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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 수축[千里長城 修築]

고려 북방 경계선의 안정화 과정

1033년(덕종 2) ~ 1044년(정종10)

천리장성 수축 대표 이미지

함남 정평 흥성리 장성 외면 석루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고려 천리장성 수축은 덕종(德宗)과 정종(靖宗) 두 임금의 재위기간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던 고려의 국가사업이다. 태조(太祖) 때부터 지속적으로 북방에 성을 쌓으며 영역을 확장해 왔던 고려는, 이때에 이르러 성들을 연결하고 관문을 설치함으로써 국경선을 견고히 하고 지배 영역을 안정시켰다. 고려 천리장성은 덕종대의 신축 단계, 정종대의 수축 및 연장 단계라는 두 단계를 거쳐 축조되었다.

2 천리장성 축조와 그 배경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정책을 펼쳐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해 왔다.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성보(城堡) 조를 보면 축성 기사는 광종(光宗) 때까지 빈번하게 나타나다가 경종(景宗) 때와 성종(成宗) 때에는 드문드문 확인된다. 그러다가 거란의 1차 침입을 계기로 994년(성종 13)과 995년(성종 14)에 걸쳐서 압록강 이동에 강동6주(江東六州)를 축성하였으며, 이후로 다시금 축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축성된 성들은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거란군의 진격을 늦추고 퇴각하는 거란군에 피해를 입히는 중요 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

그런데 1014년(현종5)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義州) 지역에 보주(保州)를 설치하고 성을 쌓으면서, 축성을 통한 고려의 북방 영토 확보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침입으로부터 8년 뒤인 1018년(현종 9)에야 3차 침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2차 침입과 3차 침입 사이에도 비교적 소규모의 국지적인 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2차 침입 이후 첫 교전은 1014년(현종 5) 겨울 10월에 소적렬(蕭敵烈)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通州)를 침략하자 강동6주 중에서도 최전방인 흥화진(興化鎭)을 지키던 정신용(鄭神勇) 등이 이를 격퇴한 것이었다. 이러한 겨울 10월 작전에 앞서, 거란에서는 2차 침입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압록강 이동에 전선기지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고, 소적렬로 하여금 1014년(현종 5) 여름에 보주성을 쌓게 하였다. 이는 고려 입장에서는 흥화진 바로 앞에 거란군이 주둔하는 성이 생긴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거란은 이듬해에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동쪽과 서쪽에 성을 추가로 축성하였다.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부터 3년 뒤인 1022년(현종 13)에 현종(顯宗)이 다시금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거란의 고려침입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1029년(현종 20) 발해(渤海)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으로서 거란의 장군이던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건국하고 고려에 원조를 요구하면서, 압록강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흥요국은 결국 고려의 원조를 얻지 못하고 이듬해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는데, 고려에서 돕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평화를 얻은 지 10년도 안 되어 거란과 재차 전쟁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흥요국의 원조 요청을 거절했기에 고려는 흥요국의 보복을 염두에 두어야 했고, 이를 빌미로 거란군이 고려에 재차 침입해 올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었다. 현종은 당시 압록강 전선을 책임지던 서북면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 유소(柳韶)가 상을 당해 물러나려 하자, 그를 급히 불러들여 변방으로 보내 대비케 하였다. 이 해에 유소에 의해 보주성을 감싸도록 흥화진 양쪽에 위원진(威遠鎭)과 정융진(定戎鎭)이 설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030년(현종 21)에는 압록강 근처 인주(麟州)에 성을 쌓아 방어체계를 강화하였다.

비록 흥요국이 멸망하고 고려가 거란을 축하하며 양국 간 관계는 회복되었으나, 거란군이 압록강 이동에 주둔하고 있는 이상 고려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왕가도(王可道)가 말했듯이 압록강 연안에 설치된 다리와 성의 존재는 곧 거란이 언제든지 기회가 된다면 고려를 병탄하려는 뜻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1031년(덕종 즉위) 고려에서 덕종이 즉위한 해에 거란에서는 성종(聖宗)이 죽고 흥종(興宗)이 16세로 즉위하였는데, 섭정이 된 흥종의 생모가 성종의 부마이자 황후의 남동생인 소필적(蕭匹敵)을 역모 혐의로 죽이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웠다. 당시 고려에서는 이를 기회로 보고 보주성을 공략하자는 견해, 거란과 통교를 끊되 출병하지는 말고 방어를 강화하자는 견해, 그대로 거란과의 통교를 유지하자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결국 덕종은 거란의 새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하정사(賀正使) 파견을 중단하여 외교적으로 압박하되 출병하지 않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당연히 거란의 보복을 대비하여야 했기에, 1032년(덕종 1) 거란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삭주(朔州) 등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인 1033년(덕종 2)에는 인주와 위원진 사이에 정주(靜州)를 두고 축성하여 새로운 전선기지로 삼았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거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거란과 고려 간 외교관계가 경색되는 가운데, 양국의 최전선인 압록강 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033년(덕종 2) 유소의 주도 아래 처음으로 관방(關防) 곧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 그 범위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어귀의 인주로부터 위원진, 흥화진, 정주, 정융진 등을 거쳤고, 동쪽으로는 송령(松嶺)에 닿았으나 현재 송령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공사를 시작한 지 겨우 3개월 뒤에 관성(關城)을 개척할 때 공로가 있었던 여진인들에게 포상을 내린 것으로 보아, 공사기간은 비교적 짧았고 대체로 그동안 보주성을 바라보도록 축성해 온 성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 천리장성은 거란의 침입을 겪었던 고려에서 거란과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는 한편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방어선을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축조되었다.

