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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東寧府]

충심(忠心)의 산물인가, 역심(逆心)의 산물인가

1270년(원종 11) ~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 대표 이미지

고려사 권26 세가26 원종11년 2월 정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동녕부(東寧府)는 1270년(원종 11)부터 1290년(충렬왕 16)까지 서경(西京)을 포함한 고려 서북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원(元)의 통치기관을 지칭한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같이 원에서 고려의 영토 일부를 자국으로 귀속시켜 직접 지배를 관철시킨 사례로 이해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동녕부의 반환 과정은 비교적 평화로웠다는 사실이다. 고려 조정에서 수차례에 걸쳐 반환을 요구한 결과 동녕부는 20년 만에 폐지되었으며 서북면 일대의 땅은 고려로 반환되었다. 이후 동녕부는 요동으로 이관되어 명목상의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서북면 반환 이후 80년 가까이 고려측 사료에 언급조차 되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미미해졌던 동녕부는 공민왕(恭愍王)의 반원개혁이 시작된 이래 부원세력(附元勢力) 잔당의 거점이 됨으로써 비로소 원과 고려 관계에서 문제의 기관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2 동녕부의 설치 배경

동녕부는 30년 가까이 지속된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종식되는 과정에서 국내외의 복잡한 정세가 뒤얽혀 만들어낸 산물이다. 1258년(고종 45)과 1259년(고종 46), 고려와 몽골 양국의 정계(政界)는 대규모 지각 변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오랜 전쟁으로 민심이 이반한 결과 대몽항쟁을 주창하던 최씨무신정권이 1258년(고종 45)에 몰락하였고, 고려 왕실이 몽골과의 강화(講和)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며 실권 회복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몽골에서는 남송(南宋) 정벌을 이끌던 황제 뭉케(蒙哥)가 전장 한가운데서 사망함으로써 그의 두 동생이 각각 후계자를 자임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려의 태자, 즉 훗날의 원종(元宗)은 침착하게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였다. 아버지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입조한 태자는 몽골의 두 후계자 중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쿠빌라이(忽必烈)를 선택하여 양국의 강화를 성사시켰다. 30년 동안 굴복하지 않았던 고려가 자발적으로 귀부하였다는 사실은 황제위를 놓고 경쟁 중이던 쿠빌라이를 크게 만족시켰고,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고려는 몽골군과 다루가치의 철수, 고려 풍속의 유지[不改土風] 등을 허락받으면서 비교적 양호한 조건 하에 몽골과 강화하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260년(원종 1) 쿠빌라이가 황위 계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원 세조(世祖)로 즉위함에 따라 고려의 명운을 건 태자의 도박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이처럼 몽골, 즉 원과 고려의 강화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이후 양국이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성공적인 외교의 결과 권력의 추가 고려 왕실로 기울어지고 있었음을 김준(金俊)과 임연(林衍) 등 신흥 무신집정(武臣執政)들은 금세 알아차렸다. 즉위 이후 원종이 쿠빌라이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개경(開京) 환도를 서둘렀으나 김준은 협조하지 않았고 원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준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에 점차 쿠빌라이와 그 측근들은 고려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쿠빌라이는 수차례 조서를 보내 개경 환도 및 일본 초유(招諭)에 미온적인 고려의 태도를 강도 높게 비난하였으며 여타 정복지에 요구하던 사항들을 고려에도 적용하는 등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이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와중에 설상가상 고려에서는 1269년(원종 10) 6월 무신집정 임연에 의해 원종이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3 서북면의 원 귀속과 동녕부 설치

원과 고려의 강화를 성사시킨 주역을 폐위시키는 행위가 양국에 어떠한 시그널이 될 것인지 임연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무신집정들이 그러하였듯 임연은 원종의 양위(讓位) 표문을 원에 보내서 적당히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임연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과 고려 양측에서 원종의 폐위는 양국 관계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중대한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1269년(원종 10) 10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휘하에 있던 최탄(崔坦)과 한신(韓愼)은 서북면 출신의 이연령(李延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과 함께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용강(龍岡)·함종(咸從)·삼화(三和)·가도(椵島) 등 현 평안도 일대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몽골과의 장기간 전쟁으로 인하여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지역이 고려의 북방이었던 만큼 이곳의 백성들은 원종 폐위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최탄과 한신 등은 이러한 민심을 이용하여 서북면 일대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는 10년 전 쌍성총관부가 설립되었던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1258년(고종 45) 고려의 동북면 일대가 몽골에 투항하였던 사건 또한 장기 지속된 전쟁으로 민심이 이반한 데 근본적 원인이 있었다.

