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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과[田柴科]

고려시대 공무원들이 먹고살고 군불 때는 기반

976년(경종 1) ~ 1391년(공양왕 3)

1 개요

전시과(田柴科)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유지된 제도로서, 국가의 관료와 직역을 담당하는 자들에게 그 지위에 따라 조세(租稅)를 받을 수 있는 전지(田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시지(柴地)를 지급해 준 제도이다. 976년(경종1) 처음 제정되었는데 이를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라고 하며, 998년(목종 1) 개정된 것을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라 한다. 그리고 1076년(문종 30) 다시 개정된 것을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라 하여 이때 전시과가 완비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후 전시과는 1391년(공양왕 3) 폐지되고 과전법(科田法)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며 고려시대 관료 및 직역부담자들의 기본적인 경제기반이 되었다.

2 시정전시과 : 공신 및 호족에 대한 대우와 관료제적 질서 수립 사이에서의 고민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전근대에 토지를 지급해준다는 것은 경제기반을 보장해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관료를 비롯한 지배층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목적은 그들의 신분을 보장해줌으로써 왕을 위해 계속 봉사하기를 기대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고려에서는 태조(太祖) 때부터 후삼국 통일 이후 역분전(役分田)을 그 인품과 공로를 따져 모든 관료들과 군사들에게 분급하였다. 이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을 거치는 가운데 공신(功臣)과 호족(豪族)의 기득권을 보장하면서도 관료제적 질서를 강화하려는 흐름이 지속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극단적으로는 광종(光宗) 때의 살벌한 숙청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종(景宗)은 국초부터 이어진 관료제적 질서 정립의 흐름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공신과 호족을 배려함으로써 숙청과 복수로 얼룩진 정치 구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전시과가 비로소 정비되었던 것이다.

976년(경종 1)에 정비된 시정전시과의 정식 명칭은 직산관각품전시과(職散官各品田柴科)이다. 여기서 직관(職官)은 관직을 가지고 그에 따른 직무를 수행하는 관리이며 산관(散官)은 관직을 갖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관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직산관각품전시과란 직관과 산관을 가리지 않고 모든 관리가 각자의 품(品)에 따라서 지급받는 전지(田地)과 시지(柴地)의 등급[科]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품은 관품(官品)이 아니라 역분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품(人品)이었다. 인품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갈리나, 시정전시과가 온전히 관료제적 질서에 따라 정비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시정전시과의 독특한 점은 지급 대상의 구분에서 나타난다. 지급 대상은 먼저 자삼(紫衫)을 따로 놓고, 그 아래를 직무에 따라 문반(文班), 잡업(雜業), 무반(武班)으로 나눈 뒤 각각 그 안에서 단삼(丹衫), 비삼(緋衫), 녹삼(綠衫)으로 세분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잡리(雜吏)와 앞의 지급 대상에 들지 못한 자들에게도 적게나마 토지를 지급해주었다. 여기서 자삼, 단삼, 비삼, 녹삼은 각각 자색 옷을 입는 사람, 단색 옷을 입는 사람, 비색 옷을 입는 사람, 녹색 옷을 입는 사람을 의미하며, 이는 960년(광종 11) 정해진 공복(公服)의 순서대로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공복인 자삼을 입는 기준은 어떤 관직에 있는지가 아니라 원윤(元尹) 이상의 고위 관계(官階)를 지녔는지 여부였다. 이는 단삼 이하로는 어떤 관직에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은 것과 대조된다. 원윤은 고려 초기에 사용되었던 16등급 관계 중 9번째로서, 태조가 공신과 호족을 대우할 때 주는 관계의 하한선이었다. 곧 국초의 공신과 호족의 후예 및 고위 관료들의 기득권이 공복제도에 반영되었고, 나아가 전시과를 처음 정비할 때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품에 따라서는 지위가 낮은 색의 공복을 입은 자라도 높은 색의 공복을 입은 자보다 더 많은 전지와 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예컨대 문반 단삼을 입는 자들은 1품부터 10품까지 나뉘었는데, 5품 이하로는 문반 비삼 1품보다 적은 전지와 시지를 받았다. 이 점은 자삼을 입은 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1품에서 18품까지 나뉜 가운데 11품 이하로는 문반 단삼 1품보다 적은 전지와 시지를 받았다. 대체로 높은 색의 공복을 입을수록 많은 전지와 시지를 받았으므로 시정전시과가 관료제적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나, 인품에 따라 공복 순서와 거꾸로 될 수도 있었던 점에서 공신과 호족을 포섭해야 했던 경종의 고민 역시 읽어낼 수 있다.

