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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僧科]

승려 인사(人事)를 위한 국가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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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과(僧科)는 국가에서 우수한 승려를 선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시행한 시험을 말하며, 고려시대 시작되었다. 이는 관인을 선발하는 시험인 과거(科擧)에 조응하는 제도로, ‘승려를 선발하는 과거’의 약칭이다. 광종대 승려를 대상으로 시험이 거행되었고, 이를 계기로 점차 체계화되어 종(宗) 단위의 예비시험과 국가 차원의 본시험으로 구분되어갔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는 대체로 대덕(大德)이라는 승계(僧階)를 수여받았으며, 그 자질이 인정될 경우 점차 더 높은 승계로 진급하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주요 사원의 주지(住持)로도 임명될 수 있었다.

2 시험을 통한 승려의 선발

승과는 국가에서 자질이 있는 승려를 선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시행한 시험을 말한다. 이는 시험을 통해 관인을 선발하는 제도인 과거에 조응하는 것으로, ‘승려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의 약칭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당대에는 승과보다는 대선(大選)이라는 용어로 많이 명명되었는데 이외에도 승선(僧選), 선선(禪選), 종선(宗選) 등 다양하게 불렸다.

승과의 시원적인 기록으로는 태조대 ‘해회(海會)’를 열어 승려를 선발한 사례가 있고 광종 재위 초에 승려를 대상으로 시험 이 열린 사실이 전한다. 본격적인 승과의 시행 시기는 대체로 광종대 시험의 시행으로 파악되며 이때의 시험으로 승려 지종(智宗)이 선발되었다. 광종은 왕 9년인 958년에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자문으로 과거제를 도입하였다. 즉 광종대는 과거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능력에 근거하여 관인을 선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재위 기간에는 노비안검법, 공복제 등 굵직한 제도 개혁들이 단행되었는데 불교 교단 역시 개혁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승과는 광종대 일련의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과거제의 도입, 승계제의 시행 등과 함께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이때부터는 승려에게 전에 없던 체계화 된 지위를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그 체계는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까지 확인되는데 지금은 이를 승계(僧階)라 명명하고 있다.

3 승려 인사(人事)의 첫 관문

승과가 시행된 처음에는 대덕부터 삼중대사까지 승계가 마련되고 선교(禪敎)의 구분이 없었다.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삼중대사 다음의 승계로 교종의 경우 수좌(首座), 승통(僧統)이 마련되었고 선종에 대해서는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가 설치되었다.

승려를 대상으로 한 제도들은 점차 유기적으로 운영되고 체계화되어 갔는데 이에 따라 승과도 선종선(禪宗選=禪宗의 大選)과 교종선(敎宗選=敎宗의 大選)으로 구분되고, 다시 선교의 각 종파 단위로도 세분화된다. 예컨대 천태종선(天台宗選), 조계종선(曹溪宗選) 등을 들 수 있다. 천태종선의 경우 의천(義天)이 고려에 천태종을 성립시키면서 천태종 승려를 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시험이었다.

그 결과 승과는 각 종파에서 승려를 선발하고[宗選], 그 합격자들이 국가 차원의 본시험[大選]에 응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경우 종파 단위로 시행된 시험은 예비시험이고,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선종선과 교종선은 최종시험이 된다. 본시험은 궁궐에서 가까운 개경 일대 사찰에서 열렸는데 선종선의 경우 선종 사찰인 광명사(廣明寺)가 그 장소가 되었고, 교종선은 교종 사찰인 왕륜사(王輪寺)가 시험장이 된 사례가 많다.

승과를 주관한 시험관은 의천이나 학일(學一)과 같은 당대의 고승들이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유승단(俞升旦)과 같은 일반 관료가 승과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후자의 경우 불교 경전에 통달하였다는 자질이 인정되어 시험관으로서의 역할이 맡겨진 것으로 이해된다. 예컨대 유승단의 경우 지공거(知貢擧),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한 경험이 있는 고위 관료였다. 『고려사』 유승단 열전에 의하면 그가 불교 경전에 통달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적혀있을 뿐 그가 승과를 주관한 이력은 적혀있지 않지만, 후에 그의 제문(祭文)에는 그의 승과 주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고려시대 전 기간에 걸쳐 승과가 시행되었고 또한 선종과 교종으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험을 주관하는 역할은 많은 경우 명망있는 승려들의 몫이었겠으나, 일반 관료들이 담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승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승려에게는 대덕(大德)이 수여되었다. 대덕은 대체로 승계의 첫 단계로 여겨진다. 참고로 시간이 지나면서는 승과에 합격한 그 자체도 하나의 직급처럼 여겨지게 된다. 이에 대덕 이전에 대선도 승계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승계의 가장 첫 단계는 대덕이다. 문종대 정해진 전시과(田柴科) 분급 규정에 의하면, 대덕도 전시(田柴)를 지급받았다. 전시과는 관인에게 직역의 대가로 지급하는 경제급부였는데 대덕도 그 대상이 되었다. 대덕은 승과에 합격해야 획득할 수 있는 지위였고 해당 승려는 전지(田地) 40결, 시지(柴地) 10결를 받았다. 다만 대덕 외 그 이상의 승계에 대해서는 전시액이 제시되어 있지 않아 구체적인 현황은 알기 어렵다. 대덕이 소정의 전시를 지급받았으므로 이후 대사 이상으로 진급하는 승려들 역시 일정한 경제 급부가 기대되었을 것이다.