최탄은 서북면의 토착 세력들과 결합하여 중앙관리들을 살해하고 주요 관청들을 장악하는 한편 고려 국경에 있는 원 사신 탈타아(脫朶兒, 톡토르)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미 원에 체류 중이던 고려 태자가 쿠빌라이에게 군사적 개입을 요청한 상태였으나, 최탄은 고려 왕실과 별개로 직접 원과 접촉하며 독자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가 고려 태자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1259년(고종 46) 강화 이래 10년 동안 무신집정들에게 휘둘렸던 고려 왕실에 불신을 품고 자구책을 모색한 것이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주목할 것은 이미 고려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원이 최탄의 행동을 용인하고 또 지원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톡토르는 고려가 다시 섬에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출 것이며 북계(北界)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는 최탄의 보고를 받은 뒤 최탄 일행의 살육 행위를 오히려 부추겼고, 군사적 개입을 통하여 1269년(원종 10) 11월 원종을 복위시킨 황제 쿠빌라이 또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최탄 등의 반란이 충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며 그 세력을 옹호하였다.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무신정권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원의 지지를 등에 업으며 권력에 대한 야욕이 커졌던 것일까. 원종 폐위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던 최탄 일행은 원종이 복위된 이후에도 고려에 복속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1269년(원종 10) 11월초 그들은 서경 일대의 50여 개 성을 원에 바치면서 자신과 가족들이 임연에게 핍박받고 있으며 향후 고려의 중앙군이 자신들을 살육할 것이라는 보고를 원에 올려 양국의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급기야 서경에 원의 군대를 주둔시켜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원은 이 보고를 받은 뒤 곧바로 고려에 3천명의 군사를, 서경에는 별도로 2천명의 군사를 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에 1269년(원종 10) 12월 원종은 입조를 서두르면서 원 조정에 해명하는 글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결국 1270년(원종 11) 2월 원에서는 최탄의 요청대로 서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나아가 쿠빌라이는 최탄과 이연령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과 한신에게 은패(銀牌)를 내려 그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며, 최탄 등이 바친 서북면 일대를 원에 귀속시켜 동녕부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로 삼았다.

4 동녕부 반환 요구

서경이 옛 고구려의 수도이면서 고려 태조(太祖)의 즉위 이래 중시된 지역이었던 만큼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 일대가 원에 귀부한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1269년(원종 10) 12월 서둘러 원으로 향하던 원종은 서경에서 최탄을 마주쳤을 때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였고, 여정 중에도 수차례 사신을 급파하여 최탄의 보고건에 대한 시시비비를 밝히며 군대 철회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런 절박함을 외면한 채 쿠빌라이는 원종과 대면하기 전 이미 동녕부 설치를 결정하고 고려에 통보해왔다.

고려에 엄연히 국왕이 존재하고 몽골과의 외교에서 국왕이 대표성을 갖고 있었으나 고려 국내의 실권은 무신집정이 장악하고 있었던 복잡한 정세로 인하여 결국 고려와 원의 관계는 이처럼 파열되고 있었다. 원에서는 국왕이 무신집정에게 휘둘리는 상황에서 언제든 고려가 원을 배신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고려 왕실은 쌍성총관부에 이어 동녕부까지 설치하면서 국왕 이외의 고려인들에게 지원을 분산시키는 원이 못미더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쿠빌라이를 만난 원종은 양국의 통혼, 무신정권 제압을 위한 군대 지원 등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단순히 왕정복고를 실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원에 정착한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 홍차구(洪茶丘), 이에 더해 원이란 뒷배를 얻은 쌍성총관부 및 동녕부 세력들을 견제하고 원의 파트너로서 왕실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에서는 임연 사망 후 그 후계자인 임유무(林惟茂)까지 살해되며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개경 환도가 서둘러 진행되었다. 이에 무신정권의 잔당들은 1270년(원종 11) 5월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일으킨다. 왕정복고 이후 고려와 원 조정이 무신정권 잔당들에게 엄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개경으로 돌아온 고려 조정은 곧바로 원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이를 기회로 동녕부의 반환을 요청하였다. 서북면 일대의 반란이 무신정권에 대한 반발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원종의 입장에서는 무신정권이 몰락한 이 시기 반환 요청의 명분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한 듯하다.

