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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난

북쪽의 군사들, 무신정권에 창을 겨누다

1174년(명종 4)

1 개요

조위총(趙位寵)은 12세기 고려의 무신집권기 초기에 활동했던 관리였다. 그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 그리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이력이나 가계는 알 수 없다. 서경유수(西京留守)를 맡고 있었던 1174년(명종 4)에 휘하의 병력 및 북계 여러 성의 세력을 모아 개경을 쳐 무신집권자들을 제거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1176년(명종 6)까지 서경과 북계 일대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를 ‘조위총의 난’이라 부른다.

2 무신정변과 김보당의 난, 피바람을 몰고 오다

1170년(의종 24) 8월, 고려 정계에 큰 사건이 터졌다. 국왕 의종(毅宗)을 호위하던 시위부대의 무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의 무신(武臣)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이 사건을 ‘무신정변(武臣政變)’ 혹은 ‘무신의 난’이라 부른다. 의종은 폐위되어 유배지로 보내졌고, 무신집권자들은 새 국왕 명종(明宗)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두고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수많은 문신이 학살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로부터 100년에 걸친 ‘무신 집권기’가 시작되었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의 권력은 난을 주도한 특정 소수 무신, 특히 가장 적극적으로 피바람을 일으켰던 이의방과 이고에게 쏠렸다. 주도 세력 중 가장 고위 무신이었던 정중부조차 이들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의방이 이고를 살해하며 정권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폭정에 대한 반발도 나타났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터졌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가 있던 김보당이 동계(東界)의 병력을 동원하여 의종 복위와 무신정권 타도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하였고, 김보당을 비롯한 많은 문신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전 국왕 의종도 무신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무신정변과 김보당의 난, 이 두 사건은 당시인들에게 ‘경인년과 계사년의 난’이라 통칭되며 큰 사변으로 역사에 기록이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해인 1174년(명종 4) 9월에 다시 ‘조위총의 난’이 터졌다. 그리고 이번 거병은 무신집권자들을 초미의 긴장에 몰아넣었다. 그가 고려의 북방 영역, 보통 북계라 불리던 일대의 군대를 휘몰아 수도 개경 코앞까지 진격했던 것이다.

3 조위총, 북계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치다

대체 조위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그의 열전에는 단지 ‘조위총은 사서(史書)에서 그 가계(家系)를 잃어버렸다. 의종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서경유수가 되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고려사』 편찬 당시에 관부에 남겨진 기록에는 그의 선대에 관한 내용이 남겨져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서경군을 공격하러 출병했다가 사로잡힌 관군의 지휘관 최균(崔均)은 조위총의 부하들에게 “너희 역적들의 장군인[賊帥] 조위총은 군졸[行伍]에서 일어나 지위가 팔좌(八座)에 이르렀다.”라고 꾸짖었다. 이를 통해 대개 조위총은 하위 군졸 내지 무관으로 시작하여 서경유수까지 승진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무신들의 경우 무신집권기 이전부터 이러한 경로로 벼슬길에 올라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군권을 담당한 병부의 최고위급 관리인 병부상서이자 서경의 책임자인 서경유수라는 요직에까지 오른 것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는 큰 출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의종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던 무신이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무신정변과 당시 집권자들에 대해서 조위총이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서경은 고려의 요충지였다. 국초부터 중시되었던 서경은 1135년(인종 13)에 터졌던 ‘묘청의 난’ 이후로 쇠퇴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앞으로 살펴볼 서경군의 위세를 보면, 그 뒤로 한 세대가 흐르며 다시 상당한 세력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을 맡고 있던 조위총과 개경의 무신집권자들이 정변 이후 몇 년 동안 특별한 갈등을 빚은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며 유폐되어 있던 전왕 의종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이 조위총이 병력을 일으키는 데에 실제로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가 진심으로 이에 분노했던 것인지, 아니면 좋은 명분으로 삼았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조위총이 당시 ‘이의방이 왕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않은 죄를 성토’하며 이를 대외적인 명분으로 삼았던 것은 명확했다.

그런데 조위총이 북계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이러한 명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북계의 여러 성들에 사자를 파견하여 합세를 독려하며, “풍문으로 듣자하니 개경[上京]의 중방(重房)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근래 북계의 여러 성에는 대체로 심성이 거칠고 사나운[桀驁] 이들이 많다고 하니 마땅히 가서 공격하여 토벌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군대가 이미 크게 일어났으니 어찌 앉아서 스스로 죽임을 당하겠는가. 마땅히 각자 군사와 말을 규합하여 속히 서경으로 오라.”라고 하였다. 조위총의 심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연주(延州)를 제외한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조위총에게 호응한 것은, 북방 지역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 말이 크게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회유로 혹은 압박으로 합류시킨 지역은 대체로 지금의 황해도 북부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까지 걸친 넓은 범위였다.

조정에서는 10월에 윤인첨(尹鱗瞻)을 원수(元帥)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하여 서경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조위총의 병력은 이미 깊숙이 내려와 있었다. 관군이 절령역(岊嶺驛)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가 심하게 치니, 서경군이 고개 위에서 습격을 감행하였다. 관군은 크게 혼란에 빠져 흩어졌고, 원수 윤인첨마저 포위를 당하여 죽을 뻔하였다. 절령은 개경 방어를 위한 요충지였다. 서경군이 이 절령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개경을 항해 남하하였던 것이다. 수도 개경을 둘러싸고 양군의 전면전이 임박하였다.

