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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고려침입

세계를 뒤흔든 몽골 기마병, 고려로 밀려오다

1231년(고종 18) ~ 1270년(원종 11)

몽골의 고려침입 대표 이미지

몽골의 대칸 우구데이칸(재위 1229~1241년)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1 개요

1231년(고종 18)의 1차 침입을 시작으로 한 몽골의 고려 침입은 1259년(고종 46)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講和)가 이루어질 때까지 거의 30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지속되며 고려 사회에 큰 피해를 주었다. 고려가 몽골에 대한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고려민들의 노력과 희생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1차 침입 직후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한 것도 항쟁 지속의 중요한 요인 중 한 가지였다. 1259년(고종 46)에 강화가 이루어졌지만, 고려와 몽골과의 관계는 불안하게 전개되었다. 양국 관계는 1270년(원종 11)에 개경(開京) 환도가 단행되고, 이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일으킨 난이 1273년(원종 14)에 진압되면서 안정을 찾게 된다.

2 1218년 형제맹약의 체결과 파기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은 1225년(고종 12)에 발생한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사건을 구실로 살례탑(撒禮塔)을 장수로 한 군대를 파견해 고려를 공격해왔다. 몽골이 고려를 침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지만 이전에도 몽골은 1218년(고종 5), 고려 강동성(江東城)에 피신해 있던 거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한 차례 고려에 군대를 보낸 바 있었다.

몽골의 발흥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금의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거란족 가운데 야율유가(耶律留哥)가 1211년에 요왕(遼王)을 칭하였고, 1216년에는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몽골군, 금군과의 충돌에서 패하고 후퇴해 고려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노원순(盧元純), 오응부(吳應夫), 김취려(金就礪) 등이 지휘하는 3군을 보내 적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란의 후속부대가 개경 근교에까지 출몰하는 등 피해가 커졌다. 고려에서는 1218년(고종 5) 9월에 다시 조충(趙冲)을 서북면원수로 삼고 3군을 출정시켰다. 치열한 전투 끝에 고려군은 거란군을 패퇴시켰고, 거란군은 평양 동쪽의 강동성으로 들어가 웅거했다.

1214년에 금의 중도를 함락시킨 것을 시작으로 1216년에 중국 동북부의 여러 지역에 대한 공략을 진행하고 있던 몽골은 당시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포선만노(蒲鮮萬奴)의 동진(東眞)을 복속시킨 후, 거란 토벌을 구실로 고려에 들어왔다. 열악한 기후상황 등으로 인해 강동성 공략이 지연되자 몽골 장수 합진(哈眞)은 고려 원수부에 사신을 보내 군수물자를 원조하고 군대를 파견할 것을 청하였다. 동시에 몽골 황제가 거란군을 격멸한 후 몽골과 고려가 형제맹약을 체결할 것을 명했음을 전했다. 이에 조충,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은 몽골군과 연합해 1219년(고종 6) 2월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강동성 전투(江東城戰鬪) 이후 고려와 몽골 사이에 형제맹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고려가 매년 몽골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공물 요구는 그 빈도 면에서도, 요구하는 공물의 물품 및 수량의 면에서도 과도했다. 몽골의 사신들은 무례하고 난폭하기도 하여 고려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24년(고종 11) 11월에 고려로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이듬해 정월에 귀국하던 도중 압록강 유역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고여가 피살된 이후 몽골은 진상 확인을 위해 또 다른 사신을 파견했고, 고려는 그 사신을 죽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이 사건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저고여 피살사건(著古與被殺事件)도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었음을 강변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두 차례나 연이어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가운데,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와의 맹약 관계를 파기했고, 침략을 단행했다.

3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고종 18)에 몽골은 저고여 피살사건을 구실로 침략해 왔다. 그러나 침략의 실질적 이유는 1227년에 칭기스칸이 사망하고 그 아들 태종 우구데이가 즉위한 이후, 당시 동아시아 방면 몽골 정벌전의 1차 과제였던 금 정벌전을 준비하는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살례탑을 장수로 한 몽골군은 1231년(고종 18) 8월, 압록강 하구의 함신진(咸新鎭)을 통해 고려로 들어왔다. 그러나 당시 함신진을 지키고 있던 방수장군 조숙창(趙叔昌)은 몽골군에 투항했고, 몽골군은 함신진을 교두보로 하여 정주(靜州)와 철주(鐵州) 등을 함락시켰다. 아직 고려 조정 차원에서의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철주민들은 항복을 유도하는 몽골군에 저항하며 방어사 이원정(李元禎), 판관 이희적(李希績)의 지휘를 받아 철주성에서 보름간 버텼지만, 식량이 다하고 지원군이 이르지 않는 상황에서 모두 자결했다.

