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년(현종 9) ~ 1019년(현종 10)
1019년(현종 10)에 강감찬(姜邯贊)이 중심이 되어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을 귀주(龜州)에서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993년(성종 12) 겨울과 1010년(현종 원년) 11월에 고려를 침입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거란은 1018년(현종 9) 12월에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을 총책임자인 도통(都統)으로 삼아 고려를 치게 한 것이다. 이에 현종(顯宗)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인 상원수로,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았다. 현종은 이들에게 약 20만 8천 3백의 병력을 주고, 거느리고 가 거란병을 막게 했다.
고려를 침입했던 거란의 군사들이 흥화진(興化鎭)에 이르자,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키고 소가죽을 엮어 흥화진의 동쪽을 둘러 싼 큰 내인 삼교천(三橋川) 을 막았다. 거란병은 흥화진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는 우회하여 진격하는 쪽으로 작전을 세웠던 듯하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러한 생각을 간파하고 우회로 상에서 수공작전을 사용했다. 고려군은 상류를 막아 거란병이 강을 건너도록 유도하고 이들이 함정에 빠지자, 막았던 물을 터뜨려 거란병의 대열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병사들로 전력이 붕괴된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거란은 고려군의 전술에 패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개경으로 향했다. 이는 삼교천 전투 이후에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의 전투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사실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아마도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강민첨은 소배압의 부대를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來口山)에서 크게 격파하고, 조원(趙元)도 마탄(馬灘)에서 1만 가까이의 거란병을 살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거란이 이어지는 패배에도 물러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해 오자, 고려는 위기감을 느끼고 태조의 재궁(梓宮) 즉, 관을 지금의 삼각산으로 추정되는 부아산(負兒山) 향림사(香林寺)로 옮겨 안치하고, 개경 일대를 계엄 상태에 두었다. 강감찬은 김종현(金宗鉉)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밤낮으로 달려가 수도인 개경을 보호하게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가 3천 3백 명의 지원병을 보내왔다. 개경 방어를 위한 강화책인 셈이다.
1019년(현종 10) 정월에 소배압은 개경 백 리 거리에 위치한 신은현까지 침입을 해 왔다. 현종은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철수하게 하고, 들판의 곡식 등을 모두 제거하는 청야작전을 펴면서 거란병을 기다렸다. 소배압은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킨다고 알리는 한편, 몰래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어 황해도 강음의 금교역(金郊驛) 방면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거꾸로 밤을 틈 타 공격한 고려 군사 1백 명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개경 공격이 여의치 않게 되자, 부담을 느낀 거란은 연주(漣州)와 위주(渭州)로 방향을 바꾸었다. 강감찬은 거란병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공격하여 적병 5백 명을 살해하였다. 소배압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하자,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2월에 거란병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귀주를 지나가야만 했다. 귀주는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를 가리킨다. 귀주 일대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로 되어 있고 귀주를 통과하는 도로는 좁고 험한 계곡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 적을 막기 좋은 길목이었던 것이다.
강감찬이 거느린 고려군은 귀주의 동쪽 교외에서 거란병과 대치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서로 팽팽하던 상황은 김종현이 거느린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면서 고려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때마침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이 나부끼며 북쪽을 가리킨 것이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기가 오른 고려군의 공격에 거란병들은 북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은 거란병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까지 전투가 이어지면서 거란병의 시체는 들에 널려있을 정도였으며, 고려가 생포한 거란인 포로와 얻은 말과 갑옷 그리고 투구 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병의 수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시 거란의 참패는 『요사(遼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사』「성종기(聖宗紀)」를 보면, “소배압 등이 고려와 더불어 다(茶)․타(陀) 두 강에서 싸웠는데, 요군이 패하여 천운(天運)․우피실(右皮室) 2군이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고 한다. 우피실군은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이 천하의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황제의 친위군으로 삼았다는 어장친군(御帳親軍) 소속이었다. 천운도 역시 막강 정예군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거란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요사』「소배압전」에도 보인다. 그 내용에 “다하․타하 두 하천을 건널 적에 적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총책임자인 소배압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중요한 군사 물자인 갑옷과 무기 등을 버리고 도망을 쳐서 겨우 살아났을 정도로 거란의 처참한 패배였던 것이다. 반면 고려에게는 커다란 승리였다.
패전의 소식을 들은 거란 성종은 크게 노하여 전쟁의 총책임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적지에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대하려 하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 라는 화를 낼 정도였다. 그러니 거란이 느끼는 패배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승리에 감격한 현종은 강감찬이 전쟁에서 돌아오자 친히 영파역까지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기도 하였다. 또한 개선을 기념하여 영파역을 흥의역(興義驛)으로 개칭할 정도였다 하니, 고려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승리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귀주대첩 이후 1021년에 지어진 「현화사비(玄化寺碑)」의 비문을 보면, 북조(北朝) 즉 거란이 거듭 사신을 보내 고려에 화해를 청했고 이로 인해 무기를 버리고 백성들이 편안히 쉴 수 있게 되었다 는 내용이 보인다. 고려 측의 기록이지만, 거란과의 전쟁이 거란의 요청으로 인해 끝났다는 식의 서술은 고려가 갖는 자신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귀주대첩은 또한 고려 침입에 대한 거란의 야욕을 좌절시켰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당시 고려 주변의 국가나 정치세력들이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송의 역사서인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천성(天聖)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 고려가 거란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천성 3년은 천희(天禧)의 오류로 1019년(현종 10)을 가리킨다. 즉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병사가 20만 명이 전사한 사실을 말해준다. 송에서는 거란이 이 패배로 인해 고려를 두려워하기까지 이르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 전쟁 이후 거란은 고려와 더 이상 군사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속자치통감장편』의 기록을 통해 고려의 군사력에 대한 거란의 경계도 그 이유의 하나였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에서는 이 전쟁 이후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갔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고려가 좋은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거란을 격퇴한 이후, 만주지역에 위치한 여진족 세력들이 갑자기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는 사례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철리국(鐵利國)․동흑수국(東黑水國)․불나국(弗奈國) 등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이 가운데 철리국의 경우에는 고려에 일종의 달력인 역일(曆日)을 청하기도 했다. 역일의 요청은 단순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조공관계에 근접한 외교관계를 맺기를 원한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귀주대첩 이후에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상승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