4 팽팽한 공방전, 그리고 서경을 둘러싼 대치

폐위된 전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대의명분. 중앙에서 내려보낸 관군을 격파하고 최고의 방어 요충지를 돌파한 서경군의 기세. 상황은 조위총에게 크게 유리해보였다. 조위총은 군을 이끌고 개경 서쪽의 권유로(權有路)까지 진격하여 주둔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집권자였던 이의방도 하급 군관에서 출발하여 정변을 주도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이의방은 개경에 있으며 혹시 적에게 동조할 수 있을 서경 출신 관리들을 학살하여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고,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하였다. 예상보다 너무 전격적인 공세였기 때문일까. 기병을 앞세워 돌격한 이의방군의 기세에 서경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서경성까지 퇴각을 하고 말았다. 이의방은 승기를 타고 서경성 외곽에 주둔하여 압박하였으나, 겨울의 모진 추위에 시달리다가 결국 패하고 한 달 만에 귀환하였다.

일진일퇴였으나, 대세적으로 보아 조위총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패배였다. 그의 아들마저 이 과정에서 전사하였고, 서경군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 조정은 서북 지역에 대한 회유를 통해 여러 성을 귀순시켰다. 처음부터 조위총에게 협력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맞선 연주(延州)의 존재도 배후에서 계속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양군은 서로 팽팽히 대치하였다. 어수선한 틈을 타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서경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당시 정중부의 아들이 무려 3만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한 사례는 당시 무신집권자들의 서경 공략에 대한 의지를,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선 것은 서경의 항전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해를 넘겨 1175년(명종 5)이 되면서 상황이 점점 더 조위총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북계 각지에서 양측 세력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위총은 구원을 요청하는 연주(漣州)에 병력을 급히 보냈으나 관군에 패하여 1,700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이곳은 결국 6월에 대포를 앞세우며 공격해온 두경승(杜景升)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용강현(龍岡縣)의 주민들은 어느 편에 붙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관군에 귀순하였다. 서북 지역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무너지며 항복하였고, 서경에 대한 포위가 견고해졌다. 서경은 이제 굶주려 사람의 시신을 먹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관군의 회유책에 서경성을 탈출해 귀순하는 자도 많아졌다. 여전히 서경성에서 출격하여 관군과 부딪쳐 보기도 하였고, 9월에는 절령병마사(岊嶺兵馬使)인 대장군(大將軍) 강점(康漸)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장의 흐름은 완연히 서경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조위총은 이 상황에서 최후의 한 수를 시도했다. 조선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조위총에 대한 평가를 크게 나뉘게 만든 한 수를. 바로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 금(金)을 끌어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5 실패한 최후의 한 수, 그리고 조위총의 죽음

개경 공략이 실패하고 서북 지역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며 서경마저 포위당한 시점에서 조위총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거의 없었다. 조위총이 택한 것은 금에 지원을 요청하는 길이었다. 『고려사』에는 당시 조위총이 금에 보낸 문서들의 대략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조위총은 세 번 사신단을 파견했다. 먼저 그는 정중부 등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많은 관료들을 죽인 것을 알려 자신의 거병이 대의에 부합하는 것임을 호소하였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점점 금에 요청하는 의존도는 높아졌다. 6월에서는 북계 40여 성을 가지고 금에 복속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다가 관군에게 차단당하였다. 그러자 다시 사신을 보내 금에 복속하겠다는 뜻과 군사를 파견하여 고려를 쳐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금에서는 이 사신을 잡아 고려로 보내며, 조위총의 요청을 거부하였다고 알렸다. 아마도 9월의 일로 추정된다.

조위총의 요청은 금에게 달콤한 유혹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금은 고려의 변경이 소란해지자 군대를 파견하여 정세를 탐지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금군은 조위총군을 견제하러 왔다고 말하였으나, 상황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전체적인 전황으로도 조위총이 불리한 상태였으나, 금이 선뜻 그의 손을 잡기에는 명분상으로 다소 곤란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이미 명종의 왕위 계승을 인정해준 금에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실제로 금의 군주 세종(世宗)도 이를 이유로 내세웠다. 살해된 의종을 제대로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다는 거병 초기의 명분은 1175년(명종 5) 5월에 조정이 의종의 국상을 치름으로써 약해진 상태였다.

금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된 1176년(명종 6) 3월, 조위총은 서북지역에 은밀히 사자들을 보내 군사를 모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사로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조위총에게 호응하였고, 조위총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관군에게 일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타오른 불꽃이었다. 그해 6월,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은 서경성에 총공격을 퍼부어 함락시켰다. 조위총은 사로잡혀 목이 베였고, 그 머리는 함에 담겨 개경으로 보내져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이렇게 하여 3년에 걸친 조위총의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난’으로 볼 것인지 대의에 입각한 거병으로 볼 것인지, 혹은 대의에서 시작하여 난으로 끝났다고 볼 것인지, 이보다는 중앙 조정에 대한 북방 지역민들의 불만이 근본적인 동기인지, 조선 초의 『고려사』 편찬 이래로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판단의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일련의 사건들 중 어느 점에 주목할 것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졌던 것이다. 특히 금에 북계를 바치고 귀순하려 했던 모습이 큰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 글에서 어느 쪽으로 단정지어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조위총이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 뒤에도 그 잔여 세력이 거듭 봉기하였고, 이후로 각지에서 무신정권에 반발하는 ‘민란’들이 들불처럼 번졌다는 점이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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