고려 조정의 반환 요구에 대해 원 황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오히려 1275년(원종 16) 12월에는 동녕부를 동녕로(東寧路)로 승격시켜 총관부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완강한 태도를 확인한 고려 또한 원 황제에게 한동안 동녕부 반환을 요청하지 않았다. 동녕부로 도망친 고려인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거나 일본 정벌에 동녕부 사람을 충원하라고 제안하는 등 소극적 대응만 할 따름이었다.

5 동녕부 폐지와 그 이후

동녕부는 1290년(충렬왕 16) 3월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폐지되고 고려로 반환되었다. 같은 해 7월 고려에서는 서북면에 다시 수령(守令)을 두고 장군(將軍) 정복균(鄭復均)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아 그 일대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최탄과 한신 등에게 점거된 이래 20년 넘게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었던 지역을 비로소 고려의 지방제도 하에 재편제하게 된 것이다.

고려와 원 양측 모두 동녕부가 폐지된 연유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정확히 어떠한 경위로 동녕부가 폐지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동녕부 폐지 이전의 정세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고 있다.

우선 충렬왕(忠烈王)의 위상 변화에서 첫 번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1274년(원종 15) 5월, 당시 태자였던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부인으로 맞아 황제의 부마로서 원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한 달 뒤 원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처음에 영녕공 왕준이나 홍차구와 같이 일찍부터 원에서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한 고려인들에게 밀려 고려 정국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나, 1278년(충렬왕 4) 이후 원의 일본 정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차 그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는 황제의 친속이라는 이점을 적극 활용해 쿠빌라이와 직접 소통하며 자신의 능력이 홍차구보다 뛰어남을 강조하였고, 홍차구에게 더 이상 중임을 맡기지 말 것을 노골적으로 쿠빌라이에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내안(乃顔, 나얀)의 난을 계기로 고려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데에서 두 번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고려는 몽골 초대황제 칭기스칸(成吉思汗)의 동생들이 다스리던 지역과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그 가문을 역사학자들은 동방3왕가라고 부르는데, 충렬왕 당시까지 동방3왕가는 원 황실의 일원으로서 황제 선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1287년(충렬왕 13) 4월 원 중앙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동방3왕가는 내안을 맹주로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사건은 70세를 넘긴 쿠빌라이가 직접 정벌에 나섰을 만큼 원에 큰 충격을 안겼는데, 이때 동방3왕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충렬왕은 자진하여 쿠빌라이에게 지원 의사를 밝히는 등 반란군 토벌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후 내안의 난 자체는 6월에 진압되어 비교적 시시하게 끝났으나 원 황제의 입장에서 동방3왕가는 향후 얼마든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내안의 난에 합세하였던 합단(哈丹, 카단)이 재차 반란을 일으켜 1290년 초에는 고려 경내까지 밀고 내려와 1년 반 동안 고려 동북부를 노략하기도 하였다. 동녕부의 반환은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정황상 동방3왕가라는 위험요소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원 황제가 분열된 고려를 충렬왕 중심으로 단합시켜 강력한 후방으로 삼으려 했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서북면을 고려에 반환한 이후 동녕부라는 기관 자체는 고려 경내에서 폐지되고 요동으로 이관되었다. 원으로 옮겨진 동녕부는 실질적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유명무실의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동녕부라는 존재의 등장 자체가 역사적으로 고려와 원 관계의 불안정성에 기인하였던 만큼 양국의 관계가 흔들릴 때 동녕부가 재차 문제의 기관으로 부상할 소지는 상존하고 있었다. 원이 패망하여 북원(北元)으로 불리던 시기, 동녕부는 기황후(奇皇后) 일족과 같은 부원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공민왕의 반원개혁으로 아버지 기철(奇轍)을 잃은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가 무리들을 이끌고 동녕부에 자리를 잡아 번번이 고려 북방을 노렸다. 이에 공민왕은 1369년(공민왕 18) 11월 동북면과 서북면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하며 동녕부 공격을 계획하였고, 이듬해 1월부터 8월까지 이성계(李成桂), 지용수(池龍壽), 양백안(楊伯顔)과 같은 장수를 보내 동녕부를 공격하였다. 이후 명(明)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며 동녕부는 역사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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