3 개정전시과 : 조정과 타협을 통한 관료제적 질서 정비

고려의 정치 제도는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특히 관제의 많은 변화가 수반되었던 995년(성종 14)에는 초기의 관계(官階)를 대신하여 당(唐)의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고려 무반의 위계가 무산계가 아니라 문산계였고 무산계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나, 더 이상 원윤 이상의 고위 초기 관계를 지닌 것만으로는 고위 관료로서 우대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관료제적 질서 강화의 흐름 속에서 998년(목종 1) 전시과가 개정되었다.

개정전시과의 정식 명칭은 문무양반급군인전시과(文武兩班及軍人田柴科)로서, 주요 관료 집단인 양반(兩班) 즉 문반과 무반뿐 아니라 군인(軍人)에게도 지급되는 전시과였다. 고려시대에 군인(軍人)은 무반이 아니라 일반 병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개정전시과의 가장 마지막 두 과(科)의 지급 대상에 기병으로 추측되는 마군(馬軍)과 보병으로 생각되는 제보군(諸步軍)이 있다. 그리고 군인뿐 아니라 유외잡직(流外雜職) 역시 지급 대상에 포함되고 있으므로, 개정전시과에서도 시정전시과와 마찬가지로 관료부터 서리(胥吏)나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지와 시지를 지급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정전시과에 비해 개정전시과에서 확연히 달라진 점은 전시과를 지급하는 기준이 인품에서 관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개정전시과의 과별 지급 대상을 보면 재상인 내사령(內史令)과 시중(侍中)부터 시작하여 어느 관직이 얼마나 전지와 시지를 받을지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이처럼 개정전시과는 높은 관계에 따른 공복 혹은 인품이 아닌 관직이 일원적인 지급 기준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일수록 더 많은 보상을 누리는 관료제적 질서가 한층 안정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무와 상관없이 원윤 이상의 고위 관계를 지니고 자삼을 입던 사람들에게 전시과 지급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전까지 최고의 대우를 받던 지배층을 갑자기 홀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995년(성종 14) 초기의 관계가 그 의미를 잃고 문산계로 대체될 때, 자삼 이상에게는 정계(正階) 곧 비슷한 품계의 문산계를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높은 문산계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기존에 자삼을 입던 사람들이 각자의 관계에 상응하는 문산계를 얻어 새로운 체계에 포함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개정전시과의 지급 기준은 문산계가 아니라 관직이었으므로, 어떤 지위의 문산계를 가졌느냐보다는 어떤 관직을 맡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였다. 관직에는 정원이 있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문산계는 있으나 맡은 직무가 없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개정전시과 체계 안에서 이들은 산관으로서 실제 관직에 준하되 이름뿐인 산직(散職)을 받아 전시과를 지급받았다. 대체로 실제 직무를 보는 사람보다 1~2등급 낮게 분류되었으며, 무반은 무려 4등급 낮게 취급되었다. 기존에 최고 지배층이던 자삼을 입는 자들은 높은 지위의 산직을 가지고 낮은 지위의 실무자들보다는 여전히 더 많은 전시과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제 동급의 실무자들보다는 명백하게 불이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전시과의 개정 방향이 실제 직무를 수행하는지 여부를 우선시하는 것이었음을 다시금 알려주며, 그 변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불만은 조정과 타협을 통해 무마하려 노력했다는 점 역시 보여주고 있다.

4 경정전시과 : 전시과의 완성

개정전시과 정비 후 전시과의 추가 개정은 1034년(덕종 3)에 있었다. 그러나 개정하였다는 것만 전해질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개정전시과 다음은 1076년(문종 30) 제정된 경정전시과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로 고려 말 전시과가 폐지될 때까지 전시과의 추가 개정이 없었기에 경정전시과를 일반적으로 전시과의 완성형으로 본다.

