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거란의 고려침입

거란의 고려침입

발해를 멸명시킨 거란, 고려를 넘보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고려침입 대표 이미지

매사냥하는 거란 사람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1 개요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거란과 고려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국지적인 전투까지 포함하면 횟수가 매우 많으나, 크게 나누어 993년(성종 12)의 1차 전쟁, 1010년(현종 원년)의 2차 전쟁, 1018년(현종 9)의 3차 전쟁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2 양국의 초기 관계

거란은 시라무렌강 유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던 유목 민족이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대륙의 북방 초원 지역에 살고 있었으나,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통치자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거란국을 세웠다. 이들은 국명으로 거란 혹은 요(遼)를 사용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거란’으로 통칭하겠다. 이때는 한반도의 후삼국 시기이며, 고려가 건국하기 2년 전이다. 이후 거란은 동쪽의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였고, 남쪽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교류․갈등하며 북방의 강자로 등극했다.

고려와 거란이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10세기 말, 즉 고려 성종[고려](成宗)대의 일이다. 그러나 최초의 접촉은 이미 후삼국 시대에 있었다. 일찍이 궁예(弓裔) 정권에서 몇 차례 거란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922년(태조 5)에 거란에서 고려로 파견한 최초의 사신 기록도 보인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사신의 왕래가 있었던 듯하나, 942년(태조 25)에 고려는 거란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거란이 발해와 우호를 맺고 있다가 갑자기 배반하여 멸망시켰음을 지적하고,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사신단을 섬에 유배하고 이들이 데려온 낙타는 만부교(萬夫橋)라는 다리 아래에 매어두어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萬夫橋事件)이 터진다. 이어 943년(태조 26)에는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訓要)에서 “거란은 짐승같은 나라며 풍속과 언어도 다르니 문물 제도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는 한편, “강력하고 악한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도록 하라”는 권고를 남겼다.

당시 태조는 북방의 강자로 승승장구하는 거란을 견제하고 대륙의 국가들과 관계를 긴밀히 다지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이후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50여 년 동안 단절되었다.

3 1차 고려-거란 전쟁

1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5대 10국의 혼란기가 끝나고 마침내 송(宋)이 중국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이제 북방의 거란과 남방의 송이 직접 대립하는 형세가 펼쳐졌다. 특히 송은 과거 후진(後晋)을 세운 석경당(石敬瑭)이 군사적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거란에게 내어주었던 ‘연운16주’를 되찾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986년, 즉 고려 성종 5년에 송은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거란을 공격하였다. 당시 송은 고려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협공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는 군대를 출병시키지 않았다.

이 공격은 결국 송의 큰 패배로 끝나게 된다. 이후 송은 거란에 대해 계속 수세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 여파는 동쪽으로 미치게 되었다. 거란은 이전부터 동쪽의 여진 부족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압록강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발해의 후예들이 세워 압록강 유역에 존재했던 정안국(定安國)도 이 과정에서 멸망당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송은 여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려를 거란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였으므로 거란이 이를 견제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거란은 991년(성종 10)에 압록강 하류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여 전략적인 우세를 차지하였다.

반면 당시 고려는 아직 압록강 일대까지 통제력을 완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984년(성종 3)에 압록강 유역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다가 여진과 충돌하여 실패했던 사례가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길목인 압록강에 거란이 먼저 기지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성종이 즉위한 이래로 내치(內治)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북방 영역에 대한 축성도 이전 시기보다 줄어들었고, 앞서 들었던 예에서 보이듯 현지의 여진족 부족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후 거란의 침입시에 잘 나타나듯이, 거란의 동태에 대한 정보 수집도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993년(성종 12) 겨울에 거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차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이었다.

거란은 동경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恆德)의 지휘하에 80만 대병이라 일컬으며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사(高麗史)』에 적힌 ‘손녕(遜寧)’은 소항덕의 자(字)이다. 물론 당시 거란군의 병력이 실제로 80만에 육박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많다.

한편, 거란의 공격이 임박하자 고려에 이를 미리 알려온 여진 부족이 있었다. 당시 여진 부족들은 흩어져 살면서 정치적 입장이 달랐는데, 일부는 거란에 협조하였고 일부는 고려에 협조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고려는 이 첩보를 믿지 않았고, 별도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시 여진이 거란의 침공 소식을 알려오자 그 때에야 정황을 인지하고 급히 방어 태세에 나섰다.

고려는 첫 전투에서 패하여 봉산군(蓬山郡)을 잃고 선봉인 윤서안(尹庶顔)이 잡혀가는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후 안융진(安戎鎭)에서 방어에 성공하고 서희(徐熙)가 협상에서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거란이 제기했던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요구를 차단하고 아직 통제력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던 압록강 동쪽 지역에 대해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것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이 지역에 ‘강동6주(江東六州)’를 설치하여 통제력을 확보하고, 군사적 요충지를 설치하였다. 당시 거란이 고려를 공격했던 가장 큰 이유가 송과 고려의 연계를 끊으려는 것이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종전의 조건으로 거란의 요구에 따라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거란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4 2차 고려-거란 전쟁

1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 고려와 거란은 한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긴장 관계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거란은 송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압박했고, 마침내 1004년(목종 7)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거란 황제인 성종(聖宗)과 그 어머니인 실권자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직접 대군을 끌고 나선 친정(親征)이었다. 거란군은 무서운 기세로 송군을 격파하며 진격하여 수도인 개봉(開封) 인근의 전연(澶淵)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화의를 맺었으니, 바로 ‘전연(澶淵)의 맹약’이라 불리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조약이다. 그 결과 송은 매년 거란에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보내며, 송의 황제가 거란의 황태후를 숙모로 대우하기로 하였다. 막대한 송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전연의 맹약 내용이 어느 정도로 부담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나, 군사적으로 거란이 송을 제압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송을 제압한 거란이 고려에 대해 한층 압박을 가할 가능성은 상존했다. 그러나 일단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전쟁이라는 상황까지 발생하기에는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이 계기는 외부적으로 고려와 여진의 갈등이 커지고 내부적으로는 고려 중앙에서 정변이 발생하였던 1009년(목종 12) 무렵 결국 만들어지고 말았다.

