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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건국

신라의 장군이 옛 백제 땅에 새로운 사회를 꿈꾸다

미상

후백제의 건국 대표 이미지

견훤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후백제는 통일 신라 말 신라 군인 출신 견훤(甄萱)이 옛 백제 지역에 건국한 나라이다. 9세기 말 후고구려(이후 고려)·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었으며, 후백제가 멸망하며 후삼국시대도 막을 내렸다. 후백제는 신라를 타도하고 백제를 계승하는 새로운 사회를 표방하며 건국된 나라였다. 하지만 국가의 운영체제를 살펴보면 그 기반이 신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건국 시기부터 국가 운영체제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밝혀진 게 많지 않다.

2 후백제의 건국 시기 : 사료 기록상의 시점과 실제 사건의 시차

통일신라 말, 신라 조정의 통제가 약화 되자 각지에서 성주(城主)나 장군(將軍)이 세력을 형성하여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 견훤 역시 그중 하나였다. 견훤은 상주 호족 출신의 신라 무장으로 군대에서 함께 한 부하들과 함께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때문에 당시 여러 세력 중 가장 군사력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 후백제·고려·신라 간의 전쟁 상황을 살펴보면 초반에는 견훤의 후백제의 전력이 우세했던 것 같다.

이처럼 후삼국 초반의 정세를 주도했던 후백제이지만,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아 후백제의 국가 체계나 운영방식에 대해서 상세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사료에 보이는 후백제의 건국 시점도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서술 특성상 정확한 시점을 확인하기 어렵다.

먼저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따르면, 견훤이 신라의 장군일 당시 신라 조정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관심이 없고, 지배층은 사치향락에 빠져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에 바빴다. 거기에 기근까지 들어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각지에 도적들이 발호하였다고 한다. 이때 견훤은 이미 신라에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모아 신라에 반기를 들게 된다. 견훤이 반기를 들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약 보름 만에 5천 명이 모였다고 하니 당시 견훤의 결단을 반기고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견훤은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차지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이 시점까지는 감히 공식적으로 왕이라 칭하지는 못하고 다만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하였다.

이때 『삼국사기』에는 그 시점을 당(唐)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이자 신라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 즉 892년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견훤이 후백제왕을 자칭하며 관부를 설치하고 관작을 나눈 것은 당 광화(光化) 3년이자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인 900년이라고 기록하였다. 즉, 『삼국사기』 견훤전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견훤은 892년에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못했고, 900년이 되어서야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후백제의 왕이라 선언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후백제의 건국 시점은 892년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900년으로 보아야 할까?

후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892년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연표에는 892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자칭하여 왕이라 하였다고 하였고, 신라본기에는 견훤이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북 전주)에 자리 잡고 스스로 후백제라 칭했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892년에 견훤이 처음으로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해당 기록들을 보면, 892년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생각하고 넘기기 쉽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다른 정보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후백제를 세웠다고 공표한 지역이 무진주(광주)와 완산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위의 사료가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견훤은 892년 단 1년 만에 반기를 들어 세력을 모으면서 무진주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왕이 된 뒤에 완산주로 바로 도읍을 옮기고 천하에 후백제의 왕이라고 공표한 것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크게 보면 대체로 사실과 일치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1년 안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1년 안에 모든 일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완전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에 대해 반기를 든 뒤 무진주·완산주 등의 지역을 점령한 다음 곧바로 왕이 되어 도읍을 정하고, 연이어 도성의 제반 시설을 정비하고 관제를 마련하는 일이 이처럼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아마도 『삼국사기』에 기록될 때 각 사건을 단순화하여 기록하였던 게 아닐까. 즉 견훤이 군사를 일으키고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한꺼번에 기록된 것이고, 실제 이 과정은 892년~900년의 약 10여 년의 시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일어났으리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후백제의 건국 시점은 언제로 보아야 타당할까. 이는 후백제 스스로가 자신들을 언제 건국한 걸로 인식하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견훤의 후백제 건국 과정 중에는 왕이라 자처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신라서면도통’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이때를 889년(용화(龍化) 원년 기유(己酉))라고 하고, 후백제왕이라고 칭한 건 900년이라고 하였다. 저자인 일연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작성할 당시 후백제 건국과 관련하여 전거가 다른 기록이 남아있었으며, 일연의 판단에 889년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백제의 건국 과정을 생각했을 때, 견훤이 무진주에 자리 잡고 스스로 왕이 된 시점은 889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어지는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42년 경인(庚寅)에 군사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42년은 ‘견훤 재위 42년’을 뜻하며, 여기서 경인년은 서기 930년이다. 이를 역산하면 889년이 견훤 스스로 원년을 칭한 해가 된다. 즉 후백제는 국외에 공식적으로 표방하진 못하였지만, 견훤 스스로 왕이 된 889년을 나라를 건국한 해로 보았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후백제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89년 이전에 무리를 보아 신라에 반기를 든 견훤은 889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대외적으로는 왕이라 표방하지 못하고 신라의 신하로 남아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견훤의 세력이 다른 반란 세력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나라를 건국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이때를 건국 기년으로 삼았다. 이후 892년 완산주를 차지하고 그곳에 도읍을 정했으며, 점차 대외적으로도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0년에 이르러 드디어 천하에 후백제의 등장을 공표한 것이 된다.