경정전시과의 정식 명칭은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지만, 개정전시과와 마찬가지로 마군(馬軍)과 역보군(役步軍) 및 감문군(監門軍)을 비롯한 일반 병사들에게도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과(科)의 지급 대상인 한인(閑人)과 잡류(雜類)의 성격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시정전시과의 잡리나 개정전시과의 유외잡직과 유사하다고 추측된다. 이를 통해 비록 전시과 자체는 계속 개정되어 왔지만, 핵심 관료인 문무양반뿐 아니라 일반 병사와 서리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직역을 맡는 자들에게 모두 토지를 지급하겠다는 기본 방향은 시종일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정전시과 단계에 이르면 개정전시과와는 다른 중요한 차이가 나타나는데, 바로 산직이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개정전시과에서는 높은 지위의 산직을 가진 사람은 비록 동급의 실직을 갖고 실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보다는 적게 받기는 해도, 낮은 지위의 실직을 가진 사람보다는 대체로 많은 토지를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정전시과에서는 산직을 지닌 사람에게는 토지를 지급해주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직무를 맡아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시과 제도에 내재된 관료제적 질서는 경정전시과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거의 온전해졌다고 하겠다.

단 경정전시과의 지급 대상에 실무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개정전시과에서는 생략되었던 원윤 이상의 향직(鄕職)이 전시과 지급 대상에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향직은 초기에 관계(官階)로서 사용되었다가 995년(성종 14) 이후 문산계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기에 더 이상 향직을 가진 것만으로는 토지를 지급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1009년(목종 12)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으로 즉위한 현종(顯宗)의 정통성이 부족했던 데다가 이후 10년 동안 거란의 침입을 받아, 무너진 왕의 권위를 세우고 사람들을 왕과 나라에 봉사하도록 독려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에 현종대부터 고위 관료에서 일개 병사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로자들에게 향직을 하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향직은 현종대 이래로 나라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유공자들에게 보상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에, 실직을 유일한 기준으로 세운 경정전시과에서도 산직과 달리 지급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나마 향직만으로는 전체 18개 등급 중 12~14과로 분류될 따름으로, 개정전시과에서 최대 5과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산직과 달리 관료제적 질서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원윤 아래로는 향직을 갖고 있어도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지만, 그만큼 일반 병사와 백성들에게 그들 역시 언젠가 전시과를 받을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경정전시과로 전시과 체계가 완성됨에 따라 고려에서는 일개 백성이라도 왕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5 전시과 폐지와 과전법 시행

고려의 전시과는 그 지급 대상이 문무양반에 한정되지 않고 매우 광범위하기에 항상 토지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최고위층부터 토지탈점에 나서게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뒤로 권력을 이용한 탈점은 본격화되었다. 더불어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골의 고려침입은 고려의 토지와 인구를 초토화하고 농업에 기반을 둔 전시과 체계 자체를 위협하였다.

몽골과 강화하고 개경(開京)으로 돌아온 고려 조정은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관료들의 부족한 녹봉을 녹과전(祿科田)으로 대신 지급하였다. 한편 무인정권을 타도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따로 패(牌)를 내려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여 보상하였는데, 이러한 토지를 사패전(賜牌田)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패전은 전시과와 달리 아무런 규정도 제한도 없었으므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공무의 대가로 받아야 할 녹과전 등의 토지까지 차지하는 폐단이 심각하였다. 심지어 사패를 사칭하여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는 사례도 빈번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사패로 인한 사전(私田)의 폐단을 없애고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 후기 내내 정치도감(整治都監)이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등을 설치하며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제로 인해 옛 체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재정적인 면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이에 고려 말 조준(趙浚)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조종(祖宗)이 토지제도를 세운 뜻에 어긋난다고 보고 사전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토지제도 개혁이 태조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조상들의 정책으로 되돌리려 했던 데에서 더 나아가, 유교 경전에 입각하여 토지제도를 충의와 도덕과 연결시키고 제도 자체의 복원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을 추구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으로 집권한 이들은 조선 건국 바로 전해인 1391년(공양왕 3)에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해 문무양반 위주로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공무를 담당하는 자들의 경제기반을 제공해주었던 전시과는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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