승려로서 그 자질이 인정되면 일정한 기간이 지나 대덕에서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 등 더 높은 승계로 진급할 수도 있었다. 삼중대사 이후에는 선종 승려의 경우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까지도 오를 수 있었고 교종 승려라면 수좌(首座), 승통(僧統)까지 오를 수 있었다. 진급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높은 승계에 오른 승려일수록 국가에서 중요하게 관리하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곤 하였다. 지방의 이름난 사찰이나 규모가 큰 사찰을 들 수 있겠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경 일대의 사찰이었다. 고려 궁궐을 둘러싸고 다수의 왕실 사찰들이 포열해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들 사찰은 왕족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거나 각종 불교 행사와 의례를 거행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사찰 자체의 규모도 컸고 왕실 재산이나 공전(公田)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공간을 관리할 수 있을 만한 승려가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그 역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승계였다. 물론 높은 승계나 승직에 오른 승려들중에는 오히려 지방의 고요한 절로 내려가 속세를 벗어나 수도를 이어나가거나, 쇠락한 절을 주지하여 중건에 힘쓰기도 하였고 작은 절을 하산소(下山所)로 택하여 자신을 위시한 승단(僧團)의 일종의 거점, 공간적 기반으로 삼기도 하였다.

고려 승려가 오를 수 있는 최고 승직(僧職)인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는 대선사 혹은 승통 등과 같이 당대 최고의 승계에 오른 승려들 중에 왕이 직접 선발하였다. 이렇듯 승려 인사(人事)는 승계를 기준으로 유기적으로 처리되고 있었는데 이 모든 체계의 가장 기본 조건이 승과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즉 승과는 고려시대 승려가 승계·승직을 수여받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가장 첫 관문이었다.

수선사(修禪社) 제2대 사주(社主)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경우 곧바로 선사로 임명되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선종 최고 승계인 대선사로 진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의 제자들은 ‘승과를 거치지 않고 이러한 높은 승계를 받은 이는 우리 스승밖에 없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는 승계를 받기 위해서는 승과를 거치는 것이 필수적인 절차였고 승려들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 승려들은 승계나 승직을 받기 위해서는 승과에 응시하여 합격해야 하였다.

고려시대 관직에 진출하려는 인재들은 과거를 주요 입사로로 여겼고 합격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승과 역시 그 합격자들의 지난한 고생을 위로해주는 글도 전하며 승려의 생애를 기록한 비(碑)나 묘지명(墓誌銘) 등에서 승과의 합격 여부가 빠짐없이 기록되어있다. 아직 승계나 승직을 받지 못한 승려이거나 사원의 주지로 임명되지 못한 경우라면, 그는 자신의 직급을 ‘대선’이라 적음으로써 승과 합격자임을 밝혔다.

승과는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시험이었고 그 합격자에게는 승계가 승진되었으며 해당 승려는 진급 과정에서 국가에서 관리하는 주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최고 승계인 승통 혹은 대선사에까지 오른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승직인 왕사나 국사로도 책봉될 수 있었다. 이렇듯 승과의 합격은 이후 승려로서 영위할 수 있는 명예와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계기였다. 실제로 고려 승려들은 적극적으로 승과에 응시하였다. 1084년(선종 1)에는 선종 승려들이 자신들도 문과 시험의 예(例)에 의거하여 식년(式年), 즉 3년에 1번씩 정기적으로 시험을 열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때의 선종 승려들은 ‘구산문참학(九山門參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숭과를 준비중이던 선종 승려들이었다. 이해에 이러한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건대 그 전에는 교종 계열의 승과에 비해 선종 승과는 다소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또는 광종대 승과가 시행되기 시작하고 아직 식년시의 형태로 거행되지는 않던 상황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떻든 당시 이들 승려의 승과의 정기 개최에 대한 바람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사료된다. 짤막한 기록이지만, 고려시기 승과의 시행이 불교 교단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일방적인 시책이 아니라 불교 교단의 상당한 호응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 승과는 통치권과 교권(敎權) 모두에게 의미있는 제도로서 기능하였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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