3 후백제의 국가 체제 : 백제를 계승하였으나, 신라의 체제를 따르다

견훤은 900년에 후백제 건국을 공표하고 국가 운영의 기반이 되는 관부를 설치하였으며 관직을 나누어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다만 국가 운영에 대한 내용 역시 자세하게 남아있지 않아 후백제가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우선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국가가 존재하려면 필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땅과 백성, 그리고 나라를 운영할 체제이다. 이보다 앞서 국호의 제정이 가장 첫 번째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후백제는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터전으로 세워졌다. 해당 지역은 과거 백제가 자리하던 지역으로 옛 백제의 백성이 많이 살던 곳이다. 견훤은 비록 백제 출신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터를 잡은 지역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후백제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채택한 시점이 완산주로 이동한 시점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전의 근거지인 무진주에서는 대외적으로 신라의 관작을 내세우고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 백제 계승을 표방하기보다는 신라와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완산주에 거점을 다진 뒤에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백제의 복수를 언급하며 백제의 부흥을 내세웠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다. 또 백제를 계승한 국가임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 후당(後唐) 등과 교섭하며, 과거 백제처럼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인정받고 공표하고 있다.

국가 체제 정비와 관련하여 후백제는 연호도 사용했던 것 같다. 사서에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남원에 있는 실상사(實相寺) 편운화상(片雲和尙) 승탑(僧塔)을 통해 후백제에 ‘정개(正開)’란 연호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즉 문구 중에 ‘正開十年庚午歲建.’ 라고 하여, 정개 10년=경오년[庚午歲]에 탑을 세웠음을 고지하고 있다. 이때 경오년은 910년이다. 이를 역산하면,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천하에 드러내면서 연호도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900년은 견훤왕 12년이자, 정개 원년이었다. 또 900년은 완산에 ‘도읍을 세운[立都]’ 해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완산주로 도읍을 옮겼다는 뜻이 아니라 도읍으로서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고,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정비했다는 의미이다. 견훤은 900년에 국호와 연호를 확정하고 도읍을 완성하였으며, 관제 정비를 통해 지배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정식으로 국가 성립을 대외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다만 국가의 정체성을 백제에 둔 것과 달리 국가 운영의 기반이 되는 관등과 관직의 설치는 신라의 것과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료 상 후백제에 보이는 관등과 관직으로는 『삼국사기』 견훤전을 통해 이찬(伊湌)·파진찬(波珍湌)·도독(都督)·비장(裨將)·술사(術師)·의사(醫師)·장군(將軍) 등이 확인되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아찬(阿粲)·일길찬(一吉粲)·시랑(侍郞)·좌장군(左將軍)·해장군(海將軍)이 확인되며, 그 밖에 묘지명 등에서는 우장군(右將軍)·인가별감(引駕別監)이 보인다.