고려군이 승전한 사례도 있다. 몽골군의 3개 부대 가운데 한 부대가 9월 초 귀주(龜州)를 포위했다. 당시 귀주를 방어하고 있던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는 김중온(金仲溫),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몽골군을 물리쳤다. 1231년(고종 18) 9월부터 12월까지 이루어졌던 귀주성 전투(龜州城戰鬪)에서 몽골이 다양한 공성기기를 동원해 공성전을 벌이는 가운데에서도 박서 휘하 귀주성의 군사들은 몽골군으로부터도 칭찬과 감탄을 받을 정도의 임기응변과 정신력으로 몽골의 공격을 막아냈다.

1231년(고종 18) 9월, 고려 조정에서는 상장군 이자성(李子晟)을 수장으로 3군을 구성했고, 황주(黃州) 동선역(洞仙驛)에서 고려 중앙군과 몽골군 사이의 첫 전투가 이루어졌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몽골군 8천의 기습공격을 받고 고전하다가 초적 농민군의 분전으로 승리했다. 동선역 전투(洞仙驛戰鬪)에서 몽골군을 격퇴시킨 고려군은 북상하여 10월에 북계 지역의 군사 거점인 안북대도호부[안북부](安北大都護府)에 이르러 다시 몽골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고려군은 몽골 기병의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패전했다. 이 전투에서 군사 태반이 살상되고 장군 이언문(李彦文) 등이 전사했다.

안북성 전투(安北城戰鬪)에서 승리한 몽골군은 개경을 거쳐 충주(忠州)까지 진군했다. 몽골군 장수들이 개경 근교에 주둔하게 된 상황에서 고려정부는 몽골과의 화친을 모색하여 12월 초에 왕족 회안공(淮安公)을 살례탑에게 파견하였다. 또한 몽골 사신을 통해 표문을 보내 양국 간에 화의가 이루어졌다.

살례탑은 이 전투를 통해 공략한 고려 북계 지역의 여러 성을 관리하기 위해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였다. 이어 1232년(고종 19) 정월에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몽골의 1차 고려 침입은 일단락되었다.

4 강화천도와 몽골과의 전쟁

한편, 당시 무신집권자였던 최우(崔瑀)는 몽골군 철수 직후 수전에 약한 몽골군에 대응하기 위해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길 것을 논의하였다. 최우는 화친을 추진할 당시에 이미 항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강화천도(江華遷都)는 최씨정권의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당시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응해 시행한 해도입보책(海島入保策)의 일환이기도 했다.

천도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유승단(兪升旦), 야별초(夜別抄) 지유 김세충(金世沖) 등은 천도에 반대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우(崔瑀)는 반대 의견을 누르고 1232년(고종 19) 7월에 강화천도를 단행했으며, 이에 앞서 6월에는 살례탑이 고려에 설치했던 다루가치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의 대응은 몽골에 또 다른 빌미를 제공, 몽골의 2차 침입을 불러왔다.

그해 8월에 몽골은 개경으로의 환도와 고종[고려](高宗)과 최우의 몽골 입조 혹은 출륙을 요구하면서 살례탑을 수장으로 한 2차 침입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때의 몽골군은 같은 해 12월, 살례탑이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侯)의 화살에 맞아 사망함에 따라 철군하게 된다.

이후에도 몽골의 고려 침입은 계속되었다. 1235년(고종 22) 남송 정벌전의 일환으로 단행된 당고(唐古)의 3차 침입, 태종 우구데이 사후 정종 구육이 즉위한 이듬해인 1247년(고종 34) 아모간(阿母侃)의 4차 침입, 헌종 뭉케 즉위 후 이루어진 1253년(고종 40) 야굴(也窟)의 5차 침입, 1254년(고종 41) 차라대(車羅大)의 6차 침입에 이르기까지 몽골의 고려 침입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개경환도와 국왕의 친조에 더하여 호구조사 실시, 역참 설치, 조정군(助征軍) 파견, 양곡 제공, 다루가치 설치, 독로화(禿魯花) 파견 등 6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에 따라 1241년(고종 28)에 왕족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몽골에 독로화로 보내기도 했다.

