 한 것으로, 왕건이 성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50 열전10 「궁예」에 의하면 905년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할 때 대궐(大闕)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스럽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이 기사는 후고구려의 정치조직과 관련하여 904년 국호와 연호가 개정되고 백관(百官)을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효공왕 8년(904년)에 궁예가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백관(百官)을 설치하였으며,【제정된 관호(官號)는 비록 신라의 제도에 기인하지만 전각(殿閣)의 이름은 다르다.】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8년)

위의 인용문은 궁예가 백관을 두어 정치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와 함께 『삼국사기』에서 궁예가 904년(효공왕 8)에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여기에서 광평성을 비롯하여 병부(兵部)·대룡부(大龍部)·수춘부(壽春部)·봉빈부(奉賓部)·의형대(義刑臺)·납화부(納貨府)·조위부(調位部)·내봉성(內奉省)·금서성(禁書省)·남상단(南廂壇)·수단(水壇)·원봉성(元鳳省)비룡성(飛龍省)·물장성(物藏省) 등의 여러 관부와 9관등(官等)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904년(효공왕 8) 후고구려의 국호 및 연호 개정과 정치조직의 제정은 철원으로의 천도와 함께 국가운영체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8년 기록에 따르면 후고구려의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가 신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관부 명칭이 실제로는 신라의 것과 차이가 크며 오히려 후고구려 고유의 명칭으로 보아야한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후고구려의 최고 통치기구인 광평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신라의 집사성(執事省)과 동일하게 광평성에도 시중이 임명되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광평성도 집사성과 같이 궁예의 전제주의를 뒷받침한다는 이해가 있다. 또한 신라 귀족들의 회의체인 화백회의(和白會議)와의 관련성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이는 광평성이 지방 호족세력을 대변하는 기구로 기능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후고구려의 국가운영체계를 살펴볼 때 주의할 점은 후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에도 궁예가 정치조직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에 의하면 896년에 궁예가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을 때 중앙과 지방의 관직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때 처음 관부가 설치되었고, 이후 철원으로의 천도와 함께 국가운영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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