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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통일

태조 왕건, 신라·후백제·발해를 아울러 한반도를 재통일하다

901년(효공왕 5)

후삼국의 통일 대표 이미지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신라 하대 혼란한 정국 속에서 900년(효공왕 4) 견훤(甄萱, 867~936)의 후백제(後百濟), 901년(효공왕 5)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가 건국되며 후삼국(後三國)이 정립되었다.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王建, 877~943)이 고려(高麗)를 건국하면서 국가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후 고려의 태조가 된 왕건은 935년에는 신라를, 936년에는 후백제를 통합하였고, 이로써 8세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다시 한 번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2 고려와 후백제의 갈등이 시작되다

9세기 말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며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하였고, 사회 혼란이 심해지며 독립적인 지방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900년(효공왕 4)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 901년(효공왕 5)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가 건국되었다. 이 국가들은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後三國)이라 일컬어지며 마침내 후삼국시대의 막이 올랐다.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를 축출하여 후고구려를 몰락시키고 고려(高麗)를 건국한 이후에도 신라·후백제·고려 세 나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는 왕건이 935년(태조 18)에 신라를, 936년(태조 19)에 후백제를 통합하여 후삼국을 재통일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의 국력이 쇠퇴한 가운데,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전개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는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고려가 건국된 직후, 양국은 사신(使臣)을 파견하고 선물을 교환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견훤은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길찬 민합(一吉粲 閔郃)을 파견하였고, 왕건은 광평시랑 한신일(廣評侍郞 韓申一)을 보내 후백제의 사신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후 925년(태조 8) 10월에는 고려와 후백제가 조물성 전투(曹物城 戰鬪)에서 충돌하였으나 양국은 화친을 맺고 인질을 교환하기로 하였다. 이에 견훤은 자신의 사위인 진호(眞虎)를 인질로 삼아 보냈고, 고려에서는 왕건의 사촌동생인 왕신(王信)이 백제로 보내졌다. 하지만 926년(태조 9) 4월 견훤의 인질인 진호가 병에 걸려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인질을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여 후백제에 머물던 왕건의 인질을 죽여 보복했다. 이 시기부터 양국 간에 갈등이 다시 시작되어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927년(경애왕 4) 견훤이 신라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를 정복하니, 신라는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견훤은 경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에 왕건은 공산(公山, 현재 대구 팔공산)에서 견훤의 군사와 맞닥뜨려 대결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한편 후삼국 통일의 성격과 관련하여 고려와 후백제 간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시기에 발해(渤海)의 유민에 대한 왕건의 태도가 주목된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면서 대규모 유민이 대발생하자 왕건은 그들을 고려로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 흥미롭다. 925년 3월에 궁성(宮城)의 동쪽에서 길이 70척의 지렁이가 나왔는데,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발해국이 의탁할 징조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발해가 멸망하기 전이었지만 왕건이 나중에 통합하고자 했던 지역 안에 발해를 이미 포함시키고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발해의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와서 항복하자, 왕실의 성(姓)을 하사하여 ‘왕계(王繼)’라 하고, 고려 종실(宗室)의 족보에 편입시켜 우대하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7세기 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과 다르게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한반도 북쪽 지역까지 아우르는 한반도의 재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3 태조 왕건,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다

고려와 후백제의 전쟁은 930년 고창(古昌)에서의 전투를 기준으로 전세가 크게 변화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후 안동과 청송 일대의 30여 군현(郡縣)이 고려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고창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백제는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더하여 이 무렵 견훤의 아들인 신검(神劒)과 양검(良劍), 용검(龍劍)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김제(金堤)의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키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아버지를 유폐한 이들은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던 동생 금강(金剛)을 죽인 뒤 맏형 신검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러자 견훤은 935년 6월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나주(羅州)로 가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로 삼고 남궁(南宮)을 머물 곳으로 주었으며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때 신라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도 견훤이 고려에 귀부하여 우대받는 것을 보고 935년 11월 고려에 귀부하였다.

경순왕이 말하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잘못 없는 백성들의 간(肝)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듯 참혹하게 죽게 하는 일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게 하였다.(『삼국사기』 50권, 열전 10, 「견훤」)

위의 인용문은 고려로의 귀부를 반대한 신라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물음에 대하여 경순왕이 답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신라는 이미 국력이 상당히 쇠퇴한 상태였는데, 전대 왕이었던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에 이어서 경순왕 또한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927년 즉위 직후 경순왕이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경애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모시고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후 왕의 시호(諡號)를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

이 시기 신라의 영역에서는 고려와 후백제의 갈등이 지속되며 그 영토가 후백제와 고려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927년 공산 전투 이후에는 후백제가 대목군(大木郡, 지금의 칠곡)을 공격하고, 928년(경순왕 2)에는 대야성(大耶城)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해 10월에는 무곡성(武谷城, 지금의 군위), 다음해 10월에는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을 공격했다. 930년(경순왕 4) 고창 전투 이후에는 안동·청송일대와 신라 동쪽 해변의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부터 흥례부(興禮府, 지금의 울산)에 이르는 110여 성(城)들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또한 934년(경순왕 8)에는 왕건이 후백제 영역에 있었던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자 인근에 있었던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935년 10월 경순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소유가 되어 국력이 쇠하였으므로 고려로의 귀부를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11월 왕건은 개경에 온 경순왕을 친히 맞이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곳을 내려주었으며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로써 고려가 신라를 통합하며 900여 년 동안 존속하였던 신라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후 왕건은 936년(태조 19) 6월 후백제를 정벌해달라는 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여 9월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구미)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 동원된 고려군은 87,500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견훤도 고려군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후백제의 장군인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고려군의 진영에 있던 견훤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이후 후백제의 군대는 고려군의 공격에 크게 패하였고, 신검도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며 후백제는 몰락하였다. 마침내 936년 9월 후백제의 멸망과 함께 고려는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왕건은 삼국 통일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논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절은 936년(태조 19) 12월에 짓기 시작하여 940년(태조 23)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때 절의 완공을 기념하며 열린 낙성법회(落成法會)에서는 왕건이 직접 부처에게 바치는 발원문인 소문(疏文)을 지었는데, 여기에 후백제와의 전투에 관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이 글은 최해(崔瀣)(1287~1340)의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권8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 태조는 우선 고려 건국 후 전쟁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복을 빌고 있다. 또한 부처의 힘과 신령의 위엄[玄威] 덕분에 936년 후백제군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개경이 아니라 후백제의 영토였던 지방에 개태사가 창건되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이 절의 창건 배경에는 후백제 지역 잔존 세력에 대한 통제라는 목적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이해되기도 한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살펴보면, 유력한 호족(豪族)을 포섭하고자 행한 여러 정책들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각 지역 유력자들의 딸들과 결혼하는 혼인 정책이 있었다. 또한 왕실의 성(姓)을 하사해 주는 사성정책(賜姓政策)을 통해 호족들을 왕족의 측근으로 편입시켜 의제가족(擬制家族)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능력 있는 지방 세력들이 고려 중앙으로 진출하는 양상은 신라 하대 패쇄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도(骨品制度)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모습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왕건은 한반도를 재통일하며 신라 하대 최대의 영토에서 양적으로 더욱 확장된 영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8세기 당이 개입되었던 신라의 삼국통일과는 다르게 고려의 자주적인 통일이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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