후백제의 관등과 관직명 중 특색이 있는 것은 ‘인가별감’이다. 신라나 고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후백제 고유의 관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인가별감으로 등장하는 김총(金摠)이 후백제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던 인물인 것으로 보아, 왕과 가까운 위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 외에 관직은 대부분 무관직으로, 남은 기록이 고려와의 전투 기록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관등으로 보이는 이찬·파진찬·아찬·일길찬 등은 어떻게 봐도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들은 무관직에 비해 지위가 높고 핵심적인 업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찬 능환(能奐)은 견훤의 맏아들 신검(神劍)과 함께 반란을 주도하였고, 파진찬 신덕(新德)과 영순(英順)도 마찬가지였다. 이외에 아찬 공달(功達)은 왕건 즉위 후 고려에 선물을 가지고 파견된 사신으로 활약하였으며 일길찬 민극(閔郃)도 비슷한 업무를 수행한 외교 사절이었다.

이를 보면, 후백제만의 고유한 행정 체계는 거의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서가 작성될 당시 전하는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궁예가 여러 관서를 설치하고, 관등을 설치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아무래도 견훤은 신라에서 군인 관료로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 이때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으므로 보다 익숙한 신라의 체제를 많이 활용했던 게 아닐까 싶다. 즉, 대외적으로는 백제를 계승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표방하였지만, 국가 운영 체제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신라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는 견훤이 국호를 후백제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조를 신라 진흥왕(眞興王)에 연결하고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4 후백제의 지방 지배 : 민심은 불교에게, 영토는 호족에게

후백제는 중앙의 국가 운영체제를 정비한 뒤, 지방 통치도 지역에 따라 지배 방식을 달리하였던 것 같다. 후백제가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보면, 지역에 따라 지배 방식에서 차이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먼저 중앙에서 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이 보인다. 아무래도 왕도인 완산주를 비롯하여 그 인근 지역이 여기에 해당할 것인데, 익산·김제·연산 등의 지역이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왕도에서 가까운 이 지역에 대해 불교 사상을 적극 활용하여 다스렸다. 이곳은 백제 시대부터 미륵사·금산사 등 대사찰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다스리기에 불교가 매우 유용하였다. 갈양사(葛陽寺)의 「혜거국사 비문(惠居國師 碑文)」에 의하면, 견훤은 혜거국사를 통해 익산 미륵사의 탑을 열었는데[開塔] 이를 통해 국가 권력이 불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방식이 있다. 당시 후삼국이 대립하던 상황에 비추어볼 때, 후백제가 전국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지방관[都督]을 파견하여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무주와 강주(康州 : 지금의 경남 진주)가 있다. 무주는 후백제의 남방한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고, 강주는 남해로 통하는 포구이자 동남부 지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견훤의 아들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파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세 번째로 귀부(歸附)나 내투(來投) 호족과의 결합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이 있다. 지역의 호족 세력이 후백제로 귀의를 표명하였으나, 해당 호족의 토착 권력이 강하여 중앙에서 직접 다스리기는 어려운 곳이 이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의 성주는 견훤 휘하에 있었으나 고려 태조에게 귀순 의사를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 지역의 호족이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하며 후백제의 지배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혼인을 매개로 호족과 결합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이다. 이 방식을 사용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있다. 구체적으로 언급된 기록은 없으나, 많은 아내를 취하여 아들이 10명이었다던 견훤 역시 비슷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지역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즉 지방을 다스림에 있어 후백제가 호족을 통해 간접 지배를 한 곳은 고려 초의 호족과 국왕과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당시 후삼국 통일의 성패는 각 지방마다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호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 달렸다고 할 수 있었다. 후백제는 후삼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강하였고, 호족과의 결합 방식에서도 고려와 큰 차이가 없어 대체로 전쟁 초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국가 운영 체제도 신라의 것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큰 잡음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큰 분란이 없었다면 후삼국의 통일은 후백제에 의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방의 패권이 왕건에게 넘어가고 점차 전쟁의 흐름도 후백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때, 왕위를 둘러싸고 부자간의 갈등마저 터져 나오면서 후삼국 통일의 주역 자리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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