3 천리장성의 수축과 연장, 완성

덕종이 사망하고 정종이 즉위하자 1035년(정종 1) 거란에서는 고려에 외교관계 재개를 요구하면서, 고려가 장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해 길을 막고 목책을 세웠음을 비판하였다. 고려에서는 이에 변방의 백성들을 쉬도록 하기 위해서지 황화(皇化)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답변한 뒤, 곧바로 기존에는 송령까지였던 장성을 더 동쪽으로 추가 축조하였다. 축조 이유는 명목상 여진족을 의미하는 변방의 도적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거란의 외교적 압박이 실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범위는 1042년(정종 8) 북계(北界)의 장성을 관할했을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압록강부터 청새진(淸塞鎭)까지의 번인(蕃人) 호구 수를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자강도 희천시(熙川市) 일대에 있었던 청새진까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이 1037년(정종 3)에도 사신을 보내 고려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한편으로 압록강의 고려 영역에 침입하자, 고려에서는 다시 거란의 연호를 쓰고 하정사를 보내면서 거란이 압록강 이동에 성을 쌓는 것을 멈춰달라고 요청하였다. 거란에서는 이를 변방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아무 문제없다고 거절하였으니, 이 때 고려와 거란 사이의 외교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양국은 여러 명분을 대며 서로를 견제하고자 축성을 계속 이어나갔던 것이다.

또한 동북방 여진족들의 침입 역시 그저 장성 축조의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이에 먼저 1041년(정종 7) 최충(崔冲)에 의해 오늘날의 자강도 희천시와 평안남도 영원군(寧遠郡) 지역에 영원진(寧遠鎭)과 평로진(平虜鎭)이 설치되었으며, 두 진에는 각각 관성(關城)을 두어 청새진과 연결함으로써 장성을 연장하였다. 앞서 인주에서 청새진까지는 이미 축조된 성들을 연결하는 데 그쳤던 것과 달리 영원진과 평로진은 장성 축조와 더불어 공백지에 신설된 곳으로서, 그 위치도 압록강 전선이 아니라 보다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동해안을 주로 약탈하며 점차 서쪽으로 진출하는 여진족들을 통제하고 막기 위해서였다.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44년(정종 11)에 영원진에 여진족 100여 명이 침입해왔던 데서 영원진, 평로진의 주 경계 대상이 여진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천리장성의 목적이 비단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고 여진족들의 약탈에 대응하는 데에까지 확장되면서, 장성 역시 북계뿐 아니라 동계(東界)의 동해안 도련포(都連浦)까지 연장되며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1043년(정종 10)에 기존의 동계 최북단이었던 화주(和州)에서 북상하여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일대에 장주(長州), 정주(定州), 원흥진(元興鎭) 그리고 선덕진(宣德鎭)을 설치하여 축성하면서, 이곳들에 관문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천리장성으로 인해 고려는 거란과 대치하면서 서로 견제할 뿐 다시 대규모 침입을 겪지 않을 수 있었고, 약탈을 방지하고 영토를 안정시킴으로써 여진족들이 침입 대신 귀순을 택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도 있었다.

4 천리장성 완성 이후의 흐름

천리장성이 완성되고서 그 너머에 살던 여진족들이 고려에 귀순하는 일이 잦아지자, 천리장성 너머에도 고려의 주현(州縣)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하는 여진족이 금(金)을 건국하면서 천리장성은 그대로 금과 고려의 국경선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특히 거란이 멸망하고 금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보주성 일대를 고려가 장악함으로써, 의주(義州)가 새롭게 압록강 쪽 관방 역할을 하게 되었다. 1119년(예종 14)에는 고려에서 장성을 더 높게 증축하자 대치하고 있던 금의 변리(邊吏)가 병사들을 동원해 제지하려다가 황제의 명으로 그만두고 방비를 강화하는 등, 금에서는 천리장성을 고려의 최전선으로 여기고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었다.

13세기 들어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1258년(고종 45)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화주 이북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됨으로써, 천리장성의 동쪽 부분이 그대로 몽골에 넘어가게 되었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략함으로써 거의 100년 만에 옛 장성 일대가 수복되었으나, 조선 초기에 이르면 옛 장성의 존재가 전해지고 확인될 뿐 실제 장성 및 관문으로서는 기능하지 못하였다. 이로 보아 고려의 천리장성은 여말선초를 거치며 그 의미를 상실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장성의 서쪽 끝이었을 신의주(新義州)에 토성(土城)의 흔적이 남아 있고 동쪽 끝이었을 정평(定平)에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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