우선 고려 내에서는 1009년(목종 12)에 이른바 ‘강조의 정변(康兆-政變)’이 발생했다. 아직 젊고 아들이 없었던 제7대 국왕 목종(穆宗)이 병이 들면서 후계자 선정이 문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강조라는 장수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해하고 새로 현종[고려](顯宗)을 옹립했던 것이다.

고려는 일단 거란에 사신을 보내서 전왕이 사망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했음을 알렸고, 이 문제는 약 1년 동안 별다른 외교적인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당시 변경 지역에서 고려군과 마찰을 빚은 일부 여진족이 거란으로 도망쳐 피해를 호소하면서 고려의 정변 소식을 알리자 문제가 발생했다. 거란의 황제 성종이 대역을 일으킨 죄인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고려 침공을 지시한 것이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이를 수습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전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거란 성종의 궁극적인 목표가 강조 제거가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10년(현종 원년) 11월, 거란의 성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이라 칭하며 고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고려는 당시 강조의 지휘 하에 30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거란군의 진격로 상에 위치한 변방의 각 성들도 전투를 준비하였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양규(楊規)가 이끄는 고려군은 흥화진을 지키며 수차례에 걸친 거란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에 거란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으로 개경을 향해 내려갔다. 일차적으로는 고려가 성공적인 방어를 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흥화진을 우회한 거란군이 다음으로 고려군과 마주친 곳은 통주(通州)였다. 바로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조는 먼저 자리를 잡은 지리적 이점에 검차(劍車)를 이용한 전술 활용으로 초반에 잘 방어하였지만, 후반에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방심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통주전투(通州戰鬪)에서는 강조뿐만 아니라 부장 이현운(李鉉雲) 등 다수의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력도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다.

다행히 통주성(通州城)은 함락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무너지면서 고려군의 전열은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비록 서경(西京)은 힘겨운 전투 끝에 지켜낼 수 있었으나,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려 국왕 현종은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피난길에서 현종은 갖은 고초를 겪었고, 거란군에게 점령된 개경도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현종은 결국 친조(親朝), 즉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하였다. 거란군도 후방에 잔류한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요청을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란군의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양규를 비롯하여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수많은 포로를 구출하며 거란군을 괴롭혔다. 비록 양규가 전투 도중 목숨을 잃는 등 고려의 피해도 컸으나, 끝까지 거란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5 3차 고려-거란 전쟁

2차 전쟁이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양국 관계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고려측에서 현종의 병환으로 인하여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다는 자신감에서 그랬던 것일까. 여하튼 고려는 이러한 입장을 표명했고, 거란의 성종은 크게 분노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원정을 이끌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큰 피해를 입고 끝나버린 셈이 되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려가 이런 입장을 밝히자, 거란 성종은 고려에 강동 6주 지역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가 이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거란에서 무력으로 이 지역을 빼앗으려 하여 국지적인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고려는 현재의 의주(義州) 지역을 빼앗기는 손실을 입었으나, 그 외에는 대체로 잘 막아낼 수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거란 성종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고려 공격을 준비했다. 1018년(현종 9)에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의 병력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소배압은 1차 전쟁 당시의 사령관이었던 소항덕의 형으로, 2차 전쟁에서는 선봉을 맡은 바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3차 전쟁 당시의 사령관을 소손녕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오류이다. 소배압과 소항덕은 거란 황실의 부마였고, 송과의 전쟁 등에서 많은 전공을 쌓은 노련한 장수들이었다. 당시 거란이 고려와의 전쟁에 상당한 전력을 투입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거란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해 고려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현종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강민첨(姜民瞻)을 부관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약 20만 8천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했다. 거란군은 공략이 어려운 흥화진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이 지나는 길목인 흥화진 인근의 삼교천(三橋川)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 때 강감찬이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았다가 터뜨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번 전쟁에서 거란군은 다른 지역을 공략하지 않고 개경으로 직접 향하는 전략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주력이 배치된 곳을 피하여 개경으로 향하자, 강감찬은 그 길목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계속 습격하는 한편, 급히 개경으로 1만의 군사를 보내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동북면에서 온 3천 3백의 군사들도 개경 방어에 합류하여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현종이 성 밖의 백성들을 전부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청야전술을 펼치며 방어전을 준비하였다.

소배압은 최대한 신속하게 개경을 습격하려 했으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고려군에게 피해를 입으며 상당한 전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 인근까지 접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척후로 보냈던 기병 3백이 금교역(金郊驛)에서 고려군에게 전멸당하자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변변한 거점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한반도 깊숙이 들어왔던 거란군이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고려군은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이어 1019년(현종 19) 2월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고려는 거란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소배압이 귀양형에 처해질 정도였으니, 그 패배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3차 전쟁이 끝난 뒤에도 거란 성종은 다시 고려를 침공하려는 의도를 밝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도 강한 반대 의견에 부딪혔고,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사대 관계를 회복할 것을 청하니 명분도 없어서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양국 간의 오랜 전쟁은 끝이 났다.

거란의 거듭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한층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거란도 고려를 힘으로 누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거란에게 압박을 당했던 송은 고려의 국력을 재평가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재편 속에서 고려는 거란 및 송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