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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첩[度牒]

국가의 승려 증빙

미상

1 개요

도첩(度牒)은 국가에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주는 증명서로서 그 발급 여부는 공도승(公度僧)과 사도승(私度僧)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이것이 제도화된 시기는 당나라때로, 사적(私的) 출가로 인한 불교 교단의 비대화를 경계하기 위해 국가에서 시행하기 시작하여 송나라에서도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1325년(충숙왕 12)에 처음 시행 기록이 확인된다. 다만 고려에서도 직역을 부담할 이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충숙왕대 이전에도 무분별한 출가를 경계하고 규제하려는 조치들은 있어왔다.

1371년(공민왕 20)에는 도첩제 시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규정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도첩의 획득에 정전(丁錢)의 납부 규정이 처음 명시된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도첩제를 더욱 본격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승려 수의 증가를 체계적으로 억제해나간다. 국가에서 승려의 수를 줄여나가는 과정은 출가를 통해 직역에서 벗어나려 한 이들을 줄여나가는 작업이었다.

2 고려전기 무분별한 출가의 규제

도첩은 국가에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주는 증명서이다. 이는 당나라에서 시행되어 송나라에서도 계속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충숙왕대 처음 시행 기록이 확인된다. 그러나 고려전기에도 무분별한 출가를 규제하려는 조치들은 있어왔다. 1036년(정종 2)에 내려진 제서(制書)에 의하면 아들이 4명 있는 자에게 1명의 출가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출가 후에는 계단(戒壇)이 설치된 사원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의식을 거쳤어야 했다. 계단 사원은 여러 지역에 지정되어 있었는데 예컨대 개경의 영통사(靈通寺), 해미의 보원사(普願寺), 대구 동화사(桐華寺) 등을 들 수 있으며 당시 각자 업(業)으로 하는 불경(經)과 계율(律)을 시험 보도록 하였다. 이는 한 집에 아들이 4명이 있으면 그중에서 1명의 출가만을 허락하는 것으로, 국가에서는 직역을 부담할 이들을 우선 확보하고 1명에 대해서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해주는 목적이었다. 이후 1059년(문종 13)에도 제서가 내려졌는데 개경과 서경 및 주·부·군·현에 한 집에 3명의 아들을 가진 자에게는 1명이 15세가 되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출가를 규제하는 금령(禁令)이 내려진 바 있는데 향(鄕)·부곡(部曲)·진(津)·역(驛)·양계(兩界) 주진(州鎭)의 편호인(編戶人)이 승려가 되는 것은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향·소·부곡·진·역·양계 등의 특수 지역의 경우에는 해당 지역에서의 직역 담당자들을 일정하게 확보해야하므로 아예 출가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3 도첩제 시행의 시작

도첩에 관한 기록이 처음 확인되는 때는 1325년(충숙왕 12)이다. 당시 내려진 교서에 의하면, 주현(州縣)의 향리로서 아들이 많다고 해도 반드시 관에 신고하여 도첩을 얻은 뒤에야 아들 1명의 출가를 허락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아들과 부모를 모두 함께 벌을 준다는 단서도 달려있다. 이는 고려전기 아들 3명 혹은 4명이 있으면 그중 1명의 출가를 허락해주던 것과 사뭇 달라진 조치이다. 이때부터는 아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관에 신고하여 도첩을 얻는 절차가 추가된 것이었다. 또한 당시는 도첩을 발급한다는 내용의 교서가 처음 내려졌던 만큼 이를 어기는 것에 대한 처벌 조치도 함께 명시되었다.

그러나 도첩제 시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던 듯 이후 관련 조치들이 재차 내려진다. 공민왕은 1352년에 교서를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거론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시책들을 내린 바 있다. 그중에는 승려의 출가를 경계하기 위한 방법으로, 승려가 되려는 자는 반드시 도첩을 소지하게 하고 민간 집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또한 1356년에도 향리(鄕吏)와 역리(驛吏) 및 공사노예(公私奴隷)들이 부역(賦役)을 피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승려가 되어 호구(戶口)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재차 거론되었고, 도첩을 강화하는 령(令)이 내려졌다.

또 1371년(공민왕 20)에는 도첩제 시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규정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하게 된다. 해당 교서에서는 도첩의 획득에 정전의 납부 규정이 처음 명시되었다. 당시는 이미 도첩제를 시행하는 령이 내려진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출가함으로써 정해진 신역(身役)을 피하는 백성들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이 역시 승려로서 계행(戒行)을 제대로 닦지 않아 불교계의 질적 수준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직역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출가는 국가에 부담을 주는 것은 물론 불교계의 수준도 떨어트린다는 점에서 해결이 필요한 사회적 현상으로 진단되었다. 이에 진정으로 승려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소재 관사로 가서 정전(丁錢) 50필(匹)의 포(布)를 바쳐야 출가를 허락한다고 하여 전보다 구체적인 규정이 정해졌다. 또한 이를 위반한 자는 사장(師長)과 부모를 벌함으로써 더욱 규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4 조선초 도첩제의 본격적 적용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고려에서 지나치게 많이 건립된 사원의 수를 줄이고, 광범위한 사원전(寺院田)과 사원에 딸린 노비를 환수하며 승려 수의 증가를 더욱 체계적으로 억제해나간다. 고려말 이래로 사원을 사회경제적 이권이 몰려있는 이익 소굴로 규정하고 이를 혁파하기 위한 시책들이 꾸준히 전개된다. 국가에서는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던 사원전을 환수함으로써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정리해나갔고, 한편으로 승려의 수를 줄여나가는 조치들을 본격화한다. 그 과정은 역시 피역자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고려말 시행하기 시작한 도첩제를 한층 강화하게 된다.

이에 1392년에 태조는 승려가 되려는 사람이 양반의 자제이면 오승포(五升布) 100필을, 서인(庶人)은 150필을, 천인(賤人)은 200필을 바치게 하며 소재지의 관사에서는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도첩을 발급하고 출가를 허락하도록 하였다. 이는 신분의 층위별로 도첩을 얻기 위해 바치는 재물의 양을 차등 규정한 것이었는데 낮은 신분일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르도록 하였다.

이후 1402년(태종 2)에는 양민으로서 출가하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 그 부모 일족에 사유를 갖추어 고하도록 하고 이를 지방관을 경유하여 예조(禮曹)를 거쳐 승록사(僧錄司)에서 도첩을 발급하도록 하고 그 법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도 이웃[切隣], 이정(里正), 호주(戶主), 사승(師僧) 수령 등에까지 미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정전(丁錢)을 납부하고 도첩을 발급받음으로써 출가승(出家僧)이 되는 방식은 여전히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무도첩자는 늘어나게 된다.

한편 세종대에는 무도첩자를 토목공사에 노역하도록 하고 그 대가로 도첩을 급여하는 방식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승려를 소집하여 온정(溫井)의 욕실(浴室)을 짓게 하는데 지역 별로 인원을 징발한 뒤 20일 동안 사역한 자에게 직(職)을 주어 포상하고, 30일 동안 사역한 자에게는 도첩을 주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1442년(세종 24)에 최종적으로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출가희망자의 부모 족친에 의한 관청 보고, 예조 이문, 왕에게 계문 후 교지 하달의 절차를 거쳐 오승포 100필의 정전을 징수한 뒤 도첩을 발급하는 것으로 제도적 정비를 완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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