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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鎭浦大捷]

고려 화포, 왜구의 발목을 잡다

1380년(우왕 6)

진포대첩 대표 이미지

진포대첩지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진포대첩은 1380년(우왕 6)에 진포에서 고려가 왜구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진포대첩이 고려와 왜구 사이의 수많은 전투 사이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최초로 해전에서 화포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대승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걷잡을 수 없이 창궐하던 그들의 기세를 꺾어놓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2 지긋지긋한 왜구의 몸살을 앓던 고려, 반격을 준비하다

왜구가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었다. 이 시기 왜구 침략은 국가적으로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살펴보면 왜구의 침략 기사가 드문드문 등장하고 그들의 규모나 피해 정도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잠복기를 지나 1350년(충정왕 2)이 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고려 전역에 왜구로 인한 크고 작은 피해가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왜구의 약탈 범위가 점차 확대되면서 내륙 백성들의 삶까지 피폐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고려 조정은 허둥지둥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지만 홍건적의 침입까지 겹쳐 있던 상황에서 이 문제를 곧장 획기적으로 타개하기는 어려웠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려는 지속적으로 왜구에게 시달리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고려의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무선(崔茂宣)이다. 최무선은 일찍이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대단한 행동파였던 것 같다. 이를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직접 중국인으로부터 화약 기술을 얻어 익혔던 것이다.

최무선의 노력에 힘입어 1377년(우왕 3)에는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었다. 전문기관의 창설은 고려 조정에서 화약 무기 제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데, 이때부터 다양한 화약 무기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당시 화통도감에서 자체 제작하였던 화구(火具)의 종류가 약 16종이나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신무기들은 당시 고려인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화포(火砲)의 개발과 이를 탑재할 수 있는 전함(戰艦) 건조 기술의 발전은 고려가 왜구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였다.

최무선을 중심으로 기술적인 정비에 힘쓰는 한편으로 고려 조정은 이를 뒷받침해 줄 수군 병력을 보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70년대 후반에 수군 병력 증강을 도모하고자 여러 가지로 수군을 충원하는 모습이 사료에 나타난다. 개경의 시전 상인, 오부방리군(五部坊里軍)에서 수군을 차출하는가 하면 면죄 특혜를 걸고 죄수까지 동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전을 대비한 화포 사격 훈련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전문적인 해상 전투 훈련이 실시되었다. 고려는 왜구와의 전쟁에서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준비는 무르익었고 드디어 반격의 시간이 왔다. 때는 왜구의 침략이 극에 달했던 1380년 8월이었다.

3 화약으로 무장한 고려 수군, 진포에서 대승을 거머쥐다

금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진포(鎭浦)는 왜구의 약탈 활동 거점이었다. 이때 왜구들은 진포 입구에 대규모의 함선을 끌고 와 정박하고는 해안으로 올라와 흩어져 양광도와 충청도 연해지역에 불을 지르고 무자비하게 노략질하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왜구의 전함이 500척이었다고 하고 『태조실록』에 실린 최무선 졸기에서는 300척이라고 하여 그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당시 왜구의 침략 규모가 상당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왜구들은 정박한 전함들을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병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는 약탈해 온 곡식을 배에 가득 실어대고 있었다. 곡식을 배로 옮기는 과정에서 바닥에 흘린 쌀이 쌓여 거의 한 자 높이가 될 정도였다. 무고한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에 널려있고 귀중한 쌀알이 땅에 흩뿌려지는 그야말로 참혹한 현장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都元帥)로, 나세(羅世)를 상원수(上元帥)로, 그리고 최무선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진포에 급파하는 대비책을 세웠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온 화약 무기를 수전에서 실제로 사용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함포를 탑재한 고려의 최신식 전함이 실전에 투입되어 3명의 원수를 필두로 한 왜구토벌대가 진포로 출정하였다.

이때 진포의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편성되었던 고려 전함은 100척이었다. 양적 규모로만 보자면 왜구의 함대에 비하여 보잘 것 없었다. 그 때문에 진포에 도착한 고려 함대를 본 왜구들은 잠시 안심했을지도 모르겠다. 곧 그들은 자신의 전함들을 한곳에 모아 전력을 집중시켜 고려 수군을 섬멸하려는 전략으로 대응하였다. 물론 이전의 상황이었으면, 애초에 당해내기 어려운 전력 차이였으니 이와 같은 왜구들의 전략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은 그곳에 당도한 고려의 전함에 화포가 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구들의 의도와는 달리 왜선들이 한곳에 집결되자 오히려 고려 수군 입장에서는 공격하기 수월해졌다. 고려 수군이 함포를 발사하여 모여 있던 적선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불태우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이 공격으로 인하여 배를 지키던 왜구들이 거의 타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본격적으로 왜구가 침입해 들어 온 지 30년 만에 바다에서 거둔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통쾌한 대승리였다. 왜구에 사로잡혔던 고려인 포로 중 334인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진포대첩은 오랜 시간 극도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화약 무기로 거둔 값진 승리였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군선에 장착한 화포를 이용한 해상 공격이 이루어졌던 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4 통쾌한 승리와 뒤이은 참상

승전의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 소식을 가져온 진무(鎭撫)에게 은 50냥이라는 포상을 내린다. 그리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심덕부, 나세, 최무선이 돌아오자 성대한 잔치를 열어 환영하고 이들 지휘부에게 각각 금 50냥씩, 그 아래 비장(裨將) 정룡(鄭龍)·윤송(尹松)·최칠석(崔七夕)에게 은 50냥씩 하사하였다. 이처럼 후한 포상을 통하여 진포대첩에서 고려군이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권근(權近)이 진포대첩에서 왜적을 격파한 최무선의 공을 축하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 남아 있다.

진포에서의 일전은 고려의 대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왜구는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진포의 화염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이 문제였다. 진포가 거점이 되어 왜선들이 대거 정박해 있었던 이유는 고려에서 약탈한 물품들을 싣고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화포로 인해 모든 배가 타버려 퇴각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자, 궁지에 몰린 왜구들은 더욱 독이 올라 잔악해졌다. 포로로 잡았던 고려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여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그들이 가는 길은 피바다를 이룰 정도로 악에 받쳐있었다.

왜구가 진포의 고려 수군들을 피하여 이미 내륙에 들어가 있었던 자들과 합세하게 되면서 고려 백성들에게는 참혹한 지옥이 펼쳐졌다. 왜구들이 육지 깊숙이 들어가며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고 불을 지르니, 양광도·전라도·경상도의 바닷가 고을이 텅 비게 되는 왜구의 침략 이후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진포대첩 승리의 부작용은 이처럼 거셌으나 이 또한 뒤이은 이성계의 활약으로 평정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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