한편, 차라대 지휘하의 6차 침입은 이전과 달리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그 피해가 심화되었다. 이에 최씨정권을 주축으로 유지되어 오던 대몽항전책에 반대하여 적극적인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강화론이 최자(崔滋) 등 강화파 신료들에 의해 대두했다.

5 강화(講和), 삼별초의 난, 전쟁의 종식

전쟁의 피해가 심화하고 강화론이 대두하는 가운데, 1258년(고종 45)에는 최항[중기](崔沆)과 최의(崔竩) 집권 과정을 거치면서 거듭된 최씨정권 내부의 분열 속에서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가졌던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 김준(金俊), 박송비(朴松庇) 등이 최의를 살해하고 왕에게 정치를 되돌리는 무오정변(戊午政變)이 발생했다. 최씨정권이 종식됨에 따라 강화론이 힘을 얻어 1259년(고종 46)에는 훗날 원종[고려](元宗)으로 즉위하는 태자 왕전(王倎)이 강화를 위해 몽골에 입조했고, 헌종 뭉케 사후 황제위 계승 경쟁을 앞두고 있던 쿠빌라이와 태자 왕전 사이에 고려-몽골 간 강화가 이루어졌다.

최씨정권이 종식되고 몽골과의 강화가 성사되었으나 이후에도 김준, 임연(林衍)으로 이어지는 무신집권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몽골과의 관계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무신집권자와 국왕간에 정치권력 장악을 둔 경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269년(원종 10), 당시 무신집정이었던 임연이 자신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安慶公)왕창(王淐)을 옹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당시 몽골에서 고려로 귀국 중이던 세자, 즉 원종의 아들이 몽골로 돌아가 몽골 황실에 청혼하는 한편으로 군대를 요청했고, 고려와의 관계를 불안하게 여기던 몽골은 이를 받아들였다. 몽골의 적극적 개입으로 원종은 폐위 5개월 만에 복위했고,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살해되면서 무신정권은 종식되었다.

복위한 원종은 몽골의 요구에 따라 1270년(원종 11) 5월, 개경으로의 환도를 단행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을 지탱하는 한편 대몽항쟁을 주도해왔던 삼별초(三別抄)가 이에 반대했고, 원종은 그 해산을 명하고 명단을 압수했다.

이에 같은 해 6월, 장군 배중손(裵仲孫), 야별초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이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를 설치해 고려조정과 몽골에 대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근거지를 진도(珍島)로 옮겼으나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과 흔도, 홍다구(洪茶丘) 등이 이끄는 몽골군의 연합작전에 의해 배중손과 승화후가 살해되었고, 남은 군대가 김통정(金通精) 지휘 아래 제주도(濟州島)로 근거지를 옮겼다. 고려 조정과 몽골은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에 1273년(원종 14) 2월, 대규모 고려-몽골 연합군이 제주도를 공격하여 삼별초군을 대패시키고 김통정은 자결함으로써 3년여에 걸친 삼별초 항쟁[삼별초 난](三別抄抗爭)은 종식되었다.

제주도의 삼별초가 진압된 이후 몽골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두었다가 이를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로 개편하고 다루가치를 두었다. 이외에도 고려의 변경 지역으로서 몽골과의 전쟁 과정을 거치면서 몽골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 지역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먼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1258년(고종 45) 고려 용진현 사람인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인 탁청(卓靑)이 몽골에 투항하면서 몽골이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관부이다. 또한 1269년(원종 10) 원종 폐위사건을 계기로 당시 서북면병마사였던 최탄이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개 성과 자비령 북쪽의 6개 성을 갖고 몽골에 투항했고, 이듬해 이 지역 통치를 위해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되었다.

1259년(고종 46) 강화 이후에도 불안하게 전개되던 고려-몽골 관계는 무신집권의 종식과 함께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의 환도가 이루어지고, 이에 반대했던 삼별초의 난이 진압됨으로 해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후 고려-몽골 관계는 고려의 몽골에 대한 복속을 전제로 고려의 국가로서의 위상이 보장되는 가운데 몽골의 고려에 대한 강한 정치적 간섭과 압